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이 철학적 경계를 허물 수 있던 배경으로는 역설적으로 한국의 전통 사상과 문화가 진공 상태라는 점을 꼽을 수 있다. UC 버클리의 존 리John Lie 교수는 현대 한국이 ‘문화기억상실증cultural amnesia’에 걸렸기 때문에 케이팝이 가능했다고 진단한다. 즉, 한국인들이 케이팝에 열광하는 것은 사실은 음악적 전통을 비롯해 공통의 철학과 신념이 부재하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그는 그의 저서 <케이팝>을 통해 한국의 근현대가 어떻게 전통을 지워왔으며, 1950년대 이후 일본과 미국 음악을 추종해왔는지를 상술했다. 그는 한국인들이 케이팝에 열광하는 것은 사실은 음악적 전통을 비롯해 역사적 영웅과 공통의 신념이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리 교수는 여기서 한국인들이 왜 ‘우리’를 강조하는지를 지적한다. 그는 “현대 대한민국 연설에서는 도처에서 ‘우리’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는 한국인성 계보와 사회학을 공유한다는 믿음에 근거한다”라고 말한다. 즉, 이는 단일민족 신화를 계승하는 수사로, “한민족 이전에도 인간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행위다. 여기에 급속한 세계화로 “현대 한국인이든 현대 미국인이든 각각 한 세기 전 조상보다는 차라리 서로와 더 가깝다고 해도 과장은 아니다”라며 세계화 사회의 보편성을 재차 강조한다.
특히 그는 한국의 전통 철학이라고 여겨지는 유교 역시 사실상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며, 당초 사대부 양반들의 문화였다는 점을 지목한다. 즉 유교는 한 번도 ‘민족 공통의’ 철학이었던 적이 없고, 결과적으로 한국 사회는 어떠한 철학적 공통분모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인 특수성을 설명하면서 무작위로 유교를 들먹이는 이유는 유교 책과 이론에 무지해서”라며 “사실 어떤 목적으로든 어디서든 전통을 쉽게 불러낼 수 있는 이유는 전통이 공허해서”라고 주장한다.
다소 가혹하게 들릴 수도 있겠으나, 꼭 부정적인 의미만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 가치는 대개 설화나 민담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국가에 대한 충(忠), 부모에 대한 효(孝)를 중시하며 ‘대의’라는 개념을 내세운다. 오랜 기간 중국 유교의 영향을 받은 사대부들의 가치다. 집단을 위해, 어른을 위해, 또 상사를 위해 자신을 가차 없이 희생하라는 게 근대 이전의 사상이었다.
이러한 세계관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기장수> 설화다. 평민의 집에서 나라를 뒤집을 위대한 영웅이 태어나지만, 체제의 보복에 두려움을 갖고 있던 부모는 자발적으로 아이를 죽인다. 아이의 유언에 따라 묻은 콩과 팥에서 군사들이 일어나려고 하지만, 그는 다시 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설화의 내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을 그대로 인용했다.
"옛날 어느 곳에 한 평민이 아들을 낳았는데, 태어나자마자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어 이내 날아다니고 힘이 센 장수였다. 부모는 이 장수가 크면 장차 역적이 되어 집안을 망칠 것이라고 해서 돌로 눌러 죽였다.
아기장수가 죽을 때 유언으로 콩 닷섬과 팥 닷섬을 같이 묻어달라고 하였다. 얼마 뒤 관군이 아기장수를 잡으러 왔다가 부모의 실토로 무덤에 가보니 콩은 말이 되고 팥은 군사가 되어 막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결국 아기장수는 성공 직전에 관군에게 들켜서 다시 죽었다. 그런 뒤 아기장수를 태울 용마가 나와서 주인을 찾아 울며 헤매다가 용소에 빠져 죽었다."
