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완전한 1의 마무리-2

가장 완전한 1인 가구 가장 되기

by 성당

문장이 어딘가 텁텁하면 나는, 과 유독, 을 지워본다. 그러면 오히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문장에서 명확해지며 적당한 거리가 생기는 것 같다. 주로 기대 관중이 많은 글을 쓸 때 나는, 과 유독, 을 의식적으로 지운다. 방금도 나는, 으로 시작하다가 지웠다. 어쨌든 내가 원래 쓰려고 하는 문장에서는 필요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지울 것을 무심결에 쓰지는 않을 테니. 공개된 곳에 뭔가를 써서 올릴 때 항상 똑같이 긴장한다. 간단한 메모나 웃기려는 농담 같은 경우도 진지하게 어떤 주제에 착목한 글도 긴장감의 무게는 똑같다. 내 의도만 달라질 뿐이다. 만약 보는 사람들이 많을 것임을 가정하면, 나는 더 긴장한다. 작은 농담도 쉽게 던지지 못하게 된다. 현실에서 만나는 친구가 '어제 올린 글 잘 봤어.'라고 말하면 후회가 막심하다. 쓰고 잊어버린 실수와 글에서 분명히 드러났을 가벼움이 창피하다. 어느 날에는 내가 올린 글을 두고 현실에서 이야기가 오가기도 했다. 그날 이후로 내 글에 대해 말을 꺼낸 사람들의 얼굴이 자판 위로 자꾸 떠오른다. 자유롭게 쓸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신경을 기울인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그 사람들의 얼굴을 못 본 척한다. 하지만 잔뜩 긴장하고 움츠러든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나는, 과 유독, 을 검열하는 건 자유의 영역 바깥이다. 내가 어떻게 보일지 의식하는 사람의 일이다. 하지만 글을 자유롭지 못하게 쓴다면 글을 쓸 큰 이유를 잃는 것이었다. 내가 글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의사소통할 때, 이미 충분히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유롭고 싶다는 것이 글을 쓰는 유일한 이유는 아니지만, 큰 이유이다. 그리고 자유가 억압되면 또 다른 큰 이유인 재미도 잃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과 유독, 을 위해서 자리를 만들어주게 되었다. 그것이 이 시리즈 <가장 완전한 1인 가구 가장 되기>가 생겼다.

죽을 때까지 내가 먼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물어보지 않을 것들이 있다. 그런 말을 하게 되는 상황이 종종 있다. 그럴 때는 듣는 사람이 아니라 말하는 나에게로 온 신경이 집중된다. 그래서 평소보다 나는, 그리고 유독, 을 많이 말하게 된다. 꼭 필요하지 않지만. 글로 옮기면 삭제해도 문장으론 성립하지만. 삭제해야 적당히 멀어지지만. 하지만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유독 멀어지고 싶지 않다. 한 번도 말해보지는 않았지만, 사실 듣는 사람도 가까이서 들어줬으면 좋겠다. 나도 나한테 더 가까워지게 된다. 가까워지는 건 안정감을 잃는 것이다. 가까운 거리에서만 우린 서로를 욕하고, 때리고, 발로 찰 수 있다. 그리고 가까운 거리에서만 비로소 친밀해진다. 그러니 우리 안전을 무시하고 선을 넘어와 가까워지자. 내가 유독 그런 심정이 드는 이야기들이 있는 것이다. 이 시리즈에서 나는 유독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죽 읽으면서 결코 안전해지는 기분이 들지는 않는 이야기, 허용치보다 시끄럽고 시야보다 많이 보여주는 이야기. 그리고 나도, 말하면서 나 혹은 내 안의 것을 꼼꼼히 생각하게 되는 이야기.

<가장 완전한 1인 가구 가장 되기>라는 제목을 만들기 전부터 나는 1인 가구였다. 1인 가구의 가장이라는 말은 말장난이다. 한 사람밖에 없는 집에는 직책이 없다. 둘 이상부터 생겨나는 서로에 대한 책임이 내 집에는 없다. 내가 무너지고 싶으면 스스로 타협해 좋은 시기에 잘 무너지면 된다. 무리하고 싶으면 똑같이, 어렵지 않게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 하지만 굳이 이런 제목을 붙인 것은 '1인 가구'라는 표현에 함의된 불완전성을 보충하고 싶어서였다. 나는 느슨한 1인 가구, 언제든 사람이 충원되기를 기다리는 1인 가구가 아니라 분명 내가 나의 가족으로서 나를 보살피고 돌보는 정확한 가족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가장의 직책을 만들어 스스로 부여했다.

기억나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나는 늘 혼자 완전한 가족이 되길 꿈꿔왔다. 마치 나만 잘하면 이룰 수 있는 꿈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내가 가진 중 제일 쉬운 꿈이기도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요리를 좋아했고 깔끔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은 아무렇지 않게 흐르고 새로 생긴 문제는 공간이었다. 공간을 구하고 새로 생긴 문제는 나였다. 내가 가장 바라마지않던 꿈, 나만 잘하면 이룰 수 있는 꿈이 나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의 내가 아팠기 때문이었다. 아프지 않은 사람이 크게 앓은 날의 통증을 완벽하게 재현하지 못하듯, 지금의 나도 그 시절의 고통을 잘 모르겠다. 지금의 나로선 성인 문턱을 막 지났던 나의 삶이 상상도 되지 않는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지?

