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위해 잠시 멈추어 서다
https://www.youtube.com/watch?v=p0Yn3QK3W3A&t=34s
사람이 살아가며 마냥 외면할 수도 없는 사실이 운명에 대한 생각이다. 인간은 존재와 동시하여 운명이 정해진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과연 운명이란 것이 존재할까? 사람들은 모든 것이 자신의 의지에 달렸다고 말하면서도 이러한 의문에 대한 의구심은 거둘 수 없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에게 운명이란 말에 대해 의미가 혼재되어 사용하는 경우가 흔하다. 하나는 운명을 신앙처럼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고 또 하나는 주어지는 현실을 그냥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유보적 개념이다.
운명을 신앙처럼 받아들이는 인간의 행동에도 분명한 전제가 있다. 자신에게 정해진 운명만은 바뀔 수 있다는 바램이다. 그리고 이를 바꿀 수 있는 제3의 존재가 있다는 믿음이 신앙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무속신앙이 이러한 나약한 인간의 마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자신의 운명을 알아보고자 함에 앞서 영험한 무속인인지 아닌지를 구분해야 하는 어려움이 더 힘든 일이기도 하다. 세상을 미혹케 하는 이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나의 입장에서 보면 무당이 영험할 수 있다는 자체에 의구심을 갖는 것도 있지만 보다 분명한 것은 인간의 운명의 문제가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영험하다는 것들이 어떠한 임의의 작용을 하거나 영향을 줄 이유가 없다는 것이고 그러한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다. 그것은 존재여부를 떠나 영적세계와 인간의 삶은 분명한 구분을 가지고 있으며 엄밀히 말하면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들이 상호작용을 전제로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그런 이유로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두 세계의 상호작용의 통로를 독점하려 시도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무당도 그러한 이들 중의 하나이지만 결국 그들도 인간의 한계는 뛰어넘을 수는 없다. 이는 현존하는 모든 종교에도 적용되는 문제이다.
무속인의 논리는 단순하다. 떠도는 영혼 혹은 조상의 혼령이 인간의 삶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고 몸에 붙어있는 다른 잡신을 떨쳐내어 자신이 모시는 신령을 모시면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불교에서도 볼 수 있다. 불교사원에 산신각을 모시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것은 한국기독교가 기복신앙으로 토착화하는 현상도 다르지 않다. 토속신앙의 대상이 단순히 부처와 예수로 치환되는 경우이다. 이 위대한 종교의 교리의 핵심은 스스로 부처가 되고 예수가 되라는 가르침에 있다. 그리고 서로를 사랑하라는 절대명령이 모든 삶의 열쇄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인간의 신앙과 운명은 전혀 다른 별개의 인식이다. 신앙이 인간의 운명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자신을 위해서만 복을 비는 기복의 형태는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없다. 자신의 운명이 존재하느냐의 질문에 분명히 답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우주의 하나로 연결되어 그 많은 메커니즘의 근본적인 원리에 묶여있다는 것에 있다. 그것이 구속이라면 구속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우주적 관점에서 본다면 지극히 자연스런 흐름에 함께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보여 지는 형상이 전부는 아니다. 그러므로 우주라는 그 거대한 흐름 안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유롭고 존엄한 가치로 존재하게 한다. 그 무엇이 인간의 형상을 바꿀 수 있다 하더라도 본질의 다양성에 대한 하나의 발현일 뿐이다. 이것이 운명이라면 운명이다.
한편 풍수지리 역시 인간의 무속신앙과 연계되어 혼용된다. 땅에 대해 음양과 오행, 그리고 주역의 논리로 체계화한 것이 풍수지리이다. 특히 우리나라에 있어 서양의 지리학이 자리를 차지하기 이전까지는 전통적 지리는 풍수지리였다. 19세기까지 실학자들의 지리관과 동학과 같은 개벽사상의 밑바탕이 되었으나 일제에 의해 미신으로 격하되었고 서양의 지리학에 의해 묻혔다. 풍수지리서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중국 동진의 곽박이 지은 〈금양경〉이다. 본시 풍수지리는 비·눈·바람 등의 기후현상, 토양, 수분, 지형, 생태계내의 물질순환 등 모든 자연현상을 기의 작용으로 파악했고 자연과학적인 요소를 상당히 담고 있는 학문적 성격이 강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관념화하고 조상의 묘 자리와의 상관관계에 관심이 집중되어 신앙과 결부되어졌다. 사실 기본적으로 자연과학적 사실, 특히 생태학과 같은 지식체계에 풍수지리의 논리가 매우 잘 부합된다. 풍수지리는 오랜 시간 동안 형성된 자연에 대한 지혜의 축적이기 때문에 현대과학이 부분적 확실성에 치중하는 데 비해 풍수지리는 포괄적이고, 과학이 지향해야 할 목표를 선도하는 사상이 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인간의 기복의 문제를 떠나면 학문적 영역으로 충분한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운명을 말함에 있어 가장 황당한 경우가 관상이다. 관상에서는 얼굴의 골격 및 주요 부위와 주름살·사마귀·점·모발 및 상처의 흔적, 손발의 형상, 신체거동의 특징과 음성 등도 함께 따진다. 그래서 신체의 상은 얼굴·뼈·손·눈썹·코·입·귀·가슴·발의 생김새에 따라 면상(面相)·골상(骨相)·수상(手相)·미상(眉相)·비상(鼻相)·구상(口相)·이상(耳相)·흉상(胸相)·족상(足相)으로 나누고 있다. 동작에 있어서도 언어·호흡·걸음걸이·앉은 모양·누운 모양·먹는 모양 등이 관찰하여 각기 그 특징에 따라 점친다. 또한, 사주를 함께 따지기도 하고 기색(氣色)을 아울러 보며 심상(心相)마저 헤아려 관상은 인간의 운명을 판단하고 대처하는 종합적인 점법이라 말한다.
