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애와 이기심

생각을 위해 잠시 멈추어 서다

by 와와우

절망이 지나간 공허 속에 새롭게

피어난 것들


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

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去 然)


자기애와 이기심


사람들은 흔히 자기애와 이기심을 혼돈 하며 살아간다. 사실상 ‘자신에 대한 사랑’은 이기심을 배제하는 철학적 접근으로 그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흔하게 이러한 혼동이 일어나는 이유는 이기심이 자기애를 변명의 수단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한 인류의 고민은 인류가 문명이 형성되는 순간부터 시작되어왔고 인류가 추구해야 하는 보편적인 진리로 자리 잡고 있다. 자기애는 ‘사랑’의 함의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수천 년 전 고대 그리스의 철학은 ‘에로스’를 절대가치에 두고 이에 다가서는 인간의 고뇌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이는 후세에 중세의 종교철학의 기준이 되었고 ‘에로스’를 신으로 대체하며 종교의 도덕적 삶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모든 종교는 ‘사랑의 모습’을 달리하여 말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실천이 종교가 존재하는 중요한 명분이 되기도 하였다. 우리의 전통적 실용주의가 갖는 최고의 덕목인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사상 역시 궁극적으로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인’또는 ‘자비’라는 사상이 사랑과 통한다. 인은 혈연에 뿌리를 둔 사랑에서 생겨나 인연이 없는 사람에게까지 확대된다. 불교의 '자'는 진정한 우정이며 '비'는 연민과 상냥함을 뜻하고 여기서 서로가 상대에 대한 연민과 위로라는 마음에서 사랑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는 참된 사랑이 자기희생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주었다. 그리스어로 사랑은 에로스,아가페, 필리아라는 단어로 표현되었다. 에로스는 정애에 뿌리를 둔 정열적인 사랑이며 아가페는 무조적적 사랑으로 대표되는 것으로 사람과 사람 간의 독립적 존재를 바탕에 둔 사랑이다. 필리아의 사랑도 독립된 이성간에 성립되는 우애를 의미하는 데 상대방이 잘 되기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의 상태를 쌍방이 인지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결국 이 모든 사랑의 개념은 ‘사랑의 주체’인 자기애가 발현된 거울이고 확장된 자의식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다른 이를 사랑하기 위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고 다른 이를 통해 자기애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기심은 개인에게 있어 정도의 문제가 된다. 이기적인 사람과 이타적인 사람의 구분이 분명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이기심은 생존의 본능에서부터 출발한 것이고 필연적인 모습인 것은 분명하다. 적자생존의 자연법칙 안에 인간은 놓여 있는 것이고 이를 인간사회가 모습을 달리하여도 그대로 투영되는 현실을 감안하면 인간의 이기심은 충분히 당위성을 인정받기 충분하다. 그러나 인간의 이기심이 인간의 모든 욕망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이에 대한 자기통제는 욕망을 다스리는 수준과 같이 이루어져야 한다. 욕망을 다스리려는 자신의 노력은 삶과 함께하는 것이고 그 정도를 지키는 것은 자신의 도덕적 의지와 연관되어 있다.


인간은 정체성에 대하여 말하며 이기심이 자신의 정체성인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사실 정체성은 정신과학에서 시작된 비유적 표현이다. 인간이 정체성을 갖는다는 말은 자신의 주관을 확고히 해야 한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인간이 정신상태가 분열을 일으키는 요인으로의 정체성의 여부는 정신 병리학적 개념으로 자기 내부에서 일관된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과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서 어떤 본질적인 특성을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것 모두를 의미한다. 인간의 정신분열에 이르는 상태는 오히려 정지의 상태를 말하고 있으며 정신과학에서 이르는 정체성은 그 용어가 갖는 역설적 의미인 ‘자의식의 운동성’을 말하고 있다. 정체성에 대한 개념은 인간의 생존과 직결된 개념이지만 이를 인문학적으로 접근하는 순간 자신의 정체성이 당위의 문제로 귀결되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정체성을 당위의 문제로 인식하려 하고 있다. 어떤 대상의 인식으로서의 형상화하고 고정화된 개념으로 인간의 정체성, 기업의 정체성, 군대의 정체성, 국가의 정체성 등 다양하게 사용한다. 유연함을 갖기 위해 뿌리를 깊게 박고 사는 갈대의 경우처럼 세상의 다양성과 포용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닌 뿌리를 고정한 그 상태만을 바라보고 있는 이러한 정체성의 인식은 지양되어야 한다. 이는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 역시 마찬가지다. 곧 정체성은 목적이 될 수 없으며 정체성의 필요이유는 운동성에 있다. 곧 이것이 ‘사랑’이고 ‘자기애’인 것이다.


