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 실화라서 혼자 아픈 이야기
'그래, 판사나 검사가 아닌 게 어디냐.'
우리 학교 일짱이 변호사가 됐다고 한다. 중학교 시절 그 '구'를 휘어잡은 일짱이다. 고등학교 때에도 명성은 계속됐다. 누군가는 그렇게 성공(?)하다니 대단하다며 치켜세울 수도 있겠다. 일짱이라고 하면 학창 시절이 명약관화 아닌가.
15년 넘게 잊고 지낸 그의 이름을 유튜브에서 만났다. 요즘 워낙 전문가들도 유튜브를 하다 보니 법률 지식 좀 검색하려고 했다가 말이다. 'ㅇㅇㅇ변호사'. 동명이인인가 싶었는데 썸네일을 보니 내가 알던 바로 그 일짱이다. 변호사가 됐다는 소식은 SNS로 얼핏 들었지만, 유튜브까지 하고 있을 줄이야!
그가 올린 동영상 제목을 주르르 보니 대체로 형사 사건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클릭해서 좀 봐볼까? 15년 만에 잊고 지낸 일짱 얼굴을 눌러본다.
3초. 그 영상에 내가 머물 수 있던 시간은 3초였다. 내용? 당연히 기억도 할 수 없다. 그의 얼굴과 목소리를 듣는 순간 토악질을 하고 싶어 졌으니까.
중학교 시절, 매점으로 가려면 꼭 그의 패거리를 지나쳐야 했다. 그 패거리는 매점 앞 계단을 지키고 서서는 여학생들 외모 품평을 하거나 속칭 '삥'을 뜯고 있었다. 그리 어려운 집 자제들도 아녔던 걸로 알고 있는데. 일진의 의무이자 책임 아닌가. 삥 뜯고 괴롭히기. 그런 점에서 그들은 매우 훌륭한 일진이었다.
여자를 때리는 무뢰한들은 아녔다. 언어 폭력은 많았어도 신체적 폭력은 없으니. 당시 잣대로 폭력배는 아닌 셈이다. 'xx 못생긴 x' '저 x 보니 하루가 재수가 없다' '저렇게 처먹으니 뒤룩뒤룩 살찌지' 등. 그들에게 이런 품평을 들은 게 나만은 아닐 것이다. 당시 그 학교를 다닌 많은 여학생들이 증언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그 일짱은 고등학교에 가서 문제집 조공을 받으며 성적 개조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싸움으로 단련된 신체와 체력! 불철주야로 공부해 꽤나 알려진 대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서 모두가 놀란 부분은 그 학교가 기독교 사상이 매우 강한 곳이라는 것. '가서 꼭 회개하렴.' 나는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는 정말 회개를 하고 개과천선을 한 모양이다. 몇 년 지나지 않아 로스쿨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정도면 완전 사기캐 아닌가. 일짱 출신에 공부도 잘하고 심지어 이제는 변호사?! 그리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지만 외모도 수려하다는 평가를 받으니 이건 뭐 웹툰 주인공이다.
그렇게 그는 그의 길을 갔다. 나는 또 나의 길을 갔다. 20살 이후로 다신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나도 내 인생에 나름대로 만족하면서 살고 있으니 설령 본다고 한들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다. 아니, 심지어 SNS로 연락을 해볼까도 생각했다. 축하한다고, 대단하다고.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고. 오히려 과거를 추억 삼아 일종의 인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낙관도 해봤다. 누구나 다들 어릴 때 철없는 시절 있지 않냐고 이해가 되기도 했다.
내가 나를, 그 상처의 깊이를 너무 몰랐다.
3년 내내 받은 스트레스와 굴욕감. 상처에 마데카솔을 발랐다고 생각했다. 새살이 난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 그냥 흉터가 되어서 더 이상 아프지 않았던 거다.
이미 20년 정도 흐른 일이지만, 10대의 연약한 내가 받은 상처는 꽤나 깊었던 거 같다. 매점 가는 길이 지옥 같았던 사람이 나 하나뿐일까? 내가 학교 오기 전에 미리 편의점에서 간식을 사 갖고 다녔다는 걸 이들은 알기나 할까? 그들이 복도 한구석에라도 있나 없나 눈치 보며 교실 밖에 나왔단 걸 알까? 하교길에 절대 마주치지 않으려고 외진 골목을 돌아간 건 알까? 일부러 다른 동네에 있는 학원들을 다닌 건 알까? 그들로 인해 나는 많은 친구를 잃었고 왜곡된 자아관을 갖고 살아야만 했다. 20대 때는 이 문제로 심리상담도 정기적으로 받지 않았던가. 상담 또한 10년도 더 된 일이니 가물가물 할 수밖에.
아마도 그는 이제 사회 정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훌륭한 변호사로 활동할 거다. 변호사 윤리 강령 1번이 바로 그거다.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 옹호와 사회 정의의 실현을 사명으로 한다.' 그의 과거가 이에 딱 배치(排置)되면 뭐 어떤가. 그때는 일진이었고, 지금은 변호사고. 그는 워낙 본분에 충실한 스타일이니 이제는 새로운 역할을 잘 수행해낼 거라 믿는다. 일진일 땐 일진, 이제는 변호사니까 변호사로. 또 혼자 속으로 빌어 본다. 실제로 그가 올린 영상들은 N번방 사건, 사기 등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건들을 다뤘다. 동영상을 더 볼 수 없어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갖고 법률 조언을 해준다는 거 자체가 사회 정의에 조금이나마 일조하는 게 아닐까.
동영상 다시 보면 되지 않냐고? 아직은 토악질을 할 거 같아서 그건 좀 힘들 거 같다. 유튜브에 추천 차단 기능이 있다면 그것도 검토해볼 것이다.
'흉터는 흉터더라도 아물었으면 됐지.'
이런 생각조차 없어지면 그때쯤 그의 유튜브에 좋아요와 구독을 누르러 갈 거다. 꼭 사회 정의 구현하는 좋은 변호사가 되길.
Photo by Melinda Gimpel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