서양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그리스의 크로노스 신화다. 제우스의 아버지인 크로노스는 자식 중 한 명이 자기를 죽이고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된다. 이후로는 자식들을 태어나는 족족 먹어버리지만, 아내 레아의 속임수에 넘어가 제우스만은 먹지 못한다. 제우스는 아버지를 피해 숨어서 지내며 복수를 꾀한다. 결국 그는 크로노스에게 먹은 것을 토하게 하는 약을 먹여 이미 잡아먹힌 형제들을 구하고 아버지를 몰아낸다.
부모가 자식을 죽인다는 점까지는 비슷하지만 결말은 전혀 다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자식이 부모를 이기고 새로운 시대를 열지만, 우리나라 설화는 질서의 보존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서사다. 전자가 ‘자유와 변화’를 긍정하는 서사라면, 후자는 ‘충과 복종’의 미덕을 재현한다. <아기장수>도 큰 뜻과 역량에도 불구하고 부모에 의해 희생됐고, 버림받은 바리데기 공주는 자신을 버린 부모를 위해 저승까지 간다. <선녀와 나무꾼>의 나무꾼은, 노모(老母)가 보고싶다고 하늘에서 다시 땅으로 내려왔다가 뜨거운 죽을 먹으라는 어머니의 권유를 거절하지 못하고 결국 수탉이 되어버린다.
요즘의 젊은 세대들이 들으면 낯설게 느껴질 이야기다. 전통적 가치가 불합리하거나 비상식적이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다른 가치'를 교육받아왔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의 지배계층 역시 서구 문화와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고, 그 가치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됐다.
전통의 빈자리는 서양 철학이 채워왔다.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은 이르면 10대 때부터 고대 그리스 신화와 철학을, 고등학교 때는 교과목을 통해 막스 베버, 존 로크, 장 자크 루소 등 배운다. 대한민국 청소년들이 배우는 철학이란 개인의 자유와 공공선을 지향하는 인본주의 철학이지, ‘부모님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유교 철학이 아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케이팝 세대는 이런 교육적 배경과 마음의 습속에서 자라났다.
최근 대중음악에서 나타나는 메시지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서술된다. 쓰는 이도, 듣는 이도 서양의 인본주의 교육을 공통분모로 두고 있다. 케이팝에도 영웅 서사를 노래하는 작품들이 다수 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BTS의 <앙팡맨Anpanman>이다. 우리나라 말로 '호빵맨'인 Anpanman은 <아기장수>와 대비되는 새로운 세대의 영웅상을 그린다. 그는 알통도 갑빠도, 배트맨같은 슈퍼카도 없지만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신체 일부를 떼어내준다. 넘어지고 쓰러져도 누군가를 위해 다시 일어나고 희망을 주겠다는 게 앙팡맨의 다짐이다. 운명적 영웅이 아닌, 실천적 인간으로의 전환이 이 세대의 윤리다.
BTS의 ‘너 자신을 사랑하라<<Love Yourself>>’나 제니의 <Like Jenny>와 같은 자기 존중의 가치, 리사의 <<Alter Ego>>>와 등에서 나타나는 정신분석적 자기 이해는 최근 케이팝의 주제다. 이런 메시지는 특정 국가에 국한하지 않고, 세계 어디서나 공감 가능한 보편적 내러티브다.
다시 존 리 교수의 지적으로 돌아가서. ‘우리’라는 단어는 집단중심적 사고를 호출하는 수사일 수 있다. 하지만 케이팝은 무의미했던 '우리'에 연대의식을 부여하고 진공 상태였던 '공통의 신념'에 인류 보편의 가치를 채워넣었다. 케이팝은 한국적 언어에 인류 보편의 철학을 담아 동서양 담론의 경계를 해체하고 새로운 예술의 지평을 연다.
<참고 문헌>
최내옥. (n.d.). 아기장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4222 (접근일: 2025년 10월 25일)
John Lie, (2019), 케이팝(김혜진 역), 소명출판. (원저 출판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