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위해 잠시 멈추어 서다
세계 속에 한국의 대중음악이 문화중심의 한 축을 만들어 가고 있다. 예전 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다. 국민소득 3만 불 시대를 지나오며 세계에서 유래 없는 경제성장을 해왔음에도 우리 국민은 스스로 선진국 국민이라는 자부심을 갖지 못했다. 생활환경이 변하여가는 만큼 사람들의 상대적 기대가 높아졌고 이것은 박탈감으로 이어진 이유다. 그리고 오히려 사회적 갈등이 커지며 심리적 여유를 잃어버리는 사회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한류의 확대에 따라 우리음악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우리 스스로에게 심어주고 있다. 이것은 문화적 자긍심과 더불어 선진사회에 들어선 사실을 인지하게 만들고 또한 그로 인해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나는 교회음악 속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서양음악을 전공했다. 그러한 이유에서 우리의 민요나 대중가요에 대하여 저급한 음악이라는 선입견 속에 성장한 셈이다. 우리의 가락을 들으면 처량한 노인의 지나간 푸념처럼 들렸고 고리타분한 지나간 그림자의 향수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의 노래는 주변인의 넉두리로 세상에서 외면당해온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가곡의 정서에 스며든 우리의 민요는 우리만의 독특한 가곡형식을 만들었다. 이제 와서 느끼는 사실이지만 한국가곡 역시 우리 민요의 정서가 근본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노래의 가치는 특수성이 아닌 보편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한국어가 갖는 발달된 음운 구조가 기본이 된 것이지만 정확한 모음 발성이 소리를 아름답게 한다. 의미를 모르지만 외국인이 한국어의 뉘앙스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명쾌한 소리전달에 있다. 성악공부를 하다보면 적은 소리도 공명을 통해 호흡을 실으면 관중석의 끝까지 전달되는 현상을 느낄 수 있다. 요즘은 음향기기가 발달하여 이를 대신하고 있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소리 내는 말소리가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예전부터 서양문화가 유입되면서 유럽의 이국적 향수가 우리의 정서를 자극한 사실이 있었다.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는 소리에 딱딱한 느낌의 된소리나 격음이 적다. 특히나 이탈리아어는 모음이 정확하여 우리의 정서와 비슷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한 이유로 예전에 유행했던 노래들 중에는 그들의 노래가 흔하게 불려졌다. 반도적 특성과 지중해의 온화한 날씨에 영향을 받은 것일 수도 있으나 우리의 음악은 이에 더하여 다양한 리듬을 갖고 있다. 사실 우리 음악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완성도 있는 음악을 영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모든 분야가 그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일이지만 특히 우리 음악을 전승하고 서민의 외면에도 스스로가 좋아서 묵묵하게 이를 이어온 예인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경이적인 일이다.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황폐화된 현실 속에서도 예술을 숭상하고 즐거움의 미학을 잊지 않고 살아왔다는 우리의 민족 정서는 가히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였던 선조들의 결과물이다. 삶의 고뇌와 감정의 승화 그리고 삶의 즐거움을 보편적인 정서로 풀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문화의 보편성은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근본정신을 담고 있는 것이고 이것은 문화의 포용성과 통합성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인류의 역사 속에 이러한 문화의 포용과 다양성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에서 엿볼 수 있으며 페리시아의 세계주의적 관점은 고대 고조선의 역사적 유래까지 올라갈 수 있다. 이미 인류의 문화는 청동시대 이전부터 세계를 아우르고 있던 것이었다.
한때 한국의 트로트는 일본 ‘엔카’의 영향을 받았다고만 생각했다. 최근 트롯경연을 통해 전통 민요를 배운 트로트가수들이 다수 등장하면서 트로트 음악이 전통적인 우리의 정서를 기반으로 성립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민요적 요소가 트로트가 갖는 기술적인 요소를 완벽하게 재현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민요적 요소가 가미되며 한층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다른 음악장르와의 콜라보를 통해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현대 악기와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독특한 정서는 우리에게 탄성과 우리 정서의 새로운 발견이 되고 있다. 이질적인 가곡뿐만 아니라 포크, 발라드, 락, 댄스음악 심지어 오케스트라, 뮤지컬과 오페라 등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넓혀지고 있다.
