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며 세상을 거닐다
말소리를 들으면 그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이는 가능한 일인 것 같다. 사실 사람은 보이는 것에 익숙해 있고 소리에 귀기우리는 경우는 자신의 의지와 관심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간혹 의도치 않게 들려오는 소리에 반응하고 마음의 움직임을 느끼는 경험은 항상 신선한 충격이다. 이는 소리에 귀기우리기를 종용하는 우주의 속삭임과 같다.
말소리를 들으면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하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소리를 통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물리적인 떨림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울림이 감성적인 인간의 공감이라면 진동은 물리적 현상을 말한다. 물리적으로 소리는 공기, 물, 철 등 매개체를 통해 전달되어지는데 소리의 본질은 물체의 물리적 움직임과 형상에서 시작된다. 인간의 말소리를 들으며 좋게 느끼는 소리는 귀를 통해 듣는 것뿐 아니라 육체의 떨림과 함께하고 있다. 울림에 의한 인간의 감성은 인간의 형상과 신체기관의 물리적 움직임과 연계되어 느끼는 것이다.
모든 소리는 물리적 움직임에서 시작된다. 공기가 숲을 지나며 나무의 형상을 아우르는 순간 소리가 시작되는 것과 같다. 소리와 물질의 움직임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소리가 아름다운 움직임에서 시작된다고 하면 지나친 가치화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음악이 인간의 의도된 몸짓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것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소리가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의도된 몸짓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말소리 역시 인간의 의도가 내재되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소리는 울림이다. 그 울림은 오묘한 것이어서 그 울림이 갖는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데 있어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인간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한 모습을 보인다. 소리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오실로스코프로 나타내기도 한다. 이를 통해 볼 수 있는 수학적 그래프는 일정하게 반복되는 파장의 모양(소리의 종류)과 위아래의 넓이(소리의 크기), 그래프의 간격(음정) 등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의 귀에 들리는 아름다운 소리는 그 크기와 파장의 모양을 가지고 반복하여 나타난다. 예전부터 인간은 의식행위를 하며 그 진지한 분위기를 자아내기 위해 이 소리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현대예술에서 시각적인 효과를 더하기 위하여 공감각적 분위기를 연출하기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된다.
소리의 높낮이는 같은 모양으로 퍼져 가는 진동이 단위시간 동안에 몇 번 되풀이되는가를 나타내는 수이다. 이것이 곧 주파수인데 단위는 헤르츠(㎐)나 사이클(c/s)로 나타낸다. 의료와 같이 특정 목적을 위해 쓰이는 고주파나 저주파도 이에 해당되는 개념이다.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소리가 20~2만㎐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 범위는 줄어든다.
소리가 형상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은 그 크기에 상관없이 상호 작용을 한다는 사실에 있다. 화성이 이루어지는 음악의 어울림은 자연배음에 기초하고 있다. ‘도’의 음정을 소리 내면 ‘솔’과‘파’는 완전 5도 그리고 한 옥타브의 소리인 ‘도’가 가장 크게 함께 울리는데 이때 완전 8도로 음의 비율 곧 진동수는 1:2로 나타난다. 음악의 기본음정은 완전 5도를 계속해서 쌓아올리거나 내리면 우리가 알고 있는 ‘도레미파솔라시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수학적 인식의 시작은 음악에서 시작된다고도 할 수 있다. 하나의 소리를 내면 이와 동시에 가장 어울리는 음정의 소리를 찾아 소리 내고 있는 것이 자연음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리의 울림은 이와 맞는 물체를 찾아 함께 진동한다. 극단적인 경우 이와 같은 음파를 이용하여 물체를 파괴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군사적으로는 음파탐지기로 이용되기도 하지만 이는 소리와 물체의 상호작용을 이용한 경우들이다. 물이 담긴 유리잔이 주위 소리에 미세한 떨림으로 소리를 공유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이는 위에서 말한 자연배음과 함께할 수 있는 소리에 반응하는 현상이다. 초음파나 초저파를 이용한 의료행위의 원리는 신체내의 작은 입자를 깨우고 이를 활성화시켜 자연치유를 높이는 방법이다. 모든 소리는 도달하는 모든 물체에 그 작용을 하는 것이고 인간의 말소리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인간의 소리에 의미를 담아야 하는 것은 물리적인 현상에도 바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진실한 마음을 담아 말해야 하는 것은 다른 상대의 공감을 일으키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파도가 잔잔한 날에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 그러나 그 고요함 속에 바다의 깊은 곳이 온갖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인간이 감각과 경험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 참 작은 세상임을 깨닫게 된다.
소리가 바다 속에서 공기 중으로 전해질 때 물과 공기의 밀도가 다르기 때문에 그 경계면에서 소리가 나아가는 방향이 바뀌게 된다. 이것을 소리의 굴절이라 한다. 계곡에서 산을 향해 큰 소리를 질렀을 때 되돌아오는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 메아리는 소리가 반사되기 때문에 일어난다. 이렇듯 바다 속에서 해수면에 부딪친 소리는 다시 바다 깊은 곳으로 반사되어 대부분 굴절된다. 소리는 공기 속에서 초속 약 340m의 속도로 전해진다. 그러나 바다 속에서 소리의 속도는 5배에 달하는 1500m에 이른다. 바다 속에도 높은 소리와 낮은 소리, 큰 소리와 작은 소리 그리고 악기마다 내는 소리가 다른 것과 같은 소리의 맵시가 존재한다. 이렇듯 바다 속의 소리는 아마도 우리가 듣는 소리보다 5배는 시끄러운 셈이다.
