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완전한 1의 마무리-1

가장 완전한 1인 가구 가장 되기

by 성당

아침에 눈을 뜨면 이제 몇십 년 남았군, 하고 자동적으로 생각한다. 올해 생긴 습관이다. 나이를 새로 먹게 되었으니 익숙해지는 과정 중의 하나로 생각하고 있다.

나는 내가 스물셋을 넘어서까지 살게 될 줄 몰랐다. 당연히 그 전이나 그즈음 죽을 것이라고 알고 있었고 스물넷부터는 약간 당황했지만 그래도 살게 되었으니 살았다. 그런데 올해부터는 진짜로, 내가 주어진 수명까지 살다가 자연사할 것이라는 의심에 점점 확증이 더해지게 되었다. 이러다 나는 서른이 되고, 쉰이 되고,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되고 죽을 것이다. 방금 문장을 쓰며 잠깐 구체적으로 떠올려 보았지만, 그전까지 한 번도 나는 스물셋을 넘긴 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당연히, 그때는 죽은 뒤이니 세상에 존재하더라도 흙이나 먼지 같은 형태로만 있겠다고 어렴풋이 생각해 왔는데, 신체를 가진 인간으로 쭉 살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해를 거듭할수록 강해지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높은 확률로 그렇게 살다가 생을 마감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내 의심이 점점 근거를 가진 확신이 되는 것은 외부에서 볼 때는 크게 의미가 없는 일이다. 어차피 사실이기 때문에.

요즈음의 나는 이제 일흔몇 해 정도가 남았군, 하며 눈을 뜨고 하루를 사는 동안에는 수명에 대한 건 잠깐 잊어버리고 다시 자기 전에 일흔몇 해에서 하루 정도 빠졌군, 하고 자는 생활을 하고 있다. 올해의 첫 달이 거의 지나갔고 나이에 대한 자각은 그 이후에 이루어졌으니 보름은 넘게 그런 패턴이 이어져온 것이다. 지금의 시절은 기후위기 때문에 앞으로 내게 남은 시간이 그렇게 길진 않을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래도, 더 큰 믿음은 일흔몇 해..로 시작되는 생각에 있다. 스물다섯 해 남았으면 지금처럼 살아도 되긴 하지. 조금만 더 버티자. 하지만 일흔 해가 넘게 남았으면 절대 이대로는 안 되지. 하면서 기후위기는 잠시 제동만 걸다 떠나고, 시름은 이어지는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니 이 생각은 한동안 이어질 것 같다. 그냥 이십 년 전의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던 귀신을 무서워하다가 불면증을 얻게 되던 것과 비슷한 류의 시름인 것 같다.

광화문 교보문고를 나서다가 이제는 잔상처럼 남은 스물셋 전 죽음에 대한 확신을 떠올리게 됐다. 이상하게도 따로 보면 별 생각이 없는데, 사람과 책이 동시에 많은 곳에서는 죽음을 생각하는 일이 쉬워서.

내가 가진 <확신>은 나는 반드시 스물셋 전에 죽을 것이다,라는 선언이 아니었다. 그런 다짐의 결실은 아니었고 계획도 아니었다. 그냥 강력한 공포를 겪으며 구축한 예측의 산실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매일 밤, 자기 전, 그리고 길을 걷다가 문득, 사람들 사이에서, 친구들과 있다가 잠깐 혼자가 되면, 죽음의 공포에 떨었다. 그건 나를 졸졸 쫓아다니는 것 같다가도 어느새 내가 그것을 쫓아다니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누워있을 땐 여지없이 나를 덮쳤다. 오히려 누가 봐도 조심해야 할 것 같은 상황에서는 자유로웠다. 내 일상의 대부분이었던, 새벽 두세 시 즈음의 혼자 하는 산책과 같은 것. 그래서 내 일상은 외면적인 위험을 띄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즈음 대부분의 선택은 안전한 감각을 위해서, 죽음에게서 도망하고 숨기 위해서, 또 공포를 회피하기 위해서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일종의 살아남기 미션을 수행 중이었던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21세기에 한국에 사는 청년이 지속적으로 죽음을 감각하고 있다는 것이. 하루종일 혼자서 뭔가에 쫓기거나 쫓거나 숨는 것을 반복한다는 것이. 그렇게 살아남아 지금에 이르렀다는 것이. 이제야 비로소, 자연적인 죽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상상이라도 한다는 것이. 그리고 그 죽음까지의 과정이 세세하게 분할된 단계별 누적, 혹은 나아감이 아니라 거대한 덩어리가 통째로 덮치는 감각으로 다가온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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