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멈추지 않는 상상력을 남김없이 실시간으로 쏟아내는 앤. 거기에 동화되어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녀의 결핍에 마음이 아프다.분명히 후회할 말과 행동들을 쉬지 않는 모습에 지나치게 감정이입하며 제발 그러지 말라며 내 머리를 감싸고 있다. TMI를 남발하는 앤에게 이제 그만을 외치며 갑갑함에 휩싸이고 만다.
뜻밖에 마릴라 이모에게 위안과 평안함을 얻는다.
빨강머리 앤이 지금의 위상을 갖게 된 일등공신일 거라 확신하는 초록지붕집.
'빨강머리 앤의 초록지붕 집'이기 이전 그 집을 가꾼 장본인은 사실 마릴라 아주머니이다. 핵심은 집 주변의 자연이겠지만 앤과 함께 집 안에 들어선 독자들이 작은 감탄의 한숨을 뱉었던 바로 그 집.
초록지붕집 집안 곳곳에서 마릴라 아주머니의 성품이 그대로 묻어난다.
앤이 그 집에 왔던 순간부터 성장할 때까지 큰 변화 없이 반듯함 속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 공간. 휘황찬란하거나 고급스러지 않지만 하나같이 단순하고 단단해 보이는 목재가구들은 딱 필요한 제 자리에놓여있다.
집안 곳곳 어디 하나 흐트러진 곳이 없다. 쓸모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쌓여 어지럽고 복잡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
모든 것을 직접 요리해 먹지만 부엌 가구와 식탁은 요리하거나 밥 먹을 때를 제외하면 늘 깨끗이 비어있다. 자주 사용되는 그릇과 찻잔, 찻주전자들도 물기 없이 그릇장에 가지런히 들어 있다. 깔끔한 와중에 집안 곳곳에 놓인 잘 기른 화분들과 화병 속 꽃이 초록지붕 집을 초록지붕집답게 만든다.
앤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매 장면마다 마릴라 아주머니는 자신이 맡은 일을 하고 있다. 해가 뜨기 전부터 가축들을 돌보고 직접 기른 것들을 차곡차곡 보관해 놓은 지하 창고에서 가져온 재료로 요리한다. 틈틈이 빵과 파이를 굽는다. 매 끼니 따듯한 차와 함께 음식을 차려 내고 식사를 마치면 바로 설거지를 하고 물기를 닦아 정리해 늘 말끔한 집을 만든다. 창가에 비스듬히 놓인 흔들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는 것이 그녀의 휴식.
살짝 찡그린 미간과 눈썹, 꽉 다문 입으로 그려지는 그녀의 모습.
매튜 아저씨에 비해 무뚝뚝하고 차갑게 그려지지만 사실 초록지붕집을 꾸려가는 실질적인 가장은 그녀다. 말수가 적고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지만 타인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는 그 자리에서 단호하게 말하는 그녀.
잘못 찾아온 앤을 대책 없는 감정적인 동정으로 머물게 하지 않는다. 앤이 보내질 그 집보다 더 나은 삶을 그녀에게 줄 수 있다는 확신과 의지가 서고 나서야 앤을 거두고 당장 제대로 된 교육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진짜 어른의 자질을 본다. 빨강머리 앤이 앤 셜리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녀의 몫이 가장 크리라.
앤: 마릴라라고 부르면 실례가 될 것 같아요.
마릴라: 네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서 부른다면 아마 실례가 되는 일은 없을 거야.
앤: 마릴라 이모라고 부르면 안 될까요?
마릴라: 그건 안돼. 내가 진짜 너랑 친척인 것도 아니고. 나는 진짜가 아닌 호칭으로 불리는 건 내키지 않는단다.
앤: 친척이라고 상상하면 되잖아요
마릴라: 난 그런 거 못한다
앤: 한 번도 사실과 다르게 상상해 보신 적 없어요? 너무 심심하고 재미없잖아요
마릴라: 사물을 현실과 다르게 상상하는 건 그다지 좋은 습관이 아니라고 본다.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 내가 원하는 바와 둘 사이 지켜야 할 선들에 대해 명확히 밝힘으로써 오해를 미연에 방지한다. 어린아이와 이야기하면서도 나의 잣대로 너는 틀렸고 내가 옳다고 주장하지 않는 그녀의 큰 마음과 단호하고 명쾌한 화법에도 감탄이 나온다.
마릴라 아주머니야말로 진정한 미니멀리스트였다.
참으로 간결하고 단단하게 삶을 꾸려 나간다. 단정하게 초록지붕 집을 가꾸고 앤을 포함한 가족들을 탄탄하게 돌본다. 흐트러짐 없이 자신의 할 일을 해내며 합리적인 사고와 이성적인 판단을 전제로 한 따듯한 마음을 베푸는 마릴라 아주머니에게 감탄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