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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사 May 18. 2021

3주간의 외도가 끝났다

첫사랑은 미국에서였다. 허리케인 샌디가 왔을 때였는데, 지하철도 끊긴 마당에서 나는 어떻게든 라이드를 구해 집에서 그가 있는 사무실까지 갔고 비가 그칠 때까지 함께하며 돌아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가 만류해 집으로 왔지만.


그의 요청으로 영하 16도의 추위에서 8시간 동안 떨었던 적도 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이 재선 캠페인을 하던 날인데 그 시간이 괴롭기는커녕 '평생 이렇게 살아야겠다'라고 결심한 순간이었다. 그를 위해서 하는 행동 모든 것이 행복이었다. 그렇게 불태웠던 13개월이다.



이 얘기를 하자 남편은 혀를 끌끌 찼다. 참 안타까운 인생이라고. 첫사랑 이야기에 조소를 날린 이유는 따로 있다. 내 첫사랑은 바로 내 첫 직장이었기 때문.


내 첫 직장은 미국에 위치한 언론사였다. 인턴으로 시작했던 직장에서 이례적인 제안을 받아 리서처로 총 13개월을 근무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모든 순간이 애틋하고 아련한 시간들이다. 마음속의 첫사랑 다들 하나씩 있지 않은가. 누군가의 배수지가 나에겐 첫 직장이다.


세상 모두가 날 배신해도 나의 열심과 나의 일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어느 정도 갖고 있는 믿음이다. 어찌 된 일인지 25세의 이 아가씨는 미국 유학에 가서도 연애나 여행 생각은커녕 첫 직장과 인턴십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다.


새벽 1시까지 연애편지(라고 쓰고 업무 메일이라고 읽는다)를 쓰고 '내가 여기 인턴이야'라는 자부심에 차있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취재 현장에 나갔고 시키지도 않은 잔업을 해서 정직원들조차 당황했다고 한다. 고작 6개월 인턴에 불과한데 저렇게까지 할 거 있나. 심지어 무급인데 말이다.


그게 나의 숭고한 사랑 방식이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정말 사랑해서 하는 행동들. 어떤 연애 대상한테도 할 수 없던 일이다.


'일'이란 나에게 그런 존재가 됐다. 사랑하는 존재, 내가 온몸 다 바쳐 헌신해야 하는 존재.


한국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누 차례 언론사 낙방 끝에 마지막이다란 생각으로 지원한 회사에 최종 합격.  8년 전 어느 봄날, 나는 이 회사의 종신 계약서에 사인을 해버리고 말았다.


첫사랑과 배우자는 180도 다르다.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아 아련하고 또 미화된다. 반면 배우자는 계약으로 얽혀 파기하기도 어렵고 점점 민낯만 보게 된다. 분명 장점이 많은데도 자꾸 단점만 보인다. 고칠 데가 수두룩한데 고쳐질 것 같지도 않고 차라리 포기하는 게 빠르단 생각까지도 든다. 백날천날 잘해줘도 소용없다. 어떻게든 불만은 생기기 마련이니. 남들은 꼭 그러지. "야 너네 남편/와이프 너무 좋잖아." 그럼 대답도 한결같다. "네가 살아봐."


다른 언론사 지인들이 꼭 저렇게 말한다. "너네 회사만큼 좋은 회사가 어딨어." 배우자에 대한 평가에 하는 말을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 넣어보시라. "네가 다녀봐."


입사 4년 차부터 주야장천 저런 말을 들어왔다. 너네 회사 너무 좋지 않냐고. 1~4년 차엔 '좋다'라고 했던 대답이 점점 흐릿해지더라. 처음엔 웃음으로, 근래에는 '뭔 소리야'라는 거친 말로.


좋은 점이라곤 정말 보이지 않았다. 돈만 주면 뭐하나. 미래가 없는데. 조직은 고여있고 발전도 못할 것 같다. 입사했던 8년 전과 지금은 어쩜 이리 사업이 똑같이 굴러가나. 내가 사랑했던 언론업은 현장에서 뛰고 날내 나는 것들을 취재해 의미를 찾는 거였는데. 코로나19 때문인지 늙어버린 내 관절 때문인지, 언제부턴가 나는 키보드워리어요 책상 앞 지박령이다.


