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며 세상을 거닐다
보편성이 특별함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하나의 역설이다. 그것은 보편적인 당연한 생각이나 행동이 실제 나타나는 경우가 특별함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구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모든 사람이 실현하지 못하는 결과에서 오는 것이다. 서로를 사랑하고 먼저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이해하려 애를 쓰고 선한 의지를 갖고 살아야 한다는 당연한 것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특별함을 부여하는 이유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들이 당연함에도 실천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현실적인 면도 작용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위해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공유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양심은 때론 정말 가끔씩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자신의 소리에 귀기우리지 못하고 이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사람을 비난한다. 그럼에도 자신을 돌아보기에 앞서 남의 허물이 커 보이는 것도 인간의 삶의 하나가 되고 있다. 남의 허물을 보는 바탕에는 자신에게서 느끼게 되는 허물을 덮은 흔적 위에 있다. 인간은 자신의 변명으로 만들어진 자신의 창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가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사람은 남에 대해 마냥 비판을 하는 것도 옳은 일만은 아니다. 남을 비판하는 것이 결국은 자신을 비판하는 것과 같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의 허물이 보이면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도 지혜로운 삶이 될 수 있다.
보편성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보편적으로’ 라는 개념 이상의 심오한 의미를 갖는다. 인간의 생각이 추구하는 궁극의 목표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쉽게 내뱉는 말들 중에 ‘일반적으로’와 같이 ‘누구나 그러하다’는 일반화된 의미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영어에서 ‘universe’는 우주를 뜻한다. ‘일반적인’을 의미하는 ‘universal’은 ‘universe’의 파생어이다. 영어에서 ‘우주’는 ‘세상(world)’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대학교를 ‘university’로 표현하기도 한다. 우주를 의미하는 ‘cosmos’는 질서와 조화가 있는 완전체의 의미인 ‘질서와 조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the world’는 천지, 우주, 대우주, 삼라만상, 만물, 모든 것 등의 실재의 모든 것을 뜻한다. 이 모든 것이 보편성과 함께하고 있는 의미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보편적 가치는 궁극의 그 무엇을 의미한다. 우리가 흔하게 사용되는 혹은 자기 자신의 주장을 다른 사람에게 납득시키고자 사용하는 ‘일반적으로 말하면’ 또는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등으로 의도를 일반화하여 동의를 구하고자 하는 행동들은 그 말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단지 대부분의 사람이 공감한다는 사실을 넘어 궁극적인 가치에 맞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그 의미를 되새기며 살아간다는 것은 피곤한 삶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쉽게 내뱉는 ‘일반적이다.’ ‘보편적이다.’라는 말을 항상 되새긴다는 사실은 너무도 무거운 주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하는 분명한 사실이 있다. 우리가 쉽게 내뱉고 있는 이러한 말들이 인간의 삶의 방향을 항상 역설적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수의 공감과 동의가 정의를 말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다수의 공감만으로 달성될 수 없다는 사실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다수의 의견과 소수의견의 존중이라는 개념은 무엇이 보다 바르냐는 문제가 우주의 진리에 다가 서 있는 것이다.
