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위해 잠시 멈추어 서다
사람은 누구나 신앙이란 환경적 요인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경우는 없다. 그 대상이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아니면 조상님이든 모든 종류의 삶이 마치 인간의 본능처럼 영향을 받는다. 어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주위에서 나를 아끼는 사람들의 기도와 함께하여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스스로 무신론자라고 자신하는 사람들조차도 신앙이란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인문학적 인식이 일찍이 그리스문명 이전부터 시작된 것은 이러한 인간의 환경적 요인에 대한 반발과 같은 것이었다. 결국 이처럼 인간의 이성이 강조되었던 것도 하나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 유물론적 개념으로 극대화되기까지 하였지만 인간의 종교적 본능을 뛰어넘지는 못한다. 인간은 개념화한 이성이 결국 다시 종교화되는 현상을 갖게 되는 한계를 경험하고 있다.
인간에게 신앙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이 믿음의 대상을 찾는 행위이다.” 그러면 왜 믿음의 대상을 찾는 것일까? 그것은 “모든 종류의 믿음의 실현을 바라는 인간의 바램이 강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믿음은 본능적인 발로이다. 인간의 욕망은 믿음을 갖게 되면 그 당연함에 대한 객관화를 찾게 된다. 자신에게 당연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강열한 바램은 객관화된 존재를 찾는다. 그 존재가 바로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신의 존재는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인간이 만든 허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객관화된 그 무엇은 존재한다. 그 무엇은 신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우주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존재는 인간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태고부터 신의 대리자는 항상 존재하여 왔고 그 영험한 기운도 존재하였다. 그러한 영적인 자들도 인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들이 느끼는 세계가 남다르다는 것은 사실일 수 있다. 신이 이러한 신묘한 표상을 인간에게 잠시 보여주는 것은 세계의 실체를 보여주는 실마리와 같다. 인간이 보고 느끼는 삶이 전부가 아니란 의미이다. 인간이 곧 신이며 우주가 되어 하나의 표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수단이 되고 있음이다. 인간의 신앙은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다.
모든 종교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심지어 원수를 사랑하라는 지엄한 명령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이유를 만들어 이를 외면한다. 심지어 신앙을 삶의 전부로 살아가는 성직자마저도 마찬가지다. 로마의 기독교는 313년 콘스탄티누스황제에 의해 공인되고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이후 동서로마의 분열과 교황의 난립은 기독교를 분열시키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세 기독교는 ‘마녀심판’이라는 희대의 악마적 행태를 보이기도 하였고 종교가 정치권력의 중심에서 전쟁의 빌미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슬람은 칼리프의 정통성으로 대립하며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뉘었고 이는 천년을 넘어 오늘까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인간의 신앙은 그러한 것이다. 자신이 필요한 개념만을 받아들이고 이를 권력화하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정작 가장 중요한 인간 공동체의 통합과 화합을 추구하는 종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외면당하였던 것이다. 아니 구색을 맞추는 수준으로 전락되였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유일신임을 자처하는 스스로의 존재가 말한다. 이에 다른 신의 존재가 언급되고 있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는 인간의 필요와 욕망을 위해 만들어진 우상의 허울을 신격화하지 말라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절대화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경계이다. 인간은 단순한 기복의 대상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상도 인간의 신념도 신격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인간의 왜곡된 신앙은 사회의 분열을 만드는 악마적 본성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길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다. 그리고 현대 기독교와 카톨릭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를 일반화하였다. 인류는 태생과 함께 대자연을 의미하는 하늘을 숭상하였고 이를 표상하는 다양한 것에 대한 신앙의 대상을 창조하였다. 다신교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한 것이다. 그리고 수천 년 전 이를 통합하며 지금의 주요 종교가 창시되었다. 타 종교에 배타적인 이유로 다른 종교의 근원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지만 종교간 갖고 있는 유사성은 실로 놀라울 정도다. 이슬람이 기독교와 카톨릭, 유태교의 구약성경을 함께 공유하고 있으며 불교의 놀라운 이적이 기독교에서도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불교의 승려가 입는 가삼이 그리스인의 의복이 모티브가 되었고 페르시아의 주요 종교였던 조로아스터교의 설화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불경, 힌두경전을 통해 재현되기도 한다.
