우리는 사회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성장하고 생활하면서 자아 혹은 나라는 관념을 갖게 된다. 심리학에서는 자아라는 개념을 고정적이지는 않지만 정체성과 관련된, 인간 존재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하며, 이 관념이 주로 형성되는 시기를 청소년기로 잡는다. 따라서 이 시기는 발달심리학에서 자아 확립 시기라고 불린다.
자아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아마도 자신을 지속성 있는 존재로 생각해서 그를 실체화하고 그에 애착을 갖게 되는 과정을, 일반적으로 자아의 발생 및 확립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 같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인간 발달의 중요한 과정으로 규정하며 사람이 예외 없이 거치는 과정으로 상정한다.
이에 반해, 불교적 무아설의 기본 입장은 우리가 갖는 이 자아 관념이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생각의 잘못된 전제가 된다는 것이다. 자아는 허상이며 몸이라는 물질과, 여기서 파생하는 의식과 인식의 변화하는 흐름만이 인간의 참모습이라는 관찰이다. 우리의 모습은 시간을 따라 변하고, 인식과 감정도 신체와 주위 환경의 변화에 따라 달라져서 자아라고 할만한, 실체라고 할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다는 견해다. 어리석음에서 온 자아 관념 때문에 태어남과 죽음이 생기고, 자아를 지속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영혼이나 부활, 극락, 천당이란 개념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적어도 종교적 특성은 약하고 수행적 성격이 강했던 초기 불교의 가르침은 그렇다.
이러한 불교적 무아설은 생물로서의 출생과 사망을 부인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는 시작과 죽음이라는 끝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물질의 흐름이라는 우주에서 나타나는 거시적 변화의 관점에서 보면 진정한 시작과 끝이 아니라 흐름의 극미한 점에 불과하다. 사람과 생물을 구성하는 세포와, 세포를 구성하는 분자와 원자는 바로 물질의 흐름에서 온 것이며, 죽어서 분해되는 사람의 기관, 조직, 세포는 다시 분자와 원자로 환원되어 물질의 흐름으로 복귀하기 때문이다.
위의 두 진실을 구분해 보면, 생물로서의 생과 사는 불교에서 세속제(世俗諦)라고 불리는 상식적 차원의 진리이고, 물질, 의식, 인식의 연기된 흐름으로 우주 속의 인간을 파악하는 것은 이와는 차원이 다른 승의제(勝義諦), 즉 궁극적 진리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궁극적 인식에 도달하는 것은 참으로 지난한 일이다. 우리는 우주라는 큰 틀을 보지 못하고 협소한 현실에 함몰되어 늘 ‘나’를 되뇌며 ‘나’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 지력의 한계와 욕망의 구속에서 온다. 인간의 인식이 완전하지 못한 것은, 다른 동물의 경우에는 이 자아라는 개념을 만들어낼 만한 인식 수준에도 이루지 못하고, 감각과 본능 그리고 낮은 수준의 의식에만 머물러 있는 듯하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인간의 자아라는 허상이 더 깊고 바른 인식을 방해한다는 점에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별 의미 없는 것에 가치를 두고 집착하며, 우주와 인간에 대한 더 본질적 사고에 도달하지 못하게 된다. 여러 경전과 개인적 경험을 통해서 보면, 이런 바른 인식에 도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며 지속적 공부와 정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올바른 인식을 실제로 자신의 삶에 녹여내는 데는 더 깊은 자기성찰과 오랜 기간의 수양 과정이 요구된다. 어쩌면 이 목표에 이르려는 이상을 추구하며 살다가, 닿지 못하고 물질의 큰 흐름으로 다시 환류(還流)하는 것이 수행인의 삶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