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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성미니멀 Feb 15. 2023

미니멀 라이프라더니 있을 건 다 있네

가전제품 예찬론

 남들 다 있으니 나도 꼭 필요한 것 같아 구매한 물건들. 딱히 사용하지 않고 비워도 전혀 불편함 없으며 어쩌다 필요하다 싶은 날에도 결국은 집안에 있던 다른 것으로 대체가 된다.


 미니멀 라이프 서적을 읽다 보면 자주 접할 수 있는 간증. 작가마다 다양한 표현으로 기술되어 있지만 결국 생각보다 '반드시 필요한 것'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거다. 고로 비울 수 있는 것들이 아주 많다는 미니멀 라이프의 본질과 일맥상통하는 논리.


 그렇게 미니멀 라이프 고수들은 나와 같은 범인이 보았을 때 '아니 이것도 없이 살 수 있단 말인가!' 하는 감탄이 나오는 물건들까지 비워낸다. 다른 것들은 그래도 잘 비운다 싶은 내게 가장  놀라운 분들은 가전제품을 다 비워내는 분들이다. 청소기, 물걸레 청소기 두 개를 끌어안고 있는 나와는 달리 막대걸레에 부직포 한 장이면 가능하다며 청소기를 비우고, 물은 주전자에 끓이면 된단다. 커피는 직접 갈아 내려마며 커피머신을 비우신다. 심지어 상온 보관이 가능한 식재료만 그때그때 섭취한다고 냉장고까지 비우신 분도 있다.


 가전제품이 요만큼이라도 작동이 시원찮거나 고장의 기미만 보이면 뇌 한 부분을 가전 수리에 내주고서 전전긍긍하면서도 작은 집의 가전제품 개수는 상당하다. 분명 비우는 것이 좋고 빈 공간을 마주할 때 꽉 차 있는 것을 볼 때보다 훨씬 더 큰 만족을 느끼며 특정 분야의 물건은 과감하게 잘도 비워내는 것도 같다. 그러나 미니멀 라이프 경지에 오르지 못하고 늘 그 근처에 머무는 일관적인 이유는 나의 몸을 편하게 해주는  때문이다.


 나의 노동력과 시간, 에너지를 대신해 주는 것들은 공간을 차지한다 해도 비워낼 수 없다. 그래서 가전을 비우지 못한다.

 압력밥솥은 전기밥솥보다 크게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 않았기에 비울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생활을 편리하고 윤택하게 해 주는 수많은 가전들 역시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따로 내가 노동하지 않아도 된다면 없어도 찮다.


 그러나 가전제품을 비우고 그것이 했던 기능을 나의 노동력으로 채워야 한다면, 그건 안 되는 거다. 자리를 차지하더라도 나의 에너지와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준다면 그건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다.


 작은 집의 가전들은 너무 부리나 싶을 정도로 바지런히 일을 한다.

 슬림한 청소기는 드라이를 한 후 바로 출동해 머리카락을 치운다. 부직포를 끼워 넣고 다시 빼고 이럴 시간도 부족한 출근 직전에도 순식간에 일을 처리한다.  빵 부스러기도, 지우개 가루도 늘 골골한 상태의 허리를 쭈그리고 앉아 손바닥으로 모으는 대신 바로 밀어 버린다.

 커피를 직접 갈고 드리퍼에 뜨거운 물을 둘러 기다리는 낭만 대신 커피 머신을 이용한다. 몸은 움직이지만 뇌가 깨지 않은 아침에, 그리고 사무실에서의 오전을 최대한 평안하게 보내기 위한 커피를 출근 직전 내려가기 위해서 버튼 하나면 향긋한 커피를 내려 주는 기계의 힘을 빌린다.


 튀기면 신발까지 맛있다는 말이 있지만 기름을 데우고 뜨거운 기름 앞에 서서 하나하나 튀겨 낼 정성은 부족하니 바스켓 안에 다 몰아 담고 원하는 온도만 세팅해 놓으면 완성품을 내어 놓는 에어프라이어를 사용하고 그 사이 새 밥을 하고 차리기까지 한다.


 애벌작업만 해서 집어넣으면 고온으로 세척하고 살균까지 해 반짝거리는 컵과 그릇을 내놓는 식기 세척기도, 빨래를 널어놓을 장소도, 널고 있을 시간도 부족한 나를 대신해 젖은 빨래를 고슬 거리게 만들어 놓는 건조기도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같은 이유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이 작은 집을 물걸레로 밀기도 힘들다며 물걸레 로봇청소기까지 마련했으니 말 다했다. 퇴근하고 밥 해 먹고 설거지까지 하고 나면 정말 손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다. 이때 작은 로봇청소기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물기를 시작으로 작은 집안을 조용히 돌아다니면서 열심히 걸레질을 한다.


 다들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일을 하는 가전도 있다.

 이상하게 생수는 잘 못 마시겠다. 작두콩, 결명자, 서리태 등 그때그때 있는 것으로 매일 물을 끓여 마신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는 일 역시 물을 끓여 음양수를 만들어 먹는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물을 끓여 차를 마시고 커피를 마신다.


 날이 추워지면서 전기 포트는 말 그대로 쉴 새 없이 일을 한다. 날은 춥고 난방비는 치솟고 가습기는 없는 작은 집에서 자기 전에  내일 마실 물을 끓이고 뚜껑을 열어놓고 자는 것으로 습도 조절을 하고 난방 효과를 높이기도 다. 커피 머신에 아메리카노가 있지만 역시나 가장 맛있는 커피는 따로 끓인 물에 에스프레소 샷을 넣었을 때이므로 따로 물을 끓인다. 커피머신 부품을 교체하러 방문했던 기사님도 가장 오래 쓸 수 있는 방법으로 에스프레소만 이용하는 걸 추천해 주었다. 이제 안에 넣어두고 쓰기도 힘들어 아예 자리까지 마련해 놓고 부리고 있다.


사람을 이렇게 부렸다면 나는 악덕업주로 잡혀갔을 것이 분명하다. 그뿐 아니다. 사람이라면 분명 '이것만 하고'. '좀만 쉬었다가', '좀 이따 할게' 이랬을 거다. 이거 해라 시켜놓고 진짜로 할 때까지 그 인고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내가 움직였을 테고 마음속에는 화를 차곡차곡 쌓고 있었을 테다.


 그러나 가전은 내가 필요할 때, 내가 원하는 그 순간, 버튼을 누르면 그 즉시 움직인다. 하루에  몇 번씩 같은 작업을 시켜도 방금 다 했는데 또 시켜도 묵묵히 제 할 일을 한다. 그만큼의 노동에 상응하는 보답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이러니 가전제품이 얼마나 고맙고 기특한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미니멀 라이프라 그래놓고 참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하나 나를 몸을 편하게 해 주고 나아가 마음의 평온함을 선사하니 도저히 비울 수가 없다고 또 울부짖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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