인도의 힌두교는 지금도 다신교를 숭상한다. 그러나 그 많은 신은 최초의 신 크리슈나의 또 다른 현신들로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불교가 창시되었고 힌두교는 불교를 또 다른 하나의 현신으로 신앙의 대상이 된다. 모든 사람이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은 최초 인도에서 시작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에 불교를 받아들이며 임금의 명칭에 법명을 붙이기도 하였다. 이는 종교의 최고지도자가 왕임을 표현하는 것이었고 정교일치된 당시의 사회상을 표현하고 있다. 왕과 귀족은 불교의 상층부에 존재하였던 것이다. 통일신라에 선종이 도입되면서 지방호족의 세력을 강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는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상적 기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고 이는 마치 유럽에서 일어났던 종교개혁의 모티브가 천년이나 앞선 우리의 역사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모습이다. 당시의 유럽인들은 신의 대리자를 통하지 않고 예수의 죽음으로 성령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스스로 죄를 청하고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의식이 전파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종교개혁은 자유사상으로 발전하며 시민혁명을 이끈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현대 기독교는 예수의 죽음이 모든 재사를 대신하고 성령이 기도하는 모든 이에게 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수의 죽음으로 성령의 은혜를 받는 자를 예수님은 특정한 사람으로 한계를 정한 일이 없다. 부처는 모두가 될 수 있다는 부처의 가르침이 성령이 내게 임한다는 기독교적 사상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신의 모습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하나님의 성령은 불교인에게도 힌두교도에게도 이슬람교도에게도 임할 수 있다. 모든 종교의 신은 하나를 향하고 있고 그러한 의미에서 보면 신은 하나이다. 인간이 인식하는 방법이 다양할 뿐인 것이다. 자신의 종교만을 고집하거나 이를 통해 다툼이 되고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은 신앙인이 이미 아니다. 이들은 단지 궤변론자일 뿐이고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탐욕에 찌든 인간의 허상을 뒤집어 쓰고 있을 뿐이다. 세상의 모든 종교인이 그렇다. 지금 중동에서 벌어지는 탐욕의 전쟁은 그 현실을 말하고 있으며 태극기부대를 이끌며 이 나라의 분열을 획책하는 기독교 지도자가 그렇다.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나는 분명한 크리스챤이다. 내가 가진 종교적 신념은 나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다. 아버지가 40세가 조금 넘은 젊은 나이에 장로님으로 임직되던 날 스님들이 교회에 찾아와 축하해주던 모습을 보았다. 이후 범종교모임을 주관하시기도 하셨다. 사회활동이 왕성하셨던 아버지는 교회관련 일만으로도 바쁜 날들이었지만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고 계셨다. 교회가 사회봉사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셨고 그것이 기독교의 본질적 역할이란 믿음을 가지고 계셨다. 아버지는 우리 교회만이 아니라 제주도 교단 전체의 대외업무를 도맡아 하셨다.
종교 활동에 충실하다는 것도 힘든 일과가 된다. 기독교 신자는 일주일에 한번 교회를 가지만 수요일과 금요일에도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매일아침 새벽기도회가 있으며 매일 가정예배를 드린다. 아버지는 이 모든 것에 충실하려 하셨고 일상이 바빠 어느 하나가 소홀해지기도 하였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반복하는 인내를 보이셨다. 사실 이러한 아버지를 따라해야 하는 자식의 입장에서는 여간 고역이 아니다. 그러나 평소 대화를 통해 마음을 직접 전달하는 것들이 부족할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도는 항상 자식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러한 기도는 주어진 어려움에 대한 감사를 말하였고 삶의 의지를 다지는 수단이 되었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도를 통해 부모의 대한 사랑을 항상 확인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주어진 현실에 대한 감사의 덕목을 배우고 자랐다.
인간의 신앙은 결국 사람을 향하는 것이어야 한다. 자신의 신앙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계기가 되어야 하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향하고 있어야 한다. 종교는 인간의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다. 인간의 복된 삶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종교를 통해 깨닫는 것이 신앙이 되어야 한다.
나는 성경에서 말하는 돌아온 탕자다. 오랜만에 들어서는 예배시간에 가슴을 뚫고 올라오는 알 수 없는 북받침이 싫어서 오랫동안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내게는 고향의 품 같은 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는 교회의 모습이지만 아버지도 안 계시고 함께했던 아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아버지와 아내의 성대한 장례식이 이 예배당에서 이루어졌기 때문도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교회예배를 참석하게 되면 나를 감동으로 휘몰아치게 한다. 아마도 성령이 내게 임하신다면 이러한 모습이란 생각을 한다. 벌써 몇십 년이 지나고 있지만 이러한 모습에 익숙해질 수가 없다. 무당이 신 내림을 받는 순간의 감흥이 이러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한편으로 이러한 감정에 스스로 빠지면 사이비교주가 되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오래전 신으로 추앙받았고 수백만 신지학회 신도를 이끌었던 크리슈나무르티가 자신의 신도들을 향해서 자신은 신이 아니며 거짓종교의 실상에 속지 말라는 외침이 무엇이었는지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