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라는 성격 검사가 유행이죠. 전형적인 ESTJ, 이 성격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목표가 이끄는 삶'이 아닐까 싶네요. 엄격한 관리자형인 저는 출산휴가 및 육아 휴직에 들어가면서 바로 '해야 할 일 리스트'를 만들었습니다. 첫째, 영어 통·번역 공부하기 둘째 일본어 마스터, 셋째 일주일에 3번 이상 운동하기, 넷째, 대학원 진학 준비하기, 마지막으로 출간하기 등. 사실 돌 전 아기 키우는 엄마가 이 중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하면 대단한 건데 이걸 다 하려고 하니 저도 정말 욕심 많지요.
지난 6월 26일로 딱 12개월이 지났습니다. 이 중 저는 몇 가지나 성공했을까요? 예상하셨겠지만 단 하나도 없습니다. 대학원 진학은커녕 전공서 하나 제대로 펴보지도 못했죠. 운동하러 갔다가 아기가 울어댄다고 계속 전화가 오는 통에 PT 받던 중간에 돌아간 적도 있습니다. 일본어요? 일본어로 게임은 좀 한 거 같네요. 출간은 오가는 얘기가 있었으나 결국 출판사 방향에 아기 엄마인 제가 다 맞춰가기가 버겁더라고요. 결국 먼저 포기 선언을 했습니다. 그래도 애 자는 시간에 짬짬이 공부해서 취득한 TESOL이란 영어 교육 자격증이 훈장으로 남았네요.
출산 직후 많은 산모는 고된 육아, 커리어 단절 등에 좌절합니다. 이런 걸 산후우울증이라고 하는데요. 가벼운 사람도, 심한 사람도 천차만별입니다. 저는 좀 심한 편이었던 거 같아요. 아기 키우는 건 힘든 걸 각오했으니 괜찮은데 그동안 내가 쌓아온 모든 커리어가 증발하는 것 같거든요. 특히 저처럼 인맥으로 먹고사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관계로부터 고립이 남들보다 배로는 절망적입니다. 생일날 수십 통 수백 통씩 오던 카카오톡 메시지가 가족과 친한 친구들만 남게 됐을 때 오는 그 상실감이란 참 형언하기 어렵습니다.
그나마 그 상실감을 잊게 해주는 게 아기입니다. 힘들고 고되지만 수천 금을 갖다 줘도 바꿀 수 없는 게 아기와 보내는 시간이거든요. 역설적으로 그 행복에 젖어들면서 사회 속의 나는 더욱 잊히게 되지만요.
지난 4월. 여기에 쐐기를 박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바로 둘째 임신. 첫째와 17개월 차이로 태어날 예정이라고 합니다. 복직은커녕 휴직만 연장하게 생겼습니다. 2019년 7월에 휴직을 시작했는데 복직하면 2022년 3월이라고 하네요. 무려 3년의 업무 공백! 회사를 그만두지만 않았지 사실상 재입사와 다를 바 뭐가 있겠습니까. 둘째를 가진 기쁨보다는 내 인생 황금기의 3년이 날아갔다는 불안과 우울함이 되려 나를 집어삼킵니다.
첫째 아기가 8개월일 때 만난 둘째는 처음부터 약간 몸이 약한 듯했습니다. 기준 주 수보다 발달도 더디고 심장 소리도 희미하다고 합니다. 자궁에는 늘 피가 고여있고요. 담당의는 계속해서 첫째 육아를 좀 쉬엄쉬엄하고 최대한 많이 누워있으라는데 그게 어떻게 쉽나요. 이제 겨우 기어 다니는 아기를 어떻게 덜 신경 쓸 수 있겠습니까. 친정엄마를 동원해 최대한 쉰다고 쉬었는데도 산부인과는 야속하지요. 1~2주 간격으로 방문할 때마다 '유산기가 있네요'라고 합니다.
첫째 보랴 둘째 키우랴, '해야 할 일 리스트'는 이미 잊힌 지 오래입니다. 첫째만 있을 때는 아기가 잠자는 시간을 이용해 공부라도 했지, 이제는 그렇게 했다간 너무 몸에 무리가 갑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내가 세운 목표들을 내려놓게 됩니다.
'그래도 12주 차 안정기가 되면 뭐라도 할 수 있겠지. 그때 해야 할 일을 다시 생각해보자'며 심지어 새로운 플랜을 만들기까지 했다니까요. 저란 사람, 너무나 MBTI 결과에 충실하죠.