‘cosmos’는 질서와 조화가 있는 완전체를 의미한다. 또한 인류, 속세, 세속적 이해 등을 의미하는 ‘the world’는 ‘cosmos’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인간의 삶이 공동체의 하나로 존재하고 이러한 질서와 조화를 갖는 세상이 곧 인류임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이 살아가야 하는 삶의 지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의 세상은 메타버스의 세상이 된다고 한다. 이를 간단히 말하면 마음의 세상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뇌가 인지하는 또 다른 세상을 말하고 있다. 새로운 기술의 출현과 유행하는 용어의 출현에 당황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세상 모든 분야가 급하게 돌아가는 모습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우리를 어지럽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면 원칙적으로 수천 년 전의 인간의 모습과 크게 달라졌다는 기준도 어디에 두느냐에 있다. 보편성이란 개념에서 바라보면 크게 달라질 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메타버스에서 메타는 초월을 의미하고 유니버스는 세상을 의미한다. 단순히 게임 속 세상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실재하는 세상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메타버스는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그 하나는 가상세계다. 실제 세상과는 다른 스크린 또는 스마트폰 안의 컴퓨터 게임 속 세상이 있다. 그 다음에 가상세계가 현실에 조금 더 들어와 있는 증강현실이 있다. 다음은 ‘라이플 로깅’ 으로 불리는 인스타그램, 페북, 유투브 등에서 인간의 언어를 기반으로 한 표현 수단을 활용한 SNS 활동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이 ‘거울세계’이다. ‘거울세계’는 실제 세상과 똑같은 복제품이 온라인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네비게이션이나 구글맵, 네이버 메모, 카카오 맵 등에서 우리 실제 세상 속에 있는 건물들과 도로들이 온라인상에 일종의 미니어쳐 복제품으로 들어가 있는 모습이다. 우리는 이미 메타버스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메타버스는 현실이 되고 있다. 비대면 문화의 확산은 경제가치과 연결되어 확대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BTS가 메타버스를 통해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공연을 하고 미국의 유명 레퍼의 공연에는 1200만 명이 동시에 접속하여 200억 원의 수익을 올리기도 하였다. 요즘 미국에서는 초등학생들에게 ‘로블록스’라는 게임이 엄청 유행하고 있다. 이 게임은 마치 레고 블록을 쌓듯이 구성해 놓고 거기서 친구들도 만나고 즐기고 이 모든 것을 온·오프라인 구분 없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제 초등학생에게는 메타버스가 새로운 혁신적인 개념이 아니라 가장 재밌게 놀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 된 것이다. 미래는 이러한 기술들이 과거에 그랬듯이 혁신이 아니라 이 메타버스 자체가 진짜 세상이 될 것이다.
메타버스는 동시성이 있고 예측 불가성과 일종의 현장성이 모두 존재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디지털, 온라인, 비대면 등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메타버스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연결될 수 있고 어떤 재밌는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그러한 세상이 메타버스 세상이다. 메타버스가 단어와 개념으로 생겨난 것은 최근이지만 사실은 우리 뇌가 이미 메타버스를 쓰고 사용하고 있다. 그 이유는 뇌의 입장에서 진짜 세상이 가상현실과 똑같은 방식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바깥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감각들이 뇌에서는 그냥 똑같은 형태의 전기신호로 전달된다. 19세기 러시아 작곡가 ‘스크리아빈’같은 경우는 음악을 들으며 그 의미에 따라서 다른 색깔을 본다. 이를 공감각이라고 하는데 뇌의 입장에서 이미 세상의 모든 것들이 가상인지 진짜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경우이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뇌 기능이 이를 분명하게 구분하지 못할 만큼 발전할 것임도 분명하다. 뇌 속에 칩을 심어 컴퓨터와 연결되는 기술을 만들기도 하고 ‘뉴럴 인터페이스’의 기술은 뇌의 신경망과 손의 근육을 연결하여 장애인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보편성을 인식하는 문제가 단지 철학적 사고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 실용성의 본질이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한다.’에 있음과 같은 것이다. ‘보편주의와 일반주의’는 삶의 본질을 사유하는 것이고 우주적 질서가 화합을 통해 완성하는 방식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기술이란 것도 경제라는 현실적인 인식에 접근하는 방식도 이와 다르지 않다. 보편성에 접근하려는 인간의 태도는 과학기술의 발전 방향과 경제의 현실적인 운용에 대한 목적을 제시할 수 있는 현실적인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편성이 특별함으로 인식되지 않는 인간의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는 미래에 다가오는 메타버스의 세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불식시키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메타버스의 세상을 통해 다양한 컨텐츠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는 자동화된 공장노동자가 줄어드는 반면 다양한 일자리로 이어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메타버스의 세상은 무궁무진한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는 여유를 갖고자 하면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적 인식을 떠나 우리가 살아가며 보편적 가치가 일반화하여 특별한 모습으로 외면하고자 하는 우리의 자세가 먼저 변해야 한다.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고 하여도 인간의 삶의 본질은 변하는 것이 없으며 보다 바른 삶의 모습을 향한다는 인류의 발전에 대한 믿음이 결과적으로 그러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인류역사가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수많은 사건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신랄한 비판적 입장에 설 수 있음에도 역설적인 것은 이를 통해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과학의 발전만큼 인간의 소통방법도 보다 원활함을 가질 수 있다. 이를 통합의 방법으로 사용되고 인류의 화합을 이룰 수 있다면 기술발전과 그 기술의 활용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