취재 환경은 또 어떠한가. 아직도 젊은 나이지만 더 젊은 나이에는 엉덩이 가볍게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취재하던 맛이라도 있었는데 사회적 거리두기와 김영란법으로 인적 네트워크 발굴이 영 쉽지 않다. 변명이라면 변명이라지만 변명의 구실이 될만한 꺼리는 있단 얘기기도 하다. 육아 휴직하고 돌아오니 모두가 집에 있고 만나자고 하면 민폐 취급당하더라.


이런저런 푸념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차에 말도 안 되게 쌈빡한 제안이 왔다. 상대는 최근 가장 핫한 스타트업 중 한 곳. 나의 그간 경력과 그 회사에 대한 애정을 높이 살 테니 홍보팀으로 오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아시죠 저희. 연봉은 당연히 n배 정도 맞춰 드리고요. 복지 패키지는...인력은...전망은..."


말을 줄인 이유는 말도 안 되게 또 쌈빡해서다. 이걸? 나한테? 왜~?


많은 고민들을 해결해줄 수 있는 솔루션이었다. 지금 내가 느끼는 회사에 대한 권태감과 성장성, 플러스 알파로 돈문제까지.


제안을 받고 매일이 짜릿했다. 10년간 몸담은 언론계를 떠나 스타트업에서의 도전이라니. 얼마나 진취적이고 모험적인가. 멋진 30대 신여성 이미지는 덤이다.


'앞으로 나는 슬랙스에 슬립온을 신고 출근할 거야. 아침에 일어나 아이를 등원하고 10시쯤 사무실에 가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하겠지. 일하다 힘들면 잠깐 회사 내 라운지에 나와 맥주 한잔 마시고 들어가야지. 나는 자유롭고 재기 발랄한 스타트업의 영혼~~'


들뜬 마음이 썰물처럼 다시 빠지자 그 밑에 깔린 뻘이 나왔다. 밀물 때 봤던 그 아름다운 바다는 어디 갔나.


분명 이전 같았으면 설렜을 조건과 환경이다. 나에게 일이란 사랑과 헌신의 대상이었으니. 10년 전에 만났으면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당신에게 몸을 내던졌을 것이다.


3주간 화려한 모습의 그이를 생각하며 들떴다. 근데도 계속 조강지처가 발목 잡더라. 조강지처는 계약으로 묶인 현재 회사이기도 하고 나의 오랜 사랑 언론업이기도 하다.


외도를 통해 오히려 무엇보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더욱 직시할 수 있었다. 애당초 화려하고 다이내믹한 업무 환경을 꿈꿨다면 창업이나 외국계 IT 회사의 문을 두드리지 않았을까.



기자란 직업은 무려 10살 때부터의 꿈이다. 장래희망 순위가 바뀐 적은 있어도 여기서 빠진 적은 없다. 오랜 기간 사모해온 존재였기 때문에 언론사에서의 인턴십이 이력서 한 줄이 아니라 첫사랑이 된 것이다.

 

이력서를 넣고 미팅까지 하고 나니 '기자가 아닌 내 자신'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스타트업으로 외도는 가능했지만 아예 조강지처를 버리고 세컨을 퍼스트로 만들 수가 없더라. 이런 말하면 돌로 맞겠지만 외도를 해도 이혼을 못하는 누군가의 마음이 이해되는 시간이었다.


내가 어찌 너를 버리며 어찌 네가 없는 곳에서 살 수 있을까. 오그라들지만 사실이 그렇다. 20년 가까이 사모하고 사랑해온, 그러다 익숙해져버린 직업이다. 떠나려고 하니 그 소중함을 느끼는 것이다.


잠시 한눈팔고 보니 가야  길이 명확해졌다. 기자란 꿈을 이뤘으니 여기서 정체할 것이 아니라  좋은 기사를 쓰는 기자, 언론산업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가던 길이 지겹더라도  길이 끝이 아니다. 걷다 보면 여기서  나갈  있는 것이고 어딘가엔 이르지 않을까.


그러고보니 그 노래가 괜히 나온 게 아닌 거 같네.


"조강지처가 좋더라~~~ ㅇ연료가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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