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크기에 양문형은 절대 아니고 요즘 유행하는 키친핏도 아니고, 비스포크고 아닌 단순하고 작은 냉장고.
우리 어릴 때 쓰던 냉장고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다만 좀 심플한 디자인에 냉장고가 위에, 냉동실이 밑에 있는 것만 다를 뿐인 투박한 냉장고다.
집에 있는 냉장고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올리고 싶지만 베란다를 확장해 바닥을 깔아 사용하는 작은 집의 작은 다용도 공간에는 냉장고 전신을 찍을 수 있게 뒤로 걸음을 무를 수 있는 공간이 없다. 냉장고 문을 열고 사람이 서면 끝인 좁은 공간. 그래도 이 공간 덕에 세탁기와 건조기, 냉장고를 부엌이나 방이 아닌 다른 곳에 넣을 수 있었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최선을 다해 옆에서 찍었더니 냉장고 상반신만 나온다.
하릴없이 엘지전자에서 사진을 가지고 와 올린다.
이 냉장고를 고르는 데는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남들이 많이 사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하며 내가 원하는 크기와 조건을 넣고 판매량 1위 제품을 골랐더랬다. 역시나 사람들은 현명했다. 고장 한 번 없이 잘만 사용하고 있다.
전에 사용하던 대형 양문형 냉장고에는 얼음정수기까지 달려있었는데 편리한 만큼 관리가 귀찮았다. 필터도 갈아야 했고 이사할 때마다 별도의 해체와 설치를 위한 기사님 방문과 그에 따른 비용까지 발생했다.
10년이 딱 넘어가자마자 갑자기 냉동실에서 물이 줄줄 흘렀고 기사님은 컴프레서 고장이라며 새 냉장고 구입을 추천하셨다.
큰 냉장고를 사용했을 때도 딱히 냉장고에 뭔가 많이 쟁여놓고 먹지 않아서 냉장고와 냉동실이 텅텅 비어있었다. 냉동실이 너무 비면 냉장 효율이 떨어지니 좀 채워 넣으라는 조언까지 들었었다.
새 냉장고를 고르며 300리터대를 사려다 매일매일 장을 볼 수 없는 워킹맘의 처지를 생각해 400리터를 샀는데 지금 이 작은 냉장고 역시 냉장실은 공간이 남는 편이다.
그러나 냉동실은 확실히 작다.
보통 냉장고에는 냉동실 문에도 수납공간이 있는데(도어 포켓) 이 냉장고는 그게 없다. 냉동실이라고는 큰 서랍 두 개, 얼음 통, 그 옆에 작은 서랍 한 개가 끝이다. 서랍의 깊이도 딱히 깊지 않아서 그다지 많이 들어가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불편함 없이 지냈다.
'미니멀라이프니까 냉장고를 꼭 비워야겠다!!' 했던 건 물론 아니지만 가만히 서 있는, 심지어 문까지 닫혀 있는 냉장고 안에도 뭔가가 가득 쌓이면 마음이 좋지 않았다. 특히 신선식품은 이거 빨리 먹어야 하는데-하는 약간의 부담감까지 들었다는 것.
덕분에 400리터대의 냉장고에도 널럴한 공간을 유지하며 남은 음식을 냄비째로, 심지어 압력솥까지 집어넣을 수 있는 그런 냉장고였단 말이다'
그런데 겨울방학부터 냉동실이 차기 시작했다.
아이가 혼자 있는 시간이 생기면서 간단하게 데워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하나씩 두 개씩 샀더니 작은 냉장고는 순식간에 찬다.
거기에 '먹는 것'과 관련된 모든 것의 물가가 미친 듯이 오른 거다.
원재료값이 올라서 올린다던 가공식품을 시작으로 이상기후 때문에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는 신선식품, 이 두 가지 상승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외식물가까지 너무나 상승했다. 외식 한 번의 단가는 말할 것도 없이 커졌고 집에서 먹어보자며 장을 보면 몇 개 사지도 않았는데 순식간에 금액은 커진다.
이상한 건,
그렇게 한번 오른 물가는 아무리 원재료값이 다시 내려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다. 벽에 붙은 메뉴판에 종이를 덧대어 몇천 원씩 높은 가격을 써 붙였는데 그대로다. 그거 떼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은데도 말이다.옷 같은 다른 물건값이 비싸지면 안 사면되는데 음식값이 비싸다고 안 먹을 수는 없다는 것. 그래서 가격이 내리지 않는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리고
이렇게 다락같이 오르는 물가 속에 아이러니하게도 자꾸만 세일하는 상품이 보이면 '사야만 할 것 같은'기분이 드는 거다.
에어프라이어에만 돌리면 간단하게 집에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튀김,
라면처럼 냄비에 넣고 끓이기만 하면 갓 끓인 찌개가 나오는 기특한 상품
참으로 비싸지만 무슨 행사를 한다며 냉동실에 넣어놓고 아무 때고 구워 먹을 수 있는 고기.
저번에 봤던 가격보다 많이 싼 것이 보이면, 그리고 싼 상품들에 급속도로 '품절'이 뜨는 것을 보면 나도 슬기로운 주부가 되겠다며 빠르게 쟁여야겠다는 마음이 드는 거다.
그랬더니 어이쿠야.
냉장고에는 더 이상 냄비를 넣을 수가 없게 되었고 냉동실은 과연 이것들이 다 들어갈 것인가를 고민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 생각이 사기 전에도 잠깐 스치긴 했으나, 현실이 되다니.
평소처럼 가지런히 줄지어 넣으려 했더니 자리가 없다. 빈 공간 하나 없이 테트리스 하듯 겨울 쑤셔 넣었는데도 냉동실 서랍이 닫히지 않을 뻔했다.
그런데.
냉장고가 너무 꽈악-찼다 하는 와중에도 꽉 찬 냉동실을 보며 '한동안은 이번 끼니에 뭘 먹지-했을 때 바로바로 골라 빠르게 해 먹을 수 있는 게 있어서 다행이다' 하며 곳간을 가득 채워놓은 사람마냥 약간 안심이 되기까지 하니 미니멀라이프라는 말을 쓰기가 또 머쓱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