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위해 잠시 멈추어 서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행복을 기원한다. 당신은 행복한가요? 되물으면 사람들은 흔쾌하게 대답하지 못한다. 행복의 파랑새는 그런 것이었다. 나는 살아오면서 행복을 갈구한 적은 없었다. 내게 주어지는 순간의 행복감에 벅차오르는 희열을 느꼈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의 끝자락을 붙잡으려 하지도 않았다. 행복은 잡으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욕심만을 남기고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것이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삶의 충만함으로 공기처럼 호흡하고 있다. 자신이 이미 행복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간은 스스로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말초적인 감각에 자신을 내던지지 말아야 한다. 뜨거워지는 가슴은 생활 속에 순간순간 항상 존재하고 스스로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감사는 행복의 원천이다. 부처는 세상번뇌를 무상함으로 받아들이고 무념의 세계의 부처가 되기를 권하지만 예수는 삶에 대한 감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나는 오감으로 삶의 모든 것을 느끼고 그러한 살아있음에 감사한다. 나의 죽음이 언젠가는 다가올 것이다. 좀 이를 수도 있고 남들보다 좀 더 살아있을 수도 있다. 그러한 마음으로 어르신을 바라보고 자라나는 아이들을 바라보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이유도 생긴다. 아내의 사라짐으로 인한 절실한 그리움을 알게 하는 것도, 생활의 궁핍함으로 어려운 사람들의 처지를 알게 하는 것도, 내 곁에 있는 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도,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한라산이 밝게 다가오는 상쾌함을 느낄 수 있는 여유로운 감성조차도, 이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된다면 행복은 저절로 다가오는 것이다.
내가 자라난 신앙적 환경은 극단적인 감사의 실천을 요구했다. 무조건적인 감사다. 자신이 겪는 극단적인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도 이 또한 알게 하여 감사함을 신은 요구한다. 이러한 신의 모습은 우주의 광활한 포용력을 닮고 있다. 나는 그러한 우주적 세계를 내 안에 담고자 하였다. 20살의 젊은 나는 이러한 우주적 포용력을 보편성이라 인식한다. 그리고 그러한 보편성은 사랑을 통해 실천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은 모든 사람뿐만 아니라 내가 접하는 모든 생명에, 심지어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확장되어야 한다.
무엇을 인식한다는 것과 그것을 실천한다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인간이 육체를 입어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도의 그 많은 성자들은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히말리야의 깊은 산속으로 은신하였다. 또한 나는 이러한 육체의 한계를 인정한다는 사실이 인간의 모든 고통과 번민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인간의 노력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철학적 인식은 이러한 단순한 문제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내가 간절히 원한 것에 대한 처절한 부서짐의 요구는 첫사랑의 실패, 아내의 죽음, 사업의 실패, 가까운 지인의 배신과 비아냥, 치밀어 올라오는 슬픔과 분노, 삶의 무력감, 번뇌, 가까운 사람들이 차례로 사라지는 죽음의 현실 등에 사실 그대로를 받아들이라는 인간의 노력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파니샤드는 힌두교의 이론적·사상적 토대를 이루는 철학적 문헌들의 집대성이다. 우파니샤드는 또한 베단타(Vedanta)라고도 불린다. 힌두교 경전은 크게 신으로부터 계시된 지식과 스승에서 제자로 전승된 지식으로 나뉘는데, 전통적으로 우파니샤드는 신으로부터 계시된 지식에 속한다. 모든 우파니샤드는 장편서사시의 형태로 구전으로 전수되었다. 총 200편 이상의 문헌이 있으며 그 중에서 《바가바드 기타》, 《브라흐마 수트라》와 더불어 무키아 우파니샤드는 후기 인도 철학의 여러 학파, 베단타 철학의 사상적·이론적 토대를 제공한다. 우파니샤드들이 불교 발생 이전 시대부터 기원전 1~2세기까지 긴 기간에 걸쳐 성립되었다. 우파니샤드를 중시한 서양 철학자와 사상가들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쇼펜하우어, 에머슨, 소로가 있다. 우파니샤드의 교의와 플라톤, 칸트의 철학 사이에 유사성이 있음을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내가 인도철학을 접하게 된 것은 20대에 당시 바바 하리다스의 《성자가 된 청소부》를 접하게 되면서 부터였다. 이후 정신세계사에서 발행된 꽤 많은 책들을 탐독하였다. 사실 지금은 그러한 영성적 책들이 사람을 현혹시킬 수 있는 이중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간혹 우주를 여행하듯 현실을 벗어나 관조적 자세를 취하고 싶어지면 손에 들게 된다. 유체이탈, 쿤탈리니, 카르마의 존재, 윤회, 해탈, 순환의 질서, 형이상학, 직관적 경험 등 나는 이러한 관념철학에 접근하는 방식은 이미 일정한 결론을 가지고 접근한다. 내가 갖는 ‘단순함’도 논리적 모호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가질 수 있는 함정에서 나를 구할 수 있었다. 그 함정은 나약한 인간이 접하게 되는 신비주의적 요소이다.