이것은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나 질타가 아니다. 나는 잠을 못 잤고, 자다 깨면 우울했고, 자기 전까지 울었다. 씻지도 못하고 청소도 못하고. 정말 코앞의 휴짓조각을 버리러 가지도 못하는, 거대한 불능의 상태였다. 어떤 시기에는 밥을 씹어 삼킬 수가 없었는데, 또 어떤 시기에는 시도 때도 없이 밥이 먹고 싶었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자다 깨다 하면 어느 날은 환하고 어느 날은 어두웠다. 친구들이 부르면 내가 끌어낼 수 있는 모든 힘을 가지고 나와 후회만 가지고 돌아와 일주일 동안 잠만 자기도 했다. 나는 혼자 살았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형태는 아니었다. 만약 내가 완성된 1인 가구로 살아가고 있었다면 엄마가 한 번씩 집에 찾아올 때마다 엉엉 울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엄마가 직장을 관두고 내 집으로, 아무 연고 없는 서울로 무작정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나는 그냥 혼자 있기만 한 것이다. 나는 스스로 돌봄을 주지 못했고, 나에게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그때의 내가 가엾다. 내내 괴로워해 기억도 희미한,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슬프다.

그 와중에 생계노동을 이어갔다. 왜냐하면 1인 가구의 틀은 충족해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려온 1인 가구 형성과정은 독립을 해야 하는 것이다, 정서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제적'으로. 지나치게 '경제적 독립'에 집착하고 있었다. 내가 스스로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어서가 아니라, 독립하고 싶기 때문에 돈을 벌었다. 돈 버는 일의 모든 것이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절대로 쉬어선 안 돼' 하는 엄중한 책임의 목소리 때문에 성취감이나 뿌듯함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쉴 수 없었고, 무엇보다도 열심히 해야 했으며, 쉽게 스스로를 칭찬할 수도 없는 일. 나는 내 가족에게서 단 한 푼의 도움도 받아서는 안 된다고 굳게 믿었다. 엄마가 내게 밥 한 끼 사주는 것도, 커피 한 잔도, 엄마가 내게 선물해주고 싶어 하는 것도 금지. 물론 금지할 수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는 일이었지만 엄마가 작게라도 금전과 물질의 기호를 주면, 죄책감에 떨며 받았다. 나를 더, 많이, 세차게 타박했다.

다른 형태의 가족, 이를테면 우리 사회의 보편이라고 믿어지는 3인 핵가족 형태로 사는 사람들도 유기적으로 다른 가족과 연결되며 사회 전체의 구조를 만드는 것처럼, 내 이상적인 1인 가구의 형태도 그러한 것임을 이제는 안다. 나는 좋아하는 친구들과 그러고 싶은 것처럼, 내가 타고난 가족과 잘 연결되고 싶다. 우리의 가구는 분리되었지만. 엄마가 내게 과분한, 만일 그렇게 여겨지는 선물을 주었다면 난 감사하고 크게 기뻐하면 된다. 그런 즐거움은 내 1인 가구의 형태를 깨는 것이 아니라 외려 공고하게 만드는 재료가 될 것이다.

1인 가구가 된다는 것. 1인 가구의 '가장'이 된다는 것. 또한 여기서 '가장 완전한' 1인 가구의 가장이 된다는 것은 나를 독립시킨 원가족을 포함한 주변으로부터 완벽히 분리되고 소외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럴수록 내 1인 가구는 가족이 아니라 그냥 '혼자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어떤 형태의 가정에 속하든, 사람은 혼자 힘으로 살면 안 된다.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누굴 시켜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것은 무로 귀결된다. 없다. 없는 일이다.

나는 원래 이 제목을 비뚤어지고 초라한 마음으로, 일부러 실패를 상정하고 지었는데, 두루뭉술하고도 애매한 맥락에서 '가장 완전한 1인 가구 가장 되기'는 실패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어떻게 비뚤어졌는가를 말하고 싶었고, 이 실패를 어떻게 귀결하는지 지켜보고 싶었다. 이 주제를 맺는 동안 어느 때보다도 1인 가구,라는 표현을 많이 떠올렸다. 좁은 평수의 공간, 임시적인 형태의 주거, 언제라도 쉽게 떠날 수 있는 삶의 방식 등 보편적인 표상이 아니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공간을. 내가 살고 있는 삶을. 정확히 내가 방금 먹은 밥을. 그것을 만든 사람을. 그것을 만들기 위해 장을 보고 공간을 청소한 사람을. 그 공간에서 다시 잠들 나를.

1인 가구라는 표현을 소리 내 읽어볼 때, 그 뒤에 '가장'이라는 말을 더해볼 때 머릿속에서는 인간의 표상 같은 이미지가 구체화된다. 2인 가구, 3인 가구를 읽어볼 때와는 다르다. 그 사람은 한가운데 있다. 말하거나 듣지 않아도, 어쨌든 몸을 부풀려 가까운 사람들과 몸을 거의 맞대고 있다. 닿는 일이 불쾌할 수 있지만, 어쨌든 가까이 있다. 머나먼 우주에서 고독히 몸을 웅크리고 있는 우주인과 같은 모습은 아니다. '가장 완전'함에, 어쨌든, 가까워지고, 공간을 빛나게 닦고 닳도록 굴려대며 시간에 살을 대고 좋아하는 향을 입히는 내 1년간의 삶, 근 한 달, 가장 가까이 말하자면 입 안에 든 한 모금을 꿀떡 삼킨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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