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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성미니멀 Jun 04. 2022

별나라 공주는 임신을 했고 브런치는 밉다

글쓰기, 글쓰기.그래서

문학창작 기말 시험 시간, 교수가 제시어를 칠판에 적는다.

"SF, 신분제, 로맨스, 미스터리, 종교"

이 요소를 모두 포함해 작문할 것.

그런데 5분도 되지 않아 한 학생이 시험지를 제출하고 나간다.

"별나라 공주가 임신을 했다. oh , my God, 누구의 아이일까"

이미지출처 pixabay

 초등학교 때 집에 굴러다니는 아무 책이나 읽다가 이 내용을 보고 "아니 어 이런 천재가 있는가!" 하며 감탄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가족들에게 물어도 어떤 책에서 읽었는지, 정확하게 어떤 제시어와 표현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고 '별나라 공주'만 생각나서 최대한 기억을 되살려 적었다. 검색도 해보았는데, 앞부분이 많이 바뀐 긴 이야기만 보인다. 내가 보았던 책에서는 아주 간결한 이야기었던  같은데 말이다. 여하튼, 천재적인 답안에는 큰 차이가 없다.

간결하면서도 필요한 것을 다 담은 문장. 그것을 넘어 행간에 심오함을 품고 있으면서도 위트 있는, 이런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내 일상에 아, 가사, 회사를 제외한 다른 것이 생겼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신이 난다며 두 달 넘게 맹렬히 글을 쓰다가 갑자기 빈정이 상한 이유를 들여다보니, 나는 그냥 글쓰기 자체를 즐겼던 것이 아니었다. 도피성이었다. 중고등학교 때 시험기간에는 뉴스마저 재미있었던 것처럼 해야 할 일을 외면하고 회피하느라 글을 쓰고 있었다. 이제 진짜 승진에 매달릴지 아니면 나도 누구처럼 '승진은 필요 없으니 이 정도만 할게요'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타이밍이었다.


 일은 하지 않으면서 인사고과만 잘 받는 능력자가 되기는 애초에 글렀다 쳐도, 지금까지처럼 일만 일만 또 일만 하고 고과에서는 밀리는 건 이제 그만해야 할 때가 왔다. 결단을 내려야 다. 차피 이제 어딜 가든 계속 이렇게 일은 많이 받게 생겼다며, 차라리 고과 신경을 쓰고 시험공부를 시작하라는 소리를 들은 지가 몇 년째인가. 승진 시험도 문제지만, 시험 보려면 고과를 잘 받아야 하는데 난 정말 인사고과에 자신이 없다며 뭉그적뭉그적 하다 이번에도 쓴 맛을 봤다.

"일처리가 깔끔하고 빠르네요. 알아서 잘하시니  업무는 따로 걱정할 게 없고, 고과 관련해서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아니 그렇게 판단했다면 평가도 잘 주면 되는데, 판단은 그리 했는데, 자기한테 부탁할 게 있냐는 식의 그 말은 대체 뭐지? "특별히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했더니 아주 바닥을 깔아놨다. 부서를 옮겼는데 이번에는 일 하나를 하면 100가지를 하는 것 같이, 온 부서 사람들이 다 알게 만드는 진정한 능력자가 있었다.  바닥에 깔렸다.


 관리자도 아닌 나에게 신규 직원들 업무 검토까지 대놓고 시키고, 출근해서 의자에 앉기 전부터 불러서 "어, OO 님 일은 아닌데, 뭐 좀 물어보려고"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는 상사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 일이 아닌데 도대체 왜 나를 부르는가. 마스크를 썼어도 분명히 얼굴에 다 드러났을 것이다. 게다가 사람 불러서 말하기 좋아하는 그분 앞에서 어떻게든 말을 빨리 끊고자 하는 나의 노력도 다 보였을 것이다. 이런 게 억울한 거다. 대놓고 "제 일이 아닌 걸로는 부르지 마세요. 직접 불러서 이야기하시고 확인도 그 사람에게 하라고 하세요"라고 명쾌하게 말도 못 하고 그렇다고 살갑게 이야기하지도 못하고, 일은 일대로 하고 싫은 티는 다 내고. 이제 내 일이 아닌 것도 내 일이라고 아예 머릿속에 입력을 해 놓았길래 "제 일이 아닙니다"라고 과감하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고과 기간에 그렇게 과감했다. 아 사회생활이 뭐 이리 일관적으로 어렵냐.