관념철학의 핵심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주와 나의 상관관계를 말하고 있다. 인도적 관점에서 본다면 내가 우주 안에 존재하고 내 안에 우주가 있어 나와 우주는 하나의 에너지와 같은 것으로 연결되어 인과관계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과관계는 세상의 모든 존재와 연결되어 상호작용을 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에너지와 같은 그 무엇의 하나가 사랑이며 인간이 실천해야하는 최고의 덕목인 것이다. 다양성의 통합은 이러한 도덕적 당위성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고 존재를 인식하는 방법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신비주의적 요소는 모든 종교에 있다. 인도의 다신교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다신교적 요소나 페르시아, 이집트, 심지어 우리의 무속신앙 등과 같은 다신교적 요소와는 현격히 다른 차이가 있다. 그것은 형상의 다양성과 통합이다. 신은 하나이지만 그 모습은 다양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 다양성이란 단지 인간의 욕심과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필요의 산물이다.
성경은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천명을 내렸다. 싯타마 고타르타는 신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부처가 되어 신이 되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세상에 내려와 다시 신이 되었다. 같은 존재를 믿는 기독교와 이슬람은 마호메트가 서남아시아를 통일하고 북아프리카와 남유럽까지 진출하였지만 611년 신의 계시를 받아 이슬람교를 창시한 이후 1,500년 이상을 싸우고 있다. 그리고 이슬람조차 칼리프의 정통성을 이유로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뉘어 현재까지 피비린내 나는 중동의 화약고를 만들고 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스스로 자신을 위해 만들고 스스로를 분열시키는 모든 신을 타파하라는 명령으로 나는 받아들이고 있다.
영적 세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이는 모두가 꿈을 꾸고 산다는 것이 이를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간은 이것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려한다. 그러한 인간의 규명이 불필요한 행위가 되지는 않는 것이지만 인간의 그러한 의식의 흐름은 하나의 에너지를 갖고 세상과 교류하고 있음을 인간은 직감만으로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영적 능력은 개인의 차이를 두고 있고 그러한 영적 능력의 소유 정도가 그 사람의 영성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영험한 무당은 존재하며 하나님의 영적 능력을 부여받는 목사도 존재하고 귀신을 부리는 스님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이 결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고 그들도 결국은 인간일 따름이다.
이러한 인식의 통합은 사유를 통한 직관적 경험에 의해 이루어진다. 인간의 논리는 인간의 한계성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며 통합적 사유를 통한 단순함의 실현은 인간의 끝임 없는 삶의 노력이다. 직관적 경험은 사유를 통한 인식의 깨우침이다. 잠을 자기 전 가끔씩 인간을 괴롭히는 잡념의 회오리는 욕심에서 비롯된 생각의 찌꺼기에 불과하다. 인식의 통로는 의식의 승화를 경험하는 것이고 사유의 결과는 직관적 경험을 만든다. 인간의 모든 욕망을 내려놓고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자신이 우주와 하나가 되고 있는 환희를 경험하게 되고 슬픔과 아픔조차 사람의 영성을 만들어 가게 된다. 나는 이러한 것들이 자신이 믿는 종교를 통해 구현될 수 있는 인생이라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종교를 믿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시간을 직선적인 미래 공간 이미지로 인지한다. 흘러가면 결코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주라는 공간을 생각하면 시간이란 개념 역시 동시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의 대한 역설에 관한 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연관이 있다. 다시 말해서 시간여행도 상대적인 면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시간여행을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기술은 없지만 많은 이론 물리학자들은 향후 몇 년 내로 가능해질 것이라고 한다. 블랙홀과 화이트홀을 잇는 가상의 '시간 터널'인 웜홀의 존재, 웜홀과 같이 역시 가상의 물체인 우주끈, 빛의 속도와 가까운 속도로의 미래여행, 중력시간지연, 시간 여행과 패러독스, 다중우주 등이 천체물리학자들이 내세우는 주장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우주적 인식은 윤회와의 연관성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은 육체의 형상을 입고 현재의 시간에 충실하는 것이 최선이다. 또한 이러한 우주적 인식은 인간이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인간이 무엇을 믿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주적 세계는 인과관계를 통해 연결되어 있고 인간은 존재 자체로 그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결국 인간에게는 어떻게 존재해야 하느냐의 문제만 남는 것이다. 중국의 사상적 체계는 아주 오래 전부터 도교와 유교를 기반으로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도교는 부자와 권력자들의 안위를 위한 점술가로 사치품에 불과한 것이 되었고 유교는 중국의 패권주의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중국 도교의 신선방술의 발생과는 별개일수는 있으나 우리나라에는 고대로부터 도교를 수용하기에 적합한 토착적인 고유 문화현상으로서 산악신앙·신선설 및 그것들과 연관이 있는 각종의 방술이 있었다. 고대의 건국신화가 산악신앙 및 신선사상과 직결되어 있다. 중국 도교가 기원전 3세기경 성립되었다고 추정하였을 때 그 연관성은 어디에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인지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단군신화에 언급된 홍익인간이라는 이념은 한국 신선사상의 특징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후세 선파에서 내세운 환인과 환웅으로 연결시킨 단군의 정신과 교훈은 인간만사의 도리와 우주 삼라만상의 이치를 두루 포괄한다. 우주적 인식에서부터 시작된 자각이 현실에서 발현되는 가치가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실용주의의 구현이다. 이러한 선민사상과 인본주의사상은 우리나라에 자연스럽게 유교적 실용주의를 받아들이는 이유가 되었다. 그러므로 전통적 실용주의는 우리가 지키고 발전시켜야 할 가치라고 생각한다. 인류가 함께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바람을 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