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위해 잠시 멈추어 서다
남들이 갑자기 내게 왜 화를 내냐고 되묻는 경우가 있다. 대화를 하다 내 자신의 말에 취해 언성이 조금 높아지는 경우다. 그리고 나는 화를 낸 적이 없다 변명한다. 순간 나를 당황하게 하는 경우다. 의식하지 못한채 조금 높아진 억양에도 남들에게 불편함을 주게 되고 이러한 반문을 받는 경우를 보면서 사람들이 얼마나 화를 견디지 못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한다. 그것은 상대로부터의 조금 높아진 언성에도 자신의 감정과 선입견이 이입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사람들은 언쟁을 벌이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면 누구나 자신의 감정에 이입되어 격한 감정싸움이 되어버리는 경험을 누구나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스스로 화를 내야하는 일이 세상에는 거의 없다고 결론을 내리려 하였다. 그리고 주체하지 못하는 분노와 같은 것에 스스로를 용납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때론 그러한 나의 모습이 오히려 상대의 화를 북돋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대화에서 순간 느끼게 되는 나의 불쾌감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 조심스러워지기도 한다. 나의 경우는 그러한 순간 언성이 높아지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사실 내가 언성을 높인다고 상대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인간의 품격은 화에 대한 태도가 전부를 결정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이 화를 낸다는 것이 생각보다 꽤나 복잡한 문제가 되기 때문이이도 하다. 화를 참으면 병이 된다고도 한다. 분명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화를 내는 정당한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이 화를 내야하는 정당성을 부여하고 이를 스스로 방치하려 한다.
때론 자신을 내세우고자 자신의 의지가 화를 낸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참 오만한 경우다. 그리고 비겁한 행동이다. 화를 내는 사람 중에서도 가장 비열한 모습이 되는 이유는 자기합리화가 최고조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누구나 자신의 감정을 정당화하며 살게 되지만 모든 것은 정도의 문제다. 그리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겸손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거기에 그 감정을 이기지 못해 화를 내며 당연하다 생각하는 경우는 누구에게나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를 정당화한다면 자신의 영혼을 스스로 허무는 결과를 만든다.
대부분의 사람은 화를 내고 후회를 하며 상대에게 사과를 한다. 이렇듯 상대에게 이유 없이 화를 내게 되었다고 미안함을 갖게 되는 것도 인간의 마음이다. 인간은 누구나 화를 내는 상황에 처하게 되고 이를 상대한 사람에게 미안함을 동시에 갖게 되는 이러한 이중적 감정의 세계는 참 오묘하다. 무엇이 인간을 화나게 하고 있으며 또한 이에 대한 미안함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마치 악마와 천사의 싸움을 인간이 대신하고 있는 하나의 예가 되는 것과도 같다. 화를 스스로 통제한다는 것은 인격의 발로이고 미안함을 갖는다는 것은 깨우침의 통로이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상황에서 똑같이 화를 내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감정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이기심의 극단을 보여주는 것이고 자신이 화를 내고 있는 것을 정당화하고자하는 행위는 죄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누구나가 일반적으로 화를 내는 상황에 대하여 무의식적으로 통제될 수 없는 행동인 것처럼 변명하며 어쩔 수 없었다는 잠재된 의식이 항상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들 중 하나가 열정이 화로 나타난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소위 다혈질의 성격을 정당화하는 일이다. 성격이 다혈질임에도 주변으로부터 인정되는 경우는 있다. 이런 사람들의 특성은 화를 내고 바로 사과하는 것이 진실해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사람을 신뢰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러한 성격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많게 되고 접하게 되는 다른 이들을 불편하게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행동이 반복되면 사람들이 결국 그를 피하는 이유가 되고 스스로도 고립되는 현상을 보인다.
사람들은 불의에 참지 말라고 말하고는 분노해야 한다고 소리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이성의 목소리이어야 한다. 누구나 정의라고 생각되어지는 것에 하나가 되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것들도 감정으로 표출되면 그 정당성을 인정받기는 어렵게 된다. 감정이 집단화하는 경향들은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들이 사실상 집단지성의 발로라고 생각될 수도 있으며 이렇듯 집단화 하는 현상은 감정이 공유되는 경향이 강하다. 우리가 이룬 민주화가 그러한 집단지성의 결과인 것이 분명함에도 인간의 집단적 감성이 반드시 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만도 아니었다. 오히려 인류의 역사는 정치적으로 이를 이용되고 권력의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사실 이성과 감성이 분리되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러한 의식의 함정에 빠지는 것은 이성과 감성이 마치 선과 악처럼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통합적 사고를 해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이성과 감성을 하나로 연결하는 자신의 의지가 실천되어야 한다. 바른 생각이 바른 감성을 만드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따뜻함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감성이 올바른 이성을 만든다.