모든 음악은 수학적으로 서술이 가능하다. 도의 2:1의 비율, 예를 들어 10cm 길이의 줄을 퉁겨서 ‘도’가 울리면 그것을 반으로 접어 퉁기면 한 옥타브 위의 ‘도’가 된다. 이것은 피타고라스의 셈법이고 갈릴레오는 10cm 줄을 퉁겼을 때 그 줄이 흔들리는 수, 즉 진동수로 나타내었다. ‘도’와 ‘솔’의 진동 비율은 3:2이다. 음악을 서양에서 뮤직이라 한다. 여기에는 뮤지케의 인카네이션 즉 신(神)의 육화(肉化)개념이 내재되어 있다. 인도 음악은 우주의 이치와 스승의 가르침을 듣는 것과 관련이 깊다. 그러므로 “가까이서 듣는다”는 뜻의 우파니샤드시대를 맞아 힌두문화의 꽃을 피웠다. 인도 사람들의 음악에 대한 이러한 자세는 진동을 매개로 하여 우주와 합일하고자 하는 주술과 제사문화로 발전하였다.
동·서양 문명이 교차하는 아라비아는 유일신 사상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다. 집요한 유일신 사상은 분열 일로에 있던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정치적 묘안으로 기독교의 공인을 불러 오기도 했다. 기독교는 교황이라는 막강한 교권과 함께 그리스선법을 교회선법으로 재정립하여 그레고리오성가 시대를 열었다. 피타고라스라가 정돈해 놓은 진동 비율을 로마교회에서는 하늘을 향한 종탑과도 같이 수직으로 배치하여 화음을 만들었으니 인간의 마음속 심층구조와 음악 현상의 일치는 참으로 오묘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딸림음이라 이르는 본래의 명칭 도미난트는 교회선법의 중심음을 이르던 명칭이었다. ‘도미난트는 유럽의 역사에서 국가라는 사회조직이 생길 무렵 지배적인 힘을 지닌 군주를 이르던 말이다. 이러한 용어가 선법의 구성음에도 적용되었음을 보면 중국 음계의 5음에 군(君) 신(臣) 민(民) 사(事) 물(物)의 사회적 신분을 부여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역사는 오해, 왜곡, 착각의 점들이 이어진 선(線)이라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선은 하나의 줄을 튕겨나는 소리를 연상하게 한다. 무지에 의한 인류 보편의 오해, 승자에 의한 사실의 왜곡, 개인에 의한 자기중심적 착각도 인간의 역사이다. 특히 종교음악은 궁극적으로 신비적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수행하는 스님들이 노래를 하고 한국의 범패에서 소리를 내듯 인도의 힌두사제들에게 소리는 우주와 자아가 하나 되는 매개였다. 그레고리안찬트에서 신부님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을 다시 소환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수동적으로 들리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고대문명이 소리를 기준으로 규칙을 정하고 이를 사회적 기본질서의 근본으로 삼았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주의 공간 속에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소리가 있다. 그 수많은 소리 중에 우리에게 다다르는 소리는 시간을 지나 먼 거리를 지나오는 동안 잔잔한 파동과 함께 자연의 흔들림만을 남기고 우리를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비어있다고 생각하는 우주의 공간이 그 무엇으로 가득 차 있어 소리의 매개가 된다는 생각을 하면 무와 유가 동시하는 존재의 방식을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빛의 소리를 들으라. 빛과 소리는 모두 파동이지만 소리는 물질 매체가 이동해야하므로 빈 공간을 이동할 수 없다고 한다. 빛은 진공을 통과 할 수 있지만 불투명 물질을 통과 할 수는 없다고도 한다. 둘 다 굴절, 회절 및 간섭을 겪는다. 두 매체의 경계면에서 전파되는 동안 빛과 소리 모두 속도가 떨어지거나 방향이 바뀌거나 흡수되기도 한다. 음파의 주파수 변화는 청각적 감각인 음높이의 차이를 생성하고 광파의 주파수 변화는 시각적 감각인 색상 차이를 만든다. 빛과 소리 사이의 차이는 둘 다 파동이지만 빛은 입자 특성도 있다는 것이다. 공기와 빈 공간에서 빛의 속도는 기본 상수이지만 소리의 속도는 매체의 특성에 따라 크기를 달리한다. 매체 밀도가 높을수록 소리의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다. 빛의 경우 그 반대이다. 소리는 종파로 구성되는 반면 빛은 빛에 편광 기능을 부여하는 횡파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물리학의 기본에 불과하다. 인간의 과학적 발견은 계속될 것이고 빛의 소리를 듣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인간이 빛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하나의 깨달음이다. 바람에 스치우며 떨어지는 낙엽이 부딪끼는 소리에 귀기우리는 마음은 자신의 말소리의 품격을 갖고자 하는 필요를 알게 한다. 그리고 나의 소리가 다른 이와 함께하는 것이고 상호작용하는 인간의 필연적인 삶을 알게 한다. 어쩌면 인간의 모든 예술행위는 깨달음의 길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