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집에 산다고 큰 집에 살 때 필요했던 물건들이 갑자기 뿅필요 없어지는 마법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특히나 가전제품이나 주방 도구는 그 기능을 사람의 노동력으로 대체해야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기에 집이 작다고 없앨 수 없다. 그뿐 아니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며 급격하게 떨어지는 체력과 에너지 탓에 이렇게 작은 집에 살면서도 큰집에서 사용하지 않던 물건까지 몹시도 필요해지는 순간과 왕왕 마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집에 살 때는 '일단 사보자.'라는 마인드는 안된다. 사그라들지 않은 물욕의 소유자임에도 하나의 물건을 들일 때 보다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 같은 이 물건이, 앞으로도 쭈욱 필요한 것인지, 나의 노동력을 확연히 줄여줄 것인지, 공간은 또 얼마나 차지할 것인지를 꼼꼼히 따져본다.
안 그래도 몇 칸 없는 부엌 상부장 한 칸을 떡하니 차지할 만큼 큰 부피임에도 그 모든 프로세스를 통과해 작은 집에 새로 입성한 야채탈수기.
큰집에서는 없이도 잘만 살았는데 채소를 대용량으로 사기 시작하면서 야채 손질에 반드시 필요할 것 같았던 이 물건은 그 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제조사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것이 다 있다는 그곳에서 단돈 5천 원에 구매한 이 야채탈수기는 물기 하나 없이 아삭거리는 샐러드를 먹을 수 있게 했고, 물기를 탈탈 털어가며 쌈을 고기쌈을 싸 먹던 그 오랜 시절을 뒤로하고 보송 거리는 쌈채를 들어 바로 고기를 쌀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뿐인가 "물기를 쫙 짜주세요"라는 문구가 들어있는 레시피들을 보면 일단 피하게 되었던 부실한 손목을 소유한 나와 같은 사람에게 보다 다양한 요리를 하게 만든 숨은 공신이다. 시금치나물을 무칠 때, 오이무침을 할 때, 그리스식쌈장을 만들기 위해 소금에 절인 오이채를 짤 때, 당근라페를 위해 당근의 물기를 제거할 때 나의 손목 대신 싹싹하게 일을 해 냈다.
여기까지만 해도 장한데, 야채탈수기의 뜻밖의 기능을, 몹시도 획기적이고 효과적인 용도를 발견한다.
한번 볶아 두면 반찬 없을 때마다, 도시락 쌀 때마다 꺼내 먹을 수 있는 멸치볶음.
멸치 볶음 좀 해본 사람들은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양념 만들어 멸치를 볶아 내는 것은 순식간이다.
세상 귀찮은 것은 멸치 부스러기들을 없애는 일. 부스러기 없는 깔끔한 멸치볶음을 위해 손으로 일일이 멸치를 다듬는 것이 멸치볶음 공정의 80퍼센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딱히 멸치 머리를 제거할 필요가 없다면 더욱 귀찮은 일이다.
이럴 때, 야채탈수기를 이용하자.
프라이팬에 멸치를 넣고 중불에 멸치를 볶아 수분을 날리자. 중요한 것은 미리 다듬을 필요 없이 봉지째로 부어도 된다는 것!
수분을 날린 마른 멸치를 바로 여기, 야채탈수기에 넣는다.
그리고 야채탈수 하듯 돌려준다.
멸치 부스러기는 물론 멸치에 붙어있던 잔가루들까지 모두 떨어지고 아주 깔끔하게 멸치들만 분리된다.
말끔해진 멸치를 프라이팬에 넣고 올리브유 살짝 두르고 양념 넣어 볶으면 잔 가루 하나 없는 깔끔한 멸치 볶음이 완성된다. 이는 사실 시각보다 미각을 위한 것이다. 손질이 덜 된 멸치볶음을 먹었을 때 입안에 남는 텁텁함이 전혀 없는 멸치볶음을 먹을 수 있다.
공간이 부족한 작은 집에는 물건이 적으면 적을수록 쾌적하다.
물건이 사고 싶을 때, 이 물건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따진다. 이 물건이 내 마음에 만족과 기쁨을 주는 것일 때, 그때는 쉽게 내려놓는다. 그러나 그 물건을 들이지 않았을 때 그것이 해낼 수 있는 역할을 나의 체력과 에너지로 채워 넣어야 한다면 이건 단순한 물욕으로 치부할 문제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