우리의 음악이 세계의 주류에 접근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의 흔들리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 같은 것이었다. 한류가 세계에 스며들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보편적인 정서에 대한 자긍심과 자신감을 얻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이면 이를 알든 모르든 그 정서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는 것이어서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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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음악이 갖는 보편주의 정서는 다양성을 담을 수 있는 그릇과 같은 것이다. 음악의 아버지 바흐는 수많은 작품을 통해 현대음악의 음악이론을 집대성하였다. 반면 헨델은 당시 세계라 일컫던 유럽의 모든 민속음악을 집대성하여 자신의 작품에 녹아내었다. 현대음악이 보다 풍부한 다양성을 품을 수 있었던 이유는 헨델의 업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세계는 확대되었다. 20세기 초 노예의 삶과 인종차별의 슬픔 가운데 생겨난 ‘쩨즈’가 주류에 편입되었고 21세기 한류가 세계의 주류로 자리 잡을 것이다.
우리의 음악은 자연 속에 담긴 우리 인간의 모습을 닮고 있다. 더함도 없이 자연을 거스리지 않으려 한다. 인간의 삶 속에 이루어지는 희노애락이 음악 속에 녹아들며 자연 속에 스며들고 있다. 인간이 말초적으로 느끼는 감정이 승화되는 경험을 하게하고 있으며 승화된 삶의 통합을 향하고 다시 인간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음악은 단순한 감정의 표현방식이 아니다. 우리의 음악은 이러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가야금의 울림이 마음의 파동과 함께하고 있으며 거문고에 튕겨지는 탁음이 인간의 고뇌가 된다. 사물놀이의 난타질 소리가 마음을 격하게 휘몰아치더니 이내 그 속에 빠져든 가락은 다시 마음을 달래고 있다. 어느 날 고요한 달밤에 흘러드는 피리소리가 삶의 애간장을 끓게 하고 어느덧 바람소리로 변하여 밤을 지나 달빛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거기에 정가의 구음이 더하면 마치 세상을 향한 외로운 늑대의 울음소리처럼 세상을 흐느끼게 한다.
음악은 형식이 아니다. 바흐의 정제된 선율을 따라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듯 우리 가락을 따라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면 삶의 결과에 이르게 된다. 삶의 결과는 감정의 승화에 이르는 것이고 이를 통해 통합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 음악이 갖는 보편성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 문화가 세계에 흡수되어 퍼지는 현상이 되었다.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유희의 세계다. 그리고 현대 문화는 비판주의 문화이다. 냉소적 비판은 모든 권력을 거부하는 고결한 정신의 반영이지만 즐겁지는 않다. 인간의 냉소는 진정한 의미 찾기의 실패에서 출발하고 그 기억에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미 찾기의 실패가 모든 목적에 대한 부정이라는 인식을 낳지만 실상 그 안에는 의미 생산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다. 비판이 오성의 산물인데 비해 상상력의 산물인 의미생산의 과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상상력의 산물인 구도주의자들은 생산적인 자이므로 참된 의미를 찾는 자이다. 하지만 고갈되지 않는 진정한 의미는 언제나 허무의식으로 인하여 참된 의미의 생산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러한 생각에서 인간이 행하는 의미의 생산 역시 징벌이고 고된 노동이 되고 만다. 삶의 무목적성을 유지하면서 즐거움을 부여하는 삶의 형식이 유희다. 무목적적인 즐거운 시간의 소비로서 유희는 의미의 생산에 전혀 강박되지 않고 끊임없이 운동성을 모색하는 정신이다. 상상력이 만들어 낸 형상이 오성에 의해 파괴되기를 거듭하면서 상상력은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유희는 운동하는 삶이고 그를 통해 자아는 결과적으로 확장된다. 일반적으로 유희는 모든 의미 생산에 대한 자각적 부정 의식을 전제로 하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제한적이고 일상화된 유희 의식을 가지고 있다. 반면 성자의 유희는 유희의 정신이 무한히 확장된다. 또한 함께하는 사람들과 함께 노는 것이 참으로 즐겁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정신이기도 하다.
우리의 소리에 아무리 철학적 의미를 더한다 하여도 스스로 즐길 수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를 이론으로 접근하거나 학술적으로 접근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정서인 흥과 한이 몸에 배어있는 이상 그냥 듣고 즐길 수 있으면 된다. 음악은 마음을 비우는 작업이다. 감정의 승화는 마음을 비우는 효과를 가져 온다. 음악을 직업으로 선택한 사람이 음악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경우는 흔하다.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을 만드는 작업과 같다. 그 다양성을 채우고 세계가 존재하는 통합의 질서를 깨닫는 것. 이것이 우리 민족공동체가 만들어 온 음악을 대하는 마음자세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