감사함을 모르면 이기심을 낳는다. 감사함이 부족하면 모든 성취가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것으로만 생각하게 되고 감사라는 치장을 남기게 된다. 감사의 덕목은 자연스럽게 느끼는 감정의 문제를 뛰어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감사는 하나님이 주신 극심한 고통의 시련 속에서도 ‘그러한 시련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할 만큼 감사를 강요한다. 이렇듯 감사의 덕목은 그 정도가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의 스스로의 성찰이 필요한 것이고 보다 적극적인 실천을 요구받는 것이다. 감사함이 자연적으로 느껴지는 만큼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감사함을 찾는 스스로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남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이 또한 이기심의 발로이다. 남을 가엽게 여기는 마음은 주변의 불쌍한 이웃만을 바라보는 동정의 마음만을 말하지 않는다. 친구나 가족의 어려운 상황뿐만 아니라 나와 모를 수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고뇌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인간의 따뜻한 본성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이렇듯 남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사랑의 열쇄가 되는 것이고 더 크게는 ‘인류애’에 다가서는 인간의 본능적 심성이다. 남에 대한 동정심이 없다면 스스로 이기적인 사람을 자인하는 것과 같다.


사람이 자신의 이익이 기준이 되어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에 예외적인 사람은 없다. 인간의 이기심은 항상 존재하고 있는 것이고 스스로 이기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이 이타적인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은 오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이기심을 누르고 이타적인 자세를 취하려 노력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타심을 버리고 자신을 이기적인 사람이고 인간의 속성이라 생각하며 스스로의 변명 속에 갇힌다면 그러한 사람은 그 삶이 풍족하든 그렇지 않든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다. 그러나 이기심이 많은 사람은 자신의 관심사외에 주위를 살피지 못한다. 이는 성격적인 천성일 수도 있으나 그 만큼의 독선을 가지고 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성장 가운데서 또는 삶을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문제 외에 주변을 돌아보지 못했다면 스스로 이기심이 많은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 남에게는 엄격하지만 자신에게 관대한 이유는 배려의 부족에서 나온다. 남에 대한 배려는 이해하려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상대의 작은 마음이나 감정을 헤아리려는 자세에서 비롯될 수 있다. 그리고 배려는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노력이 나타나는 결과이고 반복된 노력을 통해 몸에 배어드는 습성과 같은 것이다.


자신의 창으로 바라보는 세상의 문제를 맞고 틀림으로 주장하고자 하는 이들도 흔히 볼 수 있다. 인생을 살아가며 자신이 경험한 것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아주 작은 것임에도 전부인양 생각하고 세상의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험주의의 오류도 인간의 한계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는 스스로 객관적인 사람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인간은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객관성으로 포장하기에 익숙하지만 결국 스스로를 위한 자기변명의 수단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을 스스로의 함정에 빠지게 하는 자기합리화로 인해 옳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판단이 자신의 취향에 대한 선택의 문제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기적인 삶을 살고 있다. 자신의 이기적인 모습에 정당성을 부여하거나 변명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는 모습이 필요하다. 자신을 객관화한다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임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인간의 삶 속에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삶일 것이다. 그것이 나의 배우자이든 가족이든 친구이든 또는 전혀 모른 낯선 사람이든 공동체의 일원으로 함께하는 법을 배워나가는 과정이 삶이다. 남을 통해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이유 없는 타인의 비난에 슬픔을 느끼는 경우도 있지만 먼저 이해하려는 마음가짐이 결국 나를 사랑하는 것이 된다. 자기애는 이타적인 자신의 노력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