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위해 잠시 멈추어 서다
악마는 인간 안에 내재된 그릇된 본성의 발로이다. 인간의 선의가 모여 신을 형상화하듯 인간의 악마적 본성은 악마를 형상화한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을까? 그렇다. 인간이 상상 이상으로 잔악할 수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다.
로마의 콜로세움은 검투사를 세우고 사나운 맹수를 집어넣고는 서로가 죽을 때까지 싸우게 하였다. 수만 명이 집결한 가운데 피비린내 나는 이 싸움에 열광하였다. 로마는 지중해 연안을 따라 형성된 수많은 식민도시에 이러한 콜로세움을 만들었고 이 잔인한 대규모의 유희적 행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가 세계주의를 지향하고 나름 다양성을 받아들였으나 새롭게 편입된 로마인들은 철저한 계급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야만적 광증은 로마의 강력한 군대인 중장보병을 육성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였고 이민족과 로마인을 철저하게 구분하며 로마인의 자긍심을 세우는 수단이 되었다. 결국 이민족에 대한 포용정책의 이면은 강력한 군대가 목적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 경쟁 상대였던 페르시아제국의 포용정책을 모방한 것이었다.
인류가 일으킨 전쟁은 그 악랄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몽골제국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몽골군이 저지른 악행은 이루 표현할 수조차 없다. 중세 유럽을 휩쓸고 수백 년 후 중국과 아시아를 집어삼킨 흑사병의 시작이 몽골군에 의한 전술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실로 충격적인 일이다. 1347년 몽골의 킵차크 군대가 크림반도에서 제노바 교역소를 포위하고 페스트 환자의 시체들을 도시를 향해 쏘아 보냄으로써 유럽인들에게 전파되었다. 사실 오래전부터 유목민의 약탈전쟁에서 익힌 그 잔인함은 오래된 관행이었다. 승리한 자는 항복하지 않은 점령지를 초토화하였고 젊은 여자를 제외한 모든 살아있는 것을 몰살하였다. 몽골제국이 한 세기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세계최대의 영토를 정복한 사실에는 이러한 인간의 공포와 두려움을 전쟁에 이용한 것이다. 인류의 모든 전쟁사는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비추어 보면 상대적으로 알렉산더가 동방원정에 성공한 경우는 예외에 속한다. 32세에 요절한 알렉산더가 10여년의 원정기간을 통해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인도 북서부까지의 대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은 전형적인 포용정책의 성공이었다. 이후 서남아시아의 왕조는 그리스 문화가 전파되어 중세 암흑기를 거치고난 후에는 유럽의 르네상스를 이끄는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단지 이것도 미화된 측면이 크고 어찌되든 모든 종류의 전쟁은 인간의 악마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영국에 진출했던 바이킹의 경우도 그러했고 훈족을 포함한 투르크의 유럽원정, 노르만족의 남하, 심지어 로마가 이민족을 상대하는 방식도 같았다.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스키피오는 경쟁자인 한니발의 고향이고 대서양의 맹주였던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지구상에서 완전히 지워버렸다.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진출한 유럽국가의 잔혹함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후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무역하는 잔혹한 역사를 만들었으며 사람을 물건으로 취급하는 과정에서 인권이 자본에 의해 무참하게 유린되어지는 인류사의 씻지 못할 악행을 저질렀다. 이것은 고대부터 있어온 노예제도의 실상과는 그 차원을 달리하고 있다. 일반 사람들은 지나간 역사의 한 과정이었다고 단순히 생각하고 넘어갈 수는 있다. 그러나 고도화된 자본주의가 결합하며 미국을 비롯하여 중남미 식민국가와 유럽 전체가 다국적으로 개입된 인류사에서 가장 부끄러운 악랄함의 끝을 보인 참혹한 역사의 낙인이다.
전쟁의 특수성이 그렇다고는 할 수 있겠으나 인간의 악마성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종교개혁과 시민혁명이 유럽에서 한참이던 시절 ‘마녀사냥’이 한 시대를 휩쓸었다.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잔다르크가 마녀사냥으로 화형을 당했다. 14세기부터 불어 닥친 유럽의 ‘마녀사냥’으로 17세기까지 대략 20~50만 명의 사람들을 종교개혁의 지도자와 더불어 자유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처형대에 올렸다. 12세기 이후 기독교의 주도에 의한 마녀재판은 14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반에 걸쳐 행해진다. 그들은 타락하고 부패한 카톨릭을 질타하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예수와 대립된 존재로 마녀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시민혁명을 주도한 정치세력과 결탁하여 치졸한 결과물을 만들었다. 아이러니한 현상은 지식과 과학이 발달이 그만큼 지식과 과학에 믿지 않는 대상이나 현상을 오히려 악마화하였고 이를 없애려는 악마성도 함께 작동한 것이다. 이후 마녀사냥과 같은 미신의 타파는 과학에 의해서가 아니라 근대 사법체계의 확립에 의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렇듯 인간은 자신과 다른 것들에 대한 혐오와 아집이 해서는 안되는 폭력적 행동을 집단화하여 사람을 산채로 불에 태우기까지 했던 것이다.