무엇보다도 인간이 가장 화를 참지 못하는 경우는 자신에게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경우다. 거지근성이나 노예근성이 있는 사람은 그러한 모멸감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이지만 그 사람들도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의 무시를 받게 되면 화를 낸다. 대화중에 화를 내는 행위는 결국 상대적이란 것이다. 그리고 이는 자신이 먼저 상대를 무시하고 있거나 대화상대로 인식하지 않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상대를 먼저 존중하는 상황에서 상대에게 모멸감을 느낄 이유는 없다. 심지어 자신을 비난하거나 가르치려 하는 상대에게서도 그로 인한 모멸감을 느낄 이유가 없어지게 된다. 모멸감이란 것이 자신의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것이고 보면 화를 내는 모든 이유는 자신에게 속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화를 낸다는 것의 대부분은 대화 과정에서 발생한다. 자신의 말에 공감하지 않으면 화가 나고 그러한 대화가 논쟁으로 이어지면 화가 난다.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기도 하고 단순히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화를 내기도 한다. 사람 사이에 이루어진 일상의 대화가 듣고 말하기를 반복하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대화가 듣기보다 말하려는 의도가 앞서고 있다. 상대의 의중을 읽고 대화를 이어갈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사실 우리는 이러한 대화에 생각보다 미숙하다. 나는 이러한 것들을 인지하고 듣기를 즐겨 대화를 시도하려 한다. 그럼에도 즐거운 대화가 어려움을 겪고 이러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는 경우들이 필연처럼 다가오는 현실은 안타까움을 만드는 것이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에 나는 화를 내야한다고 의식적으로 접근하는 경우도 많았다. 많은 아이들이 할머니의 손에서 자라면 버릇이 없다고 한다. 나 역시 사랑으로 품어주셨던 할머니와의 기억을 생각하면 할머니에게 함부로 하고 화를 내기도 하였고 때를 썼던 기억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아마도 그러한 성격이 통제를 받지 못했다면 나 역시 다혈질의 못된 성격을 소유했을 수도 있었다. 동생들에게는 무서운 형이고 오빠였다. 어린 시절 동생들에게 자주 폭력을 쓰기도 하였고 언젠가는 화가 난다고 옆에 있는 선풍기를 들어 던져 박살을 낸 적도 있었다. 온화한 부모님 속에 성장하였지만 그러한 나의 모습을 아버지는 두고 보지 않았다. 흔하지 않은 아버지의 무서운 모습을 접했던 기억이다.
나의 기억 속에 분을 참지 못해 화를 내었던 기억은 없다.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들이었다. 또래 친구들과의 다툼에서도 그랬고 학교 반장을 하며 통솔을 해야만 하는 경우도 그랬다. 당시의 콩나물 교실에는 6·70명이 한 교실에서 수업을 들어야 했다. 당시에는 아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선생님들은 자신을 대신할 통제수단이 필요했었던 것도 사실이다. 나의 강압적인 통제에 반 친구들은 잘 따라준 셈이다.
유복한 집안의 훌륭한 부모 밑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감사한 일이다. 나에게 주어진 성장기의 많은 축복도 우연이었다. 그러한 나의 조건에 온전히 감사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 지금이다. 생각해보면 이기심이 강하고 화를 내는 행위가 자신의 과시가 되었고 사람을 상대하는 방식으로 작용하였다고 생각하면 지금에 와서는 참으로 부끄러워지는 일들이기도 하다. 나의 이러한 습성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만들었다.
아내의 죽음은 나의 화와 무관하지 않다. 나는 지금도 왜 아내가 4층 높이의 옥상에서 스스로 몸을 던졌는지를 알 수 없다. 친구의 결혼식에서 아내의 반주에 맞춰 축가를 하였고 피로연에 혼자 참석한 후 늦게 처가에 들려 갓 태어난 아들과 아내를 데리고 집에 돌아오는 과정에서 말다툼이 있었다. 술에 취해있던 나는 먼저 잠이 들었으나 아들의 울음소리에 잠을 깼다. 항상 준비되어 있던 분유도 없었고 아내도 없었다. 화가 난 상태로 2층 서재에 누워 있는 아내를 깨웠지만 불만을 표하는 아내를 보는 순간 참고 있던 화가 폭발하여 손찌검을 했다. 그 순간에도 나는 화를 내야 한다는 의도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아이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에 어머니가 올라와서 아이를 데려갔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를 따라갔다. 침실에 올라와 보니 아내는 없었다. 가까운 친정으로 갔거니 생각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그러나 잠을 깨우는 알 수 없는 불길한 기운에 이끌리어 옥상에서 떨어져 멀리 어두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아내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아내는 응급수술을 하게 되었다. 사지가 부러지고 두개골이 파손된 상황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기적의 순간이었다. 순간의 회생은 간절함을 만들었다.
100일 넘는 시간 동안 여름은 겨울로 바뀌었다. 그 100일의 시간은 나에게 잊혀질 수 없는 시간이다. 극한 상황 속에 온전한 아내의 미소와 함께했던 추억의 시간이기도 하였고 죽음의 고비를 넘나드는 고통의 순간들이기도 하였다. 만신창이가 된 아내를 간호하며 서로가 미안하다는 용서를 몇 번이고 되뇌었으니 진심으로 서로에게 이해를 구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순간순간의 후회는 나에게 그리움으로 남았고 돌이킬 수 없는 상심이 되었다. 그렇게 다짐하게된 것이 누구에게든 화를 내지 않는다는 맹세였다.
결국 화는 참는 것이 아니다. 순간의 멈춤과 한 번의 긴 호흡을 하고 흘려보내야 한다. 인간이 화를 느껴야 하는 것은 살아있는 육체의 필연이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지는 시험이라 하고 그 감정의 찌꺼기를 잡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세상을 살며 화를 내야 할 당연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나에게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는 맹세는 세상을 떠난 젊은 아내에 대한 평생의 속죄와 그리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