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주도형 산업 구조가 케이팝에 끼친 영향

by 나사


왜 케이팝은 한국에만 머무르지 않았을까. 어느 나라나 각자의 대중음악이 있지만, 케이팝은 처음부터 세계를 상대로 노래했다. 10여 년 먼저 세계적 인기를 끌었던 일본 제이팝과 달리, 케이팝은 지속적으로 글로벌 시장을 겨냥했다. 버클리 대학의 석학 존 리 교수는 케이팝의 세계적 현상이 3대 기획사와 국가가 합작해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분석하며, 이를 ‘수출지향형 상품’이라 평가했다. 이는 한국의 인구 구조와 산업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1970년대부터 수출주도형 제조 산업으로 성장한 한국은 많은 산업에서 해외 시장을 염두에 두고 있다. 전자·자동차·조선 등 제조업이 이미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입증하던 것처럼, 대중음악 산업도 ‘문화 수출’이라는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정부는 ‘문화산업진흥기본법’(1999) 제정 이후 콘텐츠 산업을 국가 전략산업으로 지정했고, 한류는 단순한 유행이 아닌 국가 브랜드의 일부로 기획되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3대 기획사는 엔터테인먼트를 하나의 수출 산업으로 조직화했다. 대규모 연습생 시스템, 표준화된 제작 공정, 해외 시장을 겨냥한 언어·비주얼 전략은 모두 당시 한국 산업 구조의 ‘수출 지향형 모델’을 그대로 옮겨온 결과였다. 다시 말해 케이팝은 예술이라기보다, 산업화된 한국 사회가 만들어낸 문화적 수출품이었다.


SM엔터테인먼트는 그 선봉장이다. 이수만은 1990년대부터 H.O.T와 S.E.S를 각각 중국과 일본 시장으로 진출시켰다. . H.O.T는 2000년 2월 베이징에서 1만 석 이상을 가득 채우며 첫 단독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고, 베이징 시내에는 H.O.T 카페가 생기기까지 했다. S.E.S는 재일 교포 출신인 슈를 중심으로 일본 진출을 꾀했다. 2010년대 엑소는 엑소K와 엑소M 두 유닛으로 나뉘어 한국과 중국 시장을 동시에 공략했다.


보아BoA는 ‘전략형’ 아티스트 시스템의 정점을 보여준다. 이수만이 직접 발탁해 13세에 데뷔한 그녀는 연습생 시절부터 해외 진출을 위한 영어와 일본어 훈련을 받으며 아이돌로 컸다. 당시 보아를 인터뷰했던 한 패션잡지의 전 편집장은 그녀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이렇게까지 똑똑한 연예인이 있을 수 있나.” 노래와 춤은 물론, 언어와 매너까지. 말하자면 보아는 ‘한국식 기획형 아이돌 시스템’의 시작이자 표본이라고 볼 수 있다.

SM엔터테인먼트가 대중음악을 체계적으로 양산하고 상품화하면서 일종의 ‘정형화된 공장’을 만드는데 성공했다면, JYP는 ‘케이팝 공식’의 기틀을 마련했다. 존 리 교수는 그 기점을 2007년 발표된 원더걸즈의 <Tell Me>로 본다. <Tell Me>는 ‘후크송Hook Song’이라고도 불리는 특이한 후렴구에, 독특한 안무를 더했다. 음악 소비자 입장으로서는 시청각적으로 ‘각인’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2000년대 중후반부터 한국 대중음악계에는 <Tell Me>의 공식을 따른 곡들이 쏟아져 나온다. 심지어 SM엔터테인먼트조차도 기존의 SM 스타일을 버리고, 이 공식을 따라가게 된다. 예컨대 소녀시대는 기존의 발랄한 서사가 있는 댄스곡에서 2009년 <GEE>를 통해 음악적 변화를 준다. 같은 시기 활동했던 슈퍼주니어도 2009년 <Sorry Sorry>를 발표하며 한류 스타로 성장한다. 전 국민이 노래와 춤을 아직도 알고 있는 이 곡은 멜론에서 연간 음원 차트 9위, 대만에서는 1년 넘게 1위 자리를 차지했다.


이 공식과는 다른 길을 걸으면서도 케이팝사(史)에 획을 그은 그룹도 있다 2006년 YG에서 데뷔한 빅뱅은 힙합, R&B, 일렉트로닉 댄스뮤직을 넘나들며 개성과 창작 중심의 또 다른 케이팝 모델을 제시했다. 그들은 ‘프로듀싱 아이돌’의 원형으로, 자작곡과 패션, 비주얼을 모두 직접 통제하며 문화적 주체로서의 아이돌을 재정의하며 세계적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그룹 활동이 중단된 2018년에도, ‘케이팝의 제왕’이라 불리는 지드래곤은 영국 《더 가디언》이 선정한 ‘역사상 최고의 보이그룹 멤버’ 11위에 올랐다. 이는 케이팝이 단순한 산업을 넘어 하나의 창의적 문화로 인식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참고 문헌>

John Lie, (2019), 케이팝(김혜진 역), 소명출판. (원저 출판 2012)


박수윤.(2018년 12월 14일). 지드래곤·지민, 英 가디언 선정 최고 보이그룹 멤버. 연합뉴스.

https://www.yna.co.kr/view/AKR20181214096400005.


윤고은. (2011년 5월 31일). 슈주 '미인아', 대만차트 1년 연속 1위. 연합뉴스.

https://www.yna.co.kr/view/AKR2011053113810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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