 여하튼, 그리하여 나는 도망을 가고 싶었던 것이다. 아무리 용을 써봐도 회사를 그만두는 건 힘들 것 같으니까 다른 방법이 없을까 여기저기 기웃거려보다가 '유튜브나 블로그처럼 신상을 다 드러내지 않아도 그냥 글만 써도 되는 브런치라는 것이 있는데, 거기서 출간 제의를 받아서 작가가 된 사람이 주변에 몇 된다'는 전문 작가 친구 이야기에 귀가 번쩍 한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밤, 당장 브런치 어플을 깔고, 3일간 글 세편을 써서 작가 신청을 하고 4일째 되는 날 작가 승인을 받았다. 오늘은 상사가 나를 몇 번 부르나 '바를 정'자를 쓰고 있었던 날이다. 일곱 번째를 그었을 때 작가 승인 알림 진동이 왔는데, 진짜로 눈물이 고였다. 사방에 적으로 둘러싸였다가 퇴로를 발견한 기쁨이었을 게다. 그리하여 잠을 줄여가며, 홍삼 젤리를 먹어가며, 인공누액을 미친 듯이 넣어가며 브런치에 글을 썼는데, 이게 무언가 애매한 거다.


 오늘도 메인에 올랐다. 조회수가 몇만이 됐다. 통계를 보면서 마음이 벅차고 기쁘다. 나보고 글을 잘 쓴다고 칭찬도 해준다.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설렘과 벅참을 느낀다. 히키코모리인 내가 다른 사람들이랑 댓글도 나눈다. 뭔가 교감도 되는 것 같다. 던 에너지가 생기고 활력이 돈다.  좋다.


 그런데, 가만 들여다보니 나는 "나도 몰랐는데, 나는 글쓰기에 재능이 있대. 전문적으로 글을 써야 . 그래서 회사에 올인할 수가 없어."  말을 하고 싶었던 거다. 그런데 "이게 네가 글을 잘 써서가 아니래"를 증하는 것들을 발견하고 만 것이다. 원래 처음 시작하는 작가들의 글을 다음 메인에 올려 주며 글쓰기 의욕을 고취시키는 것이 브런치의 스킬이란다. 조회높다고 좋아했더니 글 하나에 몇십만을 찍었다는 글도 보인다. 그러고 보니 집안 사진 올라간 살림 팁은 메인에 오르는데 정말 열심히 생각하고 가다듬고 심혈을 기울인 글은 안 올려준다.  왜 요새는 메인에 안 보이냐고 물어보는데 "응 이제 잘 안 올려줘" 그러면서 둘이서 브런치 밉다. 밉다. 이러고 있다. 글 몇 개 올리자마자 출간제의를 받았다는 글도 있던데 출간 제의의 출자도 본 적이 없다. 도 안 자고 열심히 쓰던데 그래서 수익이 얼마나 났냐고 묻는데 "응, 수익 이런 건 10원도 없지, 허허" 이야기하면서 어쩐지 창피하다.


 금이라도 빠져나갈 구멍을 원했던 건데, 처음에 퇴로라고 느껴져서 기뻤던 글쓰기로 얻은 "확실한 것"이 안 그래도 후진 체력을 바닥 내고 결국 일주일 넘게 방바닥을 기어 다닌 것 외에 무엇이 있냐는 질문에 아무 대답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승진 공부 시작하면 글은 전혀 못쓸 텐데, 차라리 시험은 두고 나도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공부해보고 시간을 좀 더 들여볼까' 하는 요만큼의 희망을 건 질문에 '글은 승진하고 다시 쓰고, 머리 더 굳기 전에 승진 시험 준비하라'는 답이 나오자 영 속이 상한 것이다.

 글을 쓰는 것을 직업으로 갖겠다는 원대한 포부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글을 쓰는 것을 나의 업 중 하나로 삼고, 마음가짐은 "나의 주 업은 글쓰기요 나의 부 업이 회사입니다" 이걸 너무나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세 달도 채우지 못한 지금, 객관적 시각에서  글쓰기는 결국 나에게 기쁨을 주는 취미, 딱 여기까지였다. 동시에 집안일을 할 수 있으니 음악을 듣는 것만이 취미였다가 노안을 급속도로 진행시키는 취미 하나가 더 생긴 것, 이것이다. 아. 사실인 줄 알면서 외면하던 것을 담담한 척 글로 쓰려니 속이 쓰라리다. 


 '지금 글 쓰기 시작한 지 세 달도 안된 너한테 나올 소리는 아닌 것 같다'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번 고과 표를 들이밀며, 거리낌 없이 하루에 일곱 번 넘게 나를 부를 업무 꼭지를 나에게 얹어주면서 '이걸 맡으면 고과를 잘 줄'가 나올 것이 뻔한 이 시점에서 "응, 저는 그런 거 필요 없어요." 할 수 있는 카드가 없어서 너무나 서글프니까, 징징대도 좀 넘어가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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