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하다는 것

생각을 위해 잠시 멈추어 서다

by 와와우

절망이 지나간 공허 속에 새롭게

피어난 것들


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

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去 然)


정직하다는 것



당신이 정직하냐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다. 대부분은 ‘아마도?’ 또는 ‘비교적?’ 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니면 새삼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의미 없음을 표현하기도 할 것이다. 사실 정직함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것은 매우 단순하고 쉬운 일이다. 누구나 자신의 어린 시절에 나름 거짓에 대하여 심각한 고민을 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장과 생활 속에서 이러한 문제가 ‘얼마나 정직할 수 있느냐!’라는 문제로 받아들인다. 솔직하다는 것이 마냥 옳은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직함과 솔직함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혼용하여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러한 혼용이 스스로의 행동에 자기변병을 하게 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솔직함과 더불어 진실이란 말은 자신을 위장하기에 적절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진실이 거짓이 없이 바르고 참됨이란 사전적 의미를 감안한다면 사람이나 사람의 성품, 마음 따위가 바르고 곧은 상태를 표현하는 정직함의 표현이 곧 진실 됨이라 할 수 있다. 정직함은 궁극의 가치로서 진실함으로 실천이 되기도 하고 도덕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문뜩 ‘나는 어떨까?’하고 스스로를 생각해 본다. 정직하지 못했던 수많은 일들이 쉽게 들추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부끄러움에 젖는다. 그 부끄러움 때문에 사람들은 스스로를 외면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내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또는 ‘그 정도는 남들도 다 하는 것이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한편으로 지나친 결벽도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조차도 변명의 이유가 된다.


어린 아이는 거짓말을 하며 성장한다. 아이의 거짓말은 동기가 두 가지 정도에서 시작된다. 하나는 본인이 잘못한 행동을 사실대로 말했을 때 보호자에게 혼이 날까봐 거짓말을 한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사실대로 말했을 때 보호자의 마음을 살펴 사실과는 다른 대답을 하는 것이다. 아이는 자신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서도 거짓말을 하고 다른 사람이 원하는 대답을 하기 위해서 일종의 선의의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이렇듯 아이니한 것은 아이가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많은 부모는 자녀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굉장한 충격에 휩싸인다. 성인의 관점에서 아이들의 거짓말을 도덕적 기준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도덕적 감수성에 예민하다. 특히 다른 사람에 대하여 도덕적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려 한다. 이러한 사실은 앞에서 말했듯 모든 부모가 아이의 거짓말에 충격을 받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해서는 관대해지는 경향이 있다. 사실 도덕적 기준에 있어 정직하다는 것은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전부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에 대해 ‘정직하냐? 아니냐?’는 문제에 함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들의 거짓말에 선의의 거짓말이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정직함과 거짓됨을 규정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거짓됨은 습관으로 자신의 몸에 배어있다. 자신의 의도가 상대에게 약점이 된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상대를 속이기도 한다. 또는 상대의 의도를 알아보고자 상대를 시험하기도 한다. 사람은 자신이 과오를 범하면 이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가 잘못을 저지르고 부모에게 끝없이 변명하려 했던 과거의 습성을 이어가고 있음이다. 이러한 것들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직결된다면 인간은 필사적일 정도로 스스로를 방어한다. 때론 이러한 거짓됨이 살아남기 위한 밀림 속 생존투쟁으로 인식하며 생존의 본능에 부합된 필연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작은 것에도 많은 거짓된 행동을 하며 살아간다. 자신의 사소한 감정을 정당화 하는 것들이다. 그것들 중에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속이는 것들도 있다. 어린 나는 자신의 잘못에 죄의식을 갖고 있었지만 나의 성장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들도 함께 성장했다. 그것은 남에게 나의 잘못을 돌리려는 행동들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나를 유혹하는 요소가 된다. 그럼에도 나는 스스로 정직한 사람이라 생각하며 산다. 그리고 스스로 자유로운 의식을 갖고 있어 남을 배려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감정에 대하여 솔직한 편이다. 그럼에도 정직함과 솔직함은 거짓됨의 경계에서 혼란을 갖게 한다.


인간의 비겁함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주위의 환경에 의해 제약을 받는 경우이다. 심지어 사람들은 스스로의 의지를 굴복시키며 힘 있는 사람에게 아부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용기 있는 삶’이란 정직함을 표현하는 또 다른 의미이다. 그러나 이 또한 어떠한 경계선에 마주하게 되고 이러한 경계를 넘어 분명해진 상황에서조차 ‘용기 있는 결단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은 항상 내재되어 있다. 나는 항상 ‘최선을 다했다!’라는 변명을 스스로에게 하며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었다.


겉모습과 결과만을 보고 판단하는 것도 거짓이다. 나의 인생의 많은 굴곡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과 생각들에 상처를 입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 역시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면 이러한 나의 거짓된 행동들이 인간의 삶에 주어지는 도전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인간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사유가 철학을 낳은 것이다.


인간의 모든 철학적 사유는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이다. 인간이 정직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마땅한 진리의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인간은 결국 정직할 수 없다. 단지 그 곳에 다다르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만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인간의 삶의 가치가 이러한 인간의 의지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모든 일에 정직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는가?’하는 스스로의 자문에 모든 것이 귀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정직함은 자신만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교감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상대의 의도에 관심을 기우려야 한다. 이러한 경우 상대의 행동이 선의를 가지고 있는지에 정직함의 판단기준이 될 것이다. 선의는 인간의 품격을 만든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규정할 이유도 없을 만큼 선의가 무엇인지는 인간이 본능으로 알 고 있다. 남의 입장을 먼저 이해하려는 자세이고 보다 바른 것을 향한 인간의 마음이다. 선의의 거짓말과 남을 위해 스스로의 생각을 철회할 수 있는 것도 정직함이다.


남에게 엄격하고 자신에게 관대한 것은 죄악이다. 인간이 갖는 한계성에 대하여 자신의 이익을 위한 자기합리화에 이용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책임지지 못할 많은 말들을 내뱉고 스스로 자기합리화의 함정에 빠져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마냥 관대한 사람들도 많이 볼 수 있다. 나는 그러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타산지석’을 삼으려 하지만 나 역시 그러한 함정에 빠져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를 놀라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함을 느낀다. 인간의 도덕적 감성은 바른 것을 향한 인간의 노력이 되는 것이고 스스로의 영혼을 맑고 밝은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 된다. 영혼의 존재여부나 삶의 영원을 말하는 윤회가 존재하는지를 떠나 인간에게 주어진 삶에 대한 최선은 그 자체로서 선의의 가치를 갖고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가치가 내가 미치게 되는 사람을 비롯한 모든 세상 만물에 대하여 바람직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마음이 동시에 필요하다. 이것이 정직함의 실체가 되는 것이다. 이는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관대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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