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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NALD Jun 05. 2017

사흘만 볼 수 있다면

헬렌켈러 자서전

일전에 박웅현이 쓴 <인문학으로 광고하다>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서 박웅현이 사물에 대한 창의적인 감각과 표현에 대해서 언급을 하면서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의 일부를 인용했다. 그 때 읽었던 감동을 더 느끼고자 이 책을 선택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책에서 인용된, 혹은 언급된 또다른 책을 읽기 좋아한다. 일전에 와타야리사의 <인스톨>과 <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을 접한 것도 어느 책에서 언급이 되었기 때문이였다. (어느 책인지는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책에는 총 2개의 글이 있다. 하나는 책의 제목과 같은 <사흘만 볼 수 있다면>,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내가 살아온 이야기>이다. 사실 감성적인 에세이인 <사흘만 볼 수 있다면>에 대해 보고 싶어 구입했지만, 헬렌켈러의 자서전인 <내가 살아온 이야기> 또한 헬렌켈러의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삶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은 알지 모를지 모르겠지만, TV에서도 접한적이 있다. 바로 팬텍의 베가 넘버6 광고에서다. 광고에서 '단언컨데 본다는 것은 가장 큰 축복입니다.' 라고 하는 것은 이 책의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글이기도 하다.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은 20여 페이지의 짧은 글이다. 하지만 이 글을 읽음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주변에 대해 소홀한가를 느낄 수 있었다. 보는 것에 감사함은 물론이요 우리 주변의 많은 것들에 대해 감각적이고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기를 희망한다.









첫째 날에는 친절과 겸손과 우정으로 내 삶을 가치 있게 해준 사람들을 보고 싶습니다.

헬렌켈러에 대해 이야기하면 흔히 그녀의 눈과 기가 되어준 설리번 선생님을 떠올리고, 그의 가족과 애완견이 그녀의 삶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살아온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 그녀가 우리가 아는 헬렌켈러가 되기 까지 수많은 조력자들이 함께 했고, 그 친구들의 도움으로 인해 지금의 헬렌켈러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에서 친구 휘티어는 설리번선생님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녀는 당신 영혼의 해방자요.' (245p)

내가 느끼기엔 휘티어 또한 헬렌켈러에게 영혼의 해방자였을 것이고, 휘티어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영혼의 해방자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가장 먼저 친구들을 만나고 싶다고 말한 것이 아닐까 한다. 



앞을 볼 수 있게 된 둘째 날, 나는 새벽같이 일어나 밤이 낮으로 바뀌는 그 전율어린 기적을 바라보겠습니다.

우리에게 매일 다가오는 그 장면을 보기위해, 사흘 중에 하루를 쓰겠다는 헬렌켈러의 마음을 읽으면서, 우리가 얼마나 우리 주변의 것들을 허투루 보내고 있는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헬렌켈러는 둘째 날을 세상의 과거와 현재를 바라보고 싶다고도 했다. 박물관을 관람하며 과거를 보고, 미술관을 보며 과거의 예술을, 연극과 영화를 통해 손바닥과 느낌으로밖에 느끼지 못한 예술을 느기고 싶다고 했다. 박물관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앞을 볼 수 잇는 사람은 몇날 며칠이고 그 곳에서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만, 내가 상상하는 것처럼 사흘동안만 빛을 허락받은 사람은 겨우 슬쩍 훑어보고 갈 수 밖에 없습니다. (30p)

헬렌켈러의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나 나의 마음 깊숙히 파고드는 듯한 느낌이다. 



오늘은 현실시계에서 사람들이 일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구경하며 보낼까 합니다.

고층빌딩, 제방 등에 대해 헬렌켈러는 '이런 것들을 눈여겨 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너무 친숙한 것들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곤 마지막으로 인간 정서에 들어있는 희극적인 요소를 감상하기 위해 코메디를 감상하겠다고 했다. 우리 주변에 너무 흔하고 흐한 것들이 그녀에게는 너무 소중한 것들이였다.