이러한 점법은 여러 나라에 고유한 형태로 있었지만 오늘날 동양에서 통용되는 관상은 중국에서 체계화되어 왔다. 문헌을 고찰하면 중국의 인상학은 주나라까지 올라간다. 사실상 인간의 생김새를 가지고 인간의 운명을 판단한다는 발상자체가 과장이다. 이 역시 인간의 운명에 대한 변화의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는데 운명의 변화에 따라 관상도 변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리고 그것을 지배하는 것이 심상이라 말한다. 모든 사람은 인상에서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 밝은 기운, 우울한 기운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눈빛과 낯빛에서 느끼는 사람의 마음을 읽기도 한다. 오히려 심상이 모든 운명을 좌우한다는 그들의 설득은 합리적인 해석이다. 인간의 상을 통해 사람의 건강상태를 살필 수 있으며 그들이 정리한 방대한 자료들은 과학적인 근거를 갖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의학자들은 관상학을 공부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의 건강상태를 직관적으로 알아내는데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관상에서 운명의 문제를 제외하면 의학적으로 통합적 사고와 판단에 과학적인 자료가 될 수도 있다.
동양에서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 말하는 앞선 모든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주역이 등장한다. 현대에는 주역을 과학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경전인 동시에 가장 난해한 글로 일컬어진다. 공자가 극히 진중하게 여겨 받들고 주희가 ‘역경’이라 이름하여 숭상한 이래로 ‘주역’은 오경의 으뜸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역에는 세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이간(易簡)이 첫째요, 변역(變易)이 둘째요, 불역(不易)이 셋째다”라 하였다. 이간은 하늘과 땅이 서로 영향을 미쳐 만물을 생성케 하는 이법(理法)은 실로 단순하며 그래서 알기 쉽고 따르기 쉽다는 뜻이다. 변역은 천지간의 현상, 인간 사회의 모든 사행(事行)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뜻이고 불역은 이런 중에도 결코 변하지 않는 줄기가 있으니 예컨대,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며 해와 달이 번갈아 나타나서 밝히고 부모는 자애를 베풀고 자식은 그를 받들어 모시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주역은 사실 성인(聖人) 학자에 의해 고도의 철학적 사색과 심오한 사상적 의미가 부여되어 왔던 철학서였음이 정설이다. 복희씨가 팔괘를 만들고 신농씨가 64괘로 나누었으며, 문왕이 괘에 사(辭)를 붙여 ‘주역’이 이루어진 뒤에 그 아들 주공(周公)이 효사(爻辭)를 지어 완성되었고 이에 공자가 십익을 붙였다고 한다. 이후 사주추명학이 이와 뒤섞이어 출현한다. 인간의 사주는 출생이라는 우연히 태어난 년·월·일·시에 의해 숙명이 정해져 있다는 생각을 전제로 하고 있다. 사실상 주역과 사주는 전혀 다를 수 있는 개념이고 이는 그것을 대하는 자세에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역학은 사주나 토정비결 같은 것들이다. 사주의 기원은 고대로부터 내려왔으며 자연철학에서 비롯되어 명리학으로 집대성되었다. 점술이 태고적부터 내려오는 과정에서 사주가 한 사람의 운명과 길흉화복을 예측한다는 동양철학의 한 학문으로 자리하였고 사주명리학, 사주학, 팔자학, 추명학, 산명학, 역학 등으로 불리운다. 토정비결은 지금처럼 개인 신수를 풀려고 했다기보다 ‘정감록’과 같이 국가 운수를 예언하려던 쓰임새였다. 또 다른 ‘토정비결’이 19세기 초에서 20세기 말 민간에 널리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토정비결’을 손에 들고 십승지를 찾아 나섰다는 표현으로 봐서는 그 ‘토정비결’은 풍수도참서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황상 개인의 한 해 신수를 풀어보는 쓰임새의 ‘토정비결’은 조선의 국운이 완전히 기울어가던 1910년 무렵부터 보급된 것으로 여겨진다. 요즘은 서양에서 유래된 타로가 유행을 하고 있다. 타로의 기원은 이집트 기원설, 유태인 기원설, 인도 기원설 등 여러 주장이 있다. 역사상으로는 15세기 전반 이탈리아 북부지방에서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최초이다. 당시는 화가가 직접 그려 희귀하고 가격도 비싼 귀족 등 부유층의 놀이였으나 16세기 이후 목판화로 제작되면서 유럽 전반으로 널리 보급되었다. 타로 점술은 카드에 있는 그림들의 종류와 위치를 이용하여 인간의 미래와 길흉 따위를 점치는 것이다.
인간의 운명을 말할 때 반드시 전제가 되는 사실이 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것이지만 부와 권력의 유무가 성공의 기준이 된다는 점이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도 이를 전제로 한다. 인간의 삶에 대한 성공이 부와 권력이 전부가 아니라면 이러한 모든 운명에 대한 논의는 의미가 없어진다. 인간이 삶이 보다 바람직한 것을 추구하고 이로 인해 가치가 부여된다는 믿음이 있다면 이러한 모든 운명에 대한 논의는 의미 없는 신기루인 것이다. 인간의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겸손함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한 겸손은 감사함에서 시작된다. 인간이 운명을 받아들이는 행위는 인간이 스스로 존재하고 나를 닮은 우주의 커다란 흐름에 동화되어 있다는 사실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