대망의 안정기 첫 검진일이 되었습니다. 정밀 초음파로 본 둘째는 뭔가 첫째 때와 모습이 다르더군요. 미끈미끈한 몸뚱이에 짧은 팔다리. 이상한 부분이 있는지 담당 간호사는 30분 가까이 초음파를 봅니다. 결국 담당의까지 불러와서는 다시 봅니다. 초음파 검진 후 담당의가 구구절절 설명하는데 마지막 한 마디가 아직도 아프네요. '아기가 생존하기 어렵습니다.'
생존하기 어렵습니다. 담당의뿐만 아니라 그 뒤로 찾은 대표 원장, 종합병원 교수님들, 또 다른 산부인과 전문의, 소아과 선생님까지 이구동성으로 그리 말하더라고요. 살 수 없는 아기. 결국 하늘나라로 엄마보다 먼저 간 아기. 둘째 아기는 이 땅에서 100일도 지내지 못하고 자기가 있던 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먼저 보낸 자식. 남는 건 회한이 대부분이더라고요. 내 인생 3년이 날아갔다는 생각에 아기에게 사랑을 주지 못한 건 아닐까. 나의 이기적인 욕망이 사랑보다 컸던 건 아닐까. 여기에 '아니야'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해서 더 마음이 찢어지네요. 그러게요. 무엇이 중요한데.
왜 저는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알지 못했을까요. 아무리 의사들이 '산모님 잘못이 아닙니다'라고 말해도 심장을 저미는 아픔이 그치진 않네요. 정말 무엇이 중요한데 저는 지난 13주를 그렇게 보냈을까요. 아기가 주는 기쁨을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말이죠. 무엇이 중요한데 '날아갈 3년 동안 나는 어떻게 커리어 단절을 메꿀까' 이딴 계획이나 세우고 지냈을까요. 그 시간에 태아에게 사랑한다고 좀 더 속삭이고, 누워서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음악만 듣고 지낼 수는 없었을까. 이제 와서 후회하고 아파해도 무얼 하겠습니까. 이미 아기는 엄마 뱃속보다 훨씬 크고 밝고 행복한 천국에 갔는걸요. 위안이 되는 건 아기가 이제는 빛나고 아름다운 형체로 하늘나라에서 절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점이네요. 다시 만날 날까지 저는 좀 아프겠지만 아기는 행복하게 지내겠죠.
'안녕 아가!' 생명의 잉태로 시작한 제 육아 휴직은 둘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는 소강하고 있습니다. 1년 동안 자식의 생과 사를 모두 겪으며 깨달은 게 하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내 옆에 존재하는, 나를 사랑해주고 내가 사랑하는 존재보다 중요한 것은 없단 것이죠. 내 인생과 커리어가 조금 뒤처지고 혹은 망가지면 뭐 어떻습니까. 무엇이 중요한데요.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사라지면 그 삶이 더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천만금을 갖다 줘도 마음은 휑하고 고칠 수 없는 아픔에 시달리겠죠.
육아휴직이 이제 약 2개월 정도 남았습니다. 첫째와 보내는 1분 1초가 너무나 애틋하고 소중하네요. 대학원, 외국어 공부, 커리어 개발. 다 복직하면 할 수 있는 일인데 지난 1년간 왜 그걸 못해서, 또 못 한다고 우울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회의 눈으로 바라본 지금의 저는 실패자겠죠. 목표했던 바는 하나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애나 1년 보다가 돌아온 '감 떨어진 직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워킹맘은 또 대체로 회사에서 기피 대상이라고 하니 그 시선도 감당해야 할 겁니다. 그렇게 본다한들 더는 여기에 휘둘릴 거 같지는 않습니다. 이제는 내가 생각하는 '해야 할 일 리스트'보다 더 중요한 가치들이 뭔지 알았거든요. 사랑. 이게 없다면 그 삶은 좇아도 좇아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새 '해야 할 일 리스트'를 만들어 봤습니다.' 사랑하는 이들 지키기' 그리고 '이들을 위해 내 삶에 최선을 다하기.' 이 두 가지만 잘 해낸다면 제 삶은 꽤 성공한 삶 아닐까요. 성공한 모습으로 천국에 가서 둘째를 만나고 싶네요. 가서 꼭 안고 말해줘야죠. 사랑한다고, 덕분에 엄마는 이렇게 성장했다고. 덕분에 아빠와 첫째는 이만큼 엄마 사랑받고 잘 지냈다고, 고맙다고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