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기말고사, 졸업 시험 시즌이 됐다. 10년 전 이 시기가 생각난다. 내 졸업 논문 주제는 W.H. Auden의 새해 편지가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적 관점으로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였다. 오든은 새해 편지를 총 3장으로 나눴는데 인간이 궁극적으로 종교를 통해 진정한 실존적 자유를 얻는다는 점에서 키에르케고르 사상과 유사하다는 내용이었다.
한 학기 내내 중앙도서관에 지박령처럼 붙어있으면서 진정한 학구적 희열을 느꼈다. 닫혔던 대천문이 열리고 뇌 안에 있던 지적 즐거움이 구름까지 용솟음치는 느낌이었다. 경직된 뉴런들의 해방이요 꺼진 축삭(axon)의 부활이었다.
밤 11시 중앙도서관 문이 닫힐 때 코를 깨우는 찬 가을밤 공기를 맡으며 하산하면 하루를 오롯이 살았다는 성취감이 나를 에워쌌다.
그렇게 보낸 4학년 2학기는 아직도 내게 추억의 시간이다. 다시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학문에만 순수하게 열중할 수 있던 시간이었다. 그리운 시절이다.
인터넷, 재능 나눔, 프리랜싱, 아르바이트 어플 등이 활성화되면서 이런 추억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도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
최근 부쩍 졸업 논문 대필 의뢰가 많이 보인다. 경제학에서 영문학 국문학까지 다양하다. 가격은 50만 원에서 100만 원까지 천차만별이다. 처음에는 이 사람이 특이한 거겠거니 했는데 수가 계속해서 늘어난다. 의뢰 지역을 보면 학교도 대충 짐작이 간다.
과제도 아니고 졸업 논문 대필이라니. 그들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만 그 사정이 뭔지 정말 들어보고 싶었다. 기말고사가 바빠서 못한다는 사람, 글쓰기에 재능이 없어서 그냥 대필하겠다는 사람 등. 소스와 아이디어는 자신이 주니까 괜찮지 않냐고 한다. 표절이나 부정행위는 아니지 않냐고.
졸논을 쓴 지 10년이 다되어가서 나도 뭐가 부정행위나 표절로 간주됐는지 그 기준을 명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한다. 자세한 내용은 몰라도 대필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이는 명백한 부정행위다. 대필이 적발되면 학위 취소는 물론 대필자까지도 형사처벌을 받는다고 한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논문 대필은 형법 제137조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제314조 업무방해에 해당하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는 죄"라고 한다. (https://www.google.com/amp/www.donga.com/news/amp/all/20120523/46446927/1)
최근 인터넷과 모바일로 글쓰기가 성행하고 프리랜서도 쉽게 할 수 있게 되면서 이런 일들이 더 쉬워진다. 예전에는 논문 대필을 요구하는 사람, 해주는 사람들끼리 그들만의 시장이 있었다면 이제는 오픈 마켓이다. 글쓰는 사람에게 연락해서, 돈 줄 테니 내 논문 좀 써다오 하는 세상인 것이다. 아무리 아이디어와 리서치를 의뢰인이 했다고 하더라고 작문이 그냥 도구도 아니고 이 또한 지적 재산인데 타인의 재산을 활용해 쓴 논문을 어떻게 온전히 자신의 이름만 올려 낼 수 있는지 의문이다.
석사나 박사를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학문의 길을 간 것이기 때문에 조금 다르지만, 학사만 딸 생각인 사람들은 졸업논문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논문이 될 것이다. 졸업논문만큼 자신의 사상과 가치관, 연구하고 싶은 주제를 자유롭게 공부하고 탐닉할 수 있는 기회도 없다. 그런 기회를 몇십만원 주고 날리기에는 아쉽지 않을까 싶다. 뭐 사람마다 다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