나는 가끔 두 눈이 멀쩡한 친구들에게 그들이 보는 게 무엇인지 알아보는 실험을 해봅니다. 얼마 전, 친한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마침 숲속을 오랫동안 산책하고 돌아온 참이였습니다. 나는 무엇을 보앗느냐고 물었습니다. "별거 없어." 내가 그런 대답에 익숙해지지 않았다면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눈이 멀쩡한 사람들도 실제로는 보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답니다. 어떻게 한 시간 동안이나 숲속을 거닐면서도 눈에 띄는 것을 하나도 보지 못할 수가 있을까요? 나는 앞을 볼 수 없기에 다만 촉감만으로 흥미로운 일들을 수백 가지나 찾아낼 수 있는데 말입니다. 오묘하게 균형을 이룬 나뭇잎의 생김새를 손끝으로 느끼고, 은빛 자작나무의 부드러운 껍질과 소나무의 거칠고 울퉁불퉁한 껍질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집니다. 봄이 오면 자연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첫 신호인 어린 새순을 찾아 나뭇가지를 살며시 쓰다듬어봅니다. 꽃송이의 부드러운 결을 만지며 기뻐하고, 그 놀라운 나선형 구조를 발견합니다. 자연의 경이로움은 이와같이 내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운이 아주 좋으면, 목청껏 노래하는 한 마리 새의 지저귐으로 작은 나무가 행복해하며 떠는 것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시원한 시냇물도 즐겁지만 수북하게 쌓인 솔잎이나 푹신하게 깔린 잔디를 밟는 것도 화려한 페르시아 양탄자보다 더 반갑습니다. 계절의 장관은 끝없이 이어지는 가슴 벅찬 드라마이며, 그 생동감은 내 손가락 끝을 타고 흐릅니다. (21p ~ 23p)





<내가 살아온 이야기>는 그녀가 23세에 쓴 자서전으로, 처음 쓴 글이라 산만함이 있긴 하지만 어릴 때 부터 23세까지 어떻게 지내왔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는 태어나서 병을 앓게 되는 것 부터, 의사소통에 대한 욕구, 설리번선생님을 만난 후 그녀와 함께 언어는 물론이고, 자연 등 다양한 것에 배우는 즐거움을 표현하고, 발성법을 배우고,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여러 학문을 배우면서 느낀 것에 대해 쓴, 말그대로 헬렌켈러의 자서전이다.  



당시 글을 쓰느라 고군분투하던 나를 돌아보면 거기 아무리 어렵더라도 잘 참고 해내면 앞으로 좋은 일이 있으리라 전망하는 꼬마 예언자가 보인다. 그렇지 않았던들 어찌 또 글이란 걸 쓸 수 있었겠는가 싶다.  (148p)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가장 잘 표현한 문장을 고르라고 하면 이 부분을 선택하겠다. 그녀의 삶 자체가 아무리 어려워도 이겨내는 삶이였고,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한 문장이였다. 



내가 나이아가라 폭포가 준 놀라움과 아름다움에 감동 받았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긴다. 그들은 묻곤 한다. "당신은 지금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음악 운운하는데 대체 그 모두가 당신에게 뭇느 의미란 말입니까? 솔직히 일렁이는 파도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으르렁거리는 포효를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대체 당신이 무엇을 알 수 있다는 건지." 보았으면 또 들었으면 다 안 것인가, 다 설명한 것인가. 사랑이 무엇이며 종교란 무엇이고 또 선함이란 어떤 것인지 설명하는 것이 어려운 만큼이나 나이아가라, 이 대자연의 그러함을 설명하기 어려운건 피차 매한가지 아닐까? (150p) 

우리는 때로 자신이 너무 잘나서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헬렌켈러의 말 처럼 보고 들었으면 다 아는 것일까? 우리가 아는 것은 정말 다 아는 것일까? 오롯이 느끼는 것일까? 오히려 헬렌켈러처럼 약간의 결핍이 있으면 그만큼 더 그것에 집중하고 이해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한다. 과연, 나는 어떤 것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고 있을까? 



"아는 것이 힘이다." 아니, 아는 것이야말로 행복이다. 폭넓고 깊이 있는 지식을 소유함으로써 무엇이 참된 목적이며 어떤 것이 보다 가치 있는 것인지 분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진보를 특징짓는 사상과 행동양식의 어떠함을 안다는 것은 수세기를 관통해온 위대한 인간의 심장 고동을 느끼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심장 박동 속에서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열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삶의 조화, 그 가락을 들을 귀가 멀었음에 틀림없다. (195p)

나는 정돈된 지식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항상 가지고 있다. 아는 것이 힘이지만 어설픈 지식이 아닌 정돈되고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가락을 들을 귀가 멀지 않도록 항상 나의 지식을 갈고 닦아야 겠다. 



나는 또 내 이해 수준에 맞춰주겠다고 일부러 애쓰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걸을 때 굳이 당신에게 보조를 맞추겠다고 자기 보폭을 짧게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다. 어느 쪽이든 위선적이다. 그 위선에 화가 치민다. (239p)

우리가 장애인을 대할 때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 아닐까? 그들도 우리와 동등하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는 그녀의 눈과 귀가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시각적표현이 잘 되어있다. 그래서 이따금씩 책을 다시 되돌려보기도 했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왜 이렇게 표현이 우수한지 느낄 수 있었다. 그만큼 핼렌켈러는 자신의 가용한 모든 감각을 동원해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어디서 무엇을 느끼든, 헬렌켈러처럼 나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 그것을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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