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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성미니멀 Apr 17. 2023

일상에서 신상으로 vs 대답 자판기

 물론 이름은 알고 있었다.  

 같은 부서가 된 지 6개월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단 한 번의 대화도 나눈 적이 없었고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과 그의 이름을 매칭한 것도 한 달 전 즈음이며 마스크를 쓰지 않은 얼굴을 본 것은 지난주가 처음이었으며 사무실 아닌 곳에서 마주쳤을 때 식별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은 사실 없었다.


 안 그래도 바쁘고 화면에서 눈을 뗄 수도 없는데 실없는 농담을 던지는 선배 앞에서 대답은 해야겠고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는 않아 솔직히 뭐라고 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일단 웃어 보이는 의 모습을 저 멀리에서 보며 참 귀찮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었다.

 시작은 일상이다.

 날씨가 어떻고 주말이 어땠으며 앞으로 올 휴일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결국은 신상으로 빠진다. 그 잠깐의 대화 속에서 아이가 몇인지, 그들의 성별과 나이가 나오고 배우자, 심지어 직계 방계의 직업까지 등장한다.

거기까지는 괜찮은데 자신이 드러낸 정보만큼을 상대에게 요구한다. 딱히 관심이 있다거나 몹시도 궁금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한 다지기 작업 같기도 한다. 대답을 해 봤자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할 타이밍을 낚아 채 자신의 이야기를 할 거면서 왜 물을까 싶을 때도 있다.

'OO님은 애가 몇 학년이에요? 시댁에 자주 가세요?' 미혼 직원에게 애인이 있느냐는 등의 질문을 하면 안 된다는 인식은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이게 또 기혼자에게는 다른가보다. 기혼 직원에게, 특히 아이가 있는 직원에게는 이제 그 선까지만 물어보고 더 넘어서지 말지 싶은 질문이 이어진다.

 

 한 공간에 있으며 침묵이 이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던 선배. 지치지 않고 쏟아내는 그의 말에 리액션을 하고 질문에 답하느라 지친 90년대생 직원 두 명은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걸 왜 모를까'하며 피곤함을 토로했다. 히 어색하다며 쓸데없는 말 나불거리지 말자고 굳게 다짐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안 그래도 히키코모리인데 의식적으로 말수를 줄이고 나니 업무가 엮이지 않으면 6개월이 지나도 얼굴조차 가물거리는 직원이 생겼다. 그 직원 역시 내가 그를 아는 그만큼만 나를 알고 있으리라.

 그런 그 나의 자리까지 왔다. 손에는 서류 뭉탱이를 들고 있었고 첫 말은 "뭐 좀 여쭤보려고요"였다. '네'라는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포스트잇으로 표시한 서류 여기저기를 펴 보이며 질문을 시작했다. 이리저리 얽혀 파악하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을 들여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딱히 문제는 없고 그저 본인이 더 괜찮은 쪽으로 선택하면 될 것 같다'라는 내 대답에 사실 이미 위 상사 두 명에게 다 물어봤다며 둘 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며 인상을 찌푸린다. 판단하기가 너무 애매하고 어렵다며 말만 바꿔가며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간다. 결국 서류를 뒤져가며 고민을 하고 몇 가지를 더 찾아본  나의 입에서 '저 같으면 이렇게 이렇게 하겠어요'라는 판단과 함께 아주 구체적인 처리 방법까지 나오고 나서야 환한 미소로 '아! 감사합니다'하고 돌아갔다. 오전에 할 일이 많았는데. 점심시간이 가까워진 시계가 보이고 그가 오기 직전 펼쳐놓은 그대로 이만큼도 진전 없이 놓인 내 서류를 보자 한숨이 나온다.


 마치 열린 사람인 척했지만 여기서 예전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함 여실히 드러나고 만다.

 인간적인 교류가 전혀 없는데, 그렇다고 같이 추진하고 있는 업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아니 무엇보다 로 얼굴을 알고 있다는 확신조차 없는 사이에 본인이 판단하기 힘들다고 상사한테 이미 물어본  관리자도 아닌 내게 들고 와 본인이 원하는 해답을 얻을 때까지 반복해 판단을 대신하게 한  늦게 괘씸하. 내가 모르는 것까지 찾아가며 도움을 주고 싶은 그런 관계의 사람에게만 대답하는 것이 맞지 않은가.

 그 질문에 답하느라 일이 밀렸다 했으면 바로 일을 시작해도 부족할 판에 나는 손가락만 움직이며 머릿속으로는 계속 '아 그냥 모른다고 할 걸' 하는 아무짝에 쓸모없는 후회부터 '다음에도 또 애매한 것이 있을 때마다 들고 오면 어떡하지' 이런 앞선 고민까지 하고 있는 거다.

 연차가 차다 보니 자꾸만 질문거리를 들고 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어느 날에는 대답만 하다 하루가 지난 것 같기도 했고 새로 부서에 투입된 사람 둘을 내 양 옆자리로 배치시켜 놓고 '일 배워야 하니까요' 했던 사람도 있었다. 그때 나는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오른쪽으로 돌렸다 정신이 없었고 대답하고 있는데 옆에서 또 물어보는 통에 잠깐만을 외느라 녹초가 되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일을 미친 듯이 잘해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같은 처지의 입사 동기와 대답자판기가 되어 버린 신세를 한탄한다.  찾아보고 뒤져보고 연구하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리니 바로 와서 탁 누르고 대답을 달라는 그들은 재빠르게 일을 처리하고 퇴근했고 그제야 자신의 일을 시작한 동기는 매번 야근을 해야 했다.


 알면 좀 가르쳐주면 되지 뭘 그렇게 툴툴대나 할 수 있다. 질문하는 사람은 하나 물어본 것 가지고 불만 많다 하겠지만 그 하나씩 8명이, 9명이 물어보는 날이 반복될수록 막상 내 업무는 시간에 쫓겨 제대로 검토하지 못한 채 급하게 하는 날들이 늘 마음에서 우러난다 하더라도 인간적인 대화조차 한마디 나눌 시간이 없었다.


 함께 추진해야 하는 업무면 사적인 관계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협업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오롯이 자기 혼자만의 일을, 상대는 똑같은 업무 시간 안에 훨씬 더 많은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은 싹 지운 채 '간단히 물어보고 해답을 얻으면 된다'는 효율성을 따진 사고를 거쳐 나온 행동. 누르면 대답이 나올만한 판기로 나를 골라 찾아왔을 것을 생각 영 좋지 않다.


 일상에서 신상으로 파고드는 대화만 불편한 것이 아니다.

 직장 동료의 시간, 그것 역시 내 편의만 위해 쉽게 침범하지 말아야 할 선이다.


이미지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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