인간은 살아가며 화를 내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이를 표현하고 남에게 자신을 부각시키는 방법으로 이를 정당화하는 경우도 흔하다. 자신이 화를 내야 하는 순간에 화를 내지 않으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약한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것에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일상에서 스스로 화를 참지 못하는 경우도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사실 대의를 가지고 분노하거나 공동체의 안위를 위해 화를 내야 하는 경우는 있을 수도 있겠으나 일상에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화를 내야 하는 경우는 정당화될 수 없다.
인간이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이유로 정신건강을 내세우기도 한다. 인간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으면 인간이 병적인 상태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이 화를 내는 방식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화를 낸다는 행위가 다른 감정들과 같다는 생각도 틀렸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다른 사람을 향하고 있고 그로 인해 영향을 받아 상호작용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화를 내는 것은 마음속에 내재된 악마의 속삭임에 불과하다.
인간이 느끼는 시기와 질투는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하다. 친숙한 만큼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어린 동생이 태어나면 시기와 질투가 본능적으로 만들어지고 생물학적으로는 생존본능의 발로였다고도 할 수도 있다. 다른 포유류가 완전한 상태로 태어나는 것에 비하면 인간은 기고 걷고 스스로 자신의 것을 챙길 수 있는 수준의 성장을 위해 수년 동안의 보살핌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도 있다. 나약한 새끼가 도태되기까지 하며 경쟁하는 동물의 세계를 생각하면 시기와 질투는 생존의 투쟁과 같은 것이다. 생존의 투쟁이라는 당위성은 우리의 삶 속에 그대로 녹아있다. 이러한 시기와 질투는 경쟁심의 대상이 있었을 때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부러움의 대상이 있을 때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아기적 정서가 그대로 성인이 되어서도 나타나고 있다면 이 또한 자신으로부터 속삭이는 악마의 유혹이다. 경쟁심의 대상이 사라지고 부러움의 대상이 없다면 우리의 마음속에서 시기와 질투도 사라질 것이다.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하고 인간을 끝임 없이 유혹하는 것은 또 있다. 인간의 욕심이다. 인간의 감정을 만족시키는 것에서부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자기과시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삶의 순간순간에 작용한다. 사실 욕심이 없는 인간은 상상할 수 없다. 삶의 동력은 그러한 욕심을 에너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인간의 욕망을 매개로 움직일 수 있듯 개인의 삶도 다르지는 않다. 그러나 마냥 이것을 정당화해서도 안 된다. 독점자본주의의 병폐를 경험하며 우리는 그 위험성을 충분히 경험하였다. 인간의 욕망이 다른 사람과의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의지를 가져야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한 또 하나의 덕목은 항상 감사함을 찾아 감사하는 삶의 모습이다.
인간은 누구나 기회가 닿으면 사람위에 군림하고자 한다. 소위 완장을 채워주면 인간이 변하는 모습은 언제든 볼 수 있다. 그것이 보잘 것 없는 소시민에 해당된 것은 아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사실 그 자리가 사람을 망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러한 촌놈의 근성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싶어 하는 욕망이나 허세에 관한 문제이다. 그러나 남의 허물만 보게 되고 남에 대한 비판만 일삼는 것도 스스로를 돌아보는 거울이 된다. 인간은 자신에게 내재된 모습을 가지고 남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의 생각은 객관적이라는 이유와 착각을 하고 있지만 그러한 비판을 하는 순간 말하고 있는 당사자의 이야기가 되는 경우가 흔하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항상 겸손의 미덕을 유지하려는 마음에 있다.
서구 유럽과 같은 귀족의식이 집단화된 현상이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근현대사에서 우리가 겪었던 격변의 시대가 만든 현상이다. 소수의 특권의식을 가진 자들의 과도한 행위들은 하나의 일탈이 되어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근본적으로 우리사회에서 계급적 의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다른 사람 위에서 군림하고자 하는 계급의식이나 집단화하여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시도도 내 안에 존재하는 악마의 속삭임과 같은 것이다. 공동체 사회에서 계급의식과 특권의식의 부활은 경계되어야 하는 개인의 의지가 되어야 한다.
악마는 우리 가까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내 자신이 악마인 것이다. 스스로 이를 깨닫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산다는 것이 항상 필요하다. 이것이 겸손의 미덕이다. 나의 악마성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끝임 없는 자기와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다. 드물지만 인간이 스스로 악마성 그 자체를 옹호하고 있다면 이는 죄악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는 사회에서 철저하게 격리되어 척결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척결이란 것도 인간의 존엄성과 기회를 다시 주어야 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만 공동체사회는 그에 대한 의지를 분명히 하고 명확하게 표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