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년(充年)의 의미, 통합의 실천

생각을 위해 잠시 멈추어 서다

by 와와우

절망이 지나간 공허 속에 새롭게

피어난 것들


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

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去 然)


충년(充年)의 의미, 통합의 실천


나는 살만큼 살았다고 말하면서도 인생을 이해한다고 자신하지 못한다. 세상은 나름의 확신으로 인생을 가르치려는 사람들로 넘쳐나지만 막상 진지한 분위기가 조성되면 대부분은 꼬리를 내린다. 그때는 막연한 이야기로 치부하고 냉소적으로 자신의 틀 안에 스스로를 가둬 두는 아집에 찬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사실상 자신의 모든 삶을 바쳐 사색과 고행을 통해 혜안을 얻은 수행자라 할지라도 삶의 전부를 안다고 할 수는 없다. 이러한 사실은 평범한 인간이 스스로 오만할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인생을 통해 인간이 경험하는 것은 일천한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경험치 만큼의 크기가 세상의 전부인 듯 행동하고 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 보다 어린 사람을 함부로 가르치려고도 한다. 또한 자신의 말에 다른 의견을 말하거나 끼어드는 것을 싫어하고 상대의 말에 귀기우릴 수 없어 인내하지도 못한다. 젊은 시절에는 두서없이 많은 말을 한 자신에 대해 괜히 쑥스러워 하고 절제하지 못했음에 부끄러워하기도 했지만 나이가 든다는 것은 지독한 아집이 생겨 그러한 수줍음도 느끼지 못하게 한다.


“요즘 애들은 안 돼!”라는 말은 세대와 상관없이 통용된다. 100세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사회는 기대수명도 늘어서 요즘 경로당을 중심으로 한 노인사회에서 80세 전후의 어르신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 사회는 서열의식이 강하고 그렇게 인생을 살아온 분들은 70세 정도의 나이면 어리다는 표현을 서슴없이 말한다. 이러한 경향은 60대, 50대, 40대로 이어지며 이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회기득권이 세대에 집중되어 독점되는 현상이 실제 사회전반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세대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다.


자신보다 어린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소크라테스 조차도 요즘 젊은이들이 버릇이 없다며 한탄을 하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56세에 생을 마쳤지만 31세에 로마의 요직에 진출하고 그 유명한 1차 삼두정치를 한 나이는 40세다. 카르타고의 하니발에 의해 로마가 완전히 몰락직전까지 몰렸던 2차 포에니전쟁에서 원로원으로부터 전권을 갖고 로마를 구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당시 나이는 25세였다. 징기스칸(테무친)은 65세에 생을 마쳤지만 27세에 흩어진 부족을 통합하여 정복전쟁에 나섰다. 그리고 알렉산더 알렉산드로스 3세가 동방원정을 시작으로 대제국을 이루고 그리스문명을 전 세계에 알리기 시작한 나이는 22세이다. 그 또한 33세에 요절했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완성한 페리클레스는 35세에 정권을 장악하고 32년 동안 고대 그리스를 지배했다. 위대한 정치가, 정복자뿐만 아니라 소크라테스, 공자, 장자, 헤겔, 칸트, 니체 등이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정신적 기준이 되고 이 사회가 나갈 방향을 제시해왔던 수많은 위대한 사상가들 역시 그들의 사상적 기반이 20대에 모두 완성된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시절과 지금의 평균 연령과 사회적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비교될 수 없다고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다. 당시의 20대나 지금의 20대가 물리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일제 식민지시절과 군부독재시절 기성세대가 현실에 순응하며 움츠리고 있을 때 결연히 나설 수 있는 신념과 용기를 가지고 싸울 수 있었던 세대도 20대를 중심으로 하는 청년이었다.


나 역시 20대에 정립된 삶의 인식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되돌아보면 내가 겪었던 젊은 날의 사유를 통해 나를 오히려 부끄럽게 하게도 한다. 그것은 사유의 자유로움이 그 동안 무의식적으로 생긴 편견들로 제한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현재의 나는 젊은 날의 나를 스승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나의 젊은 시절이 삶을 사는 요령에 있어 부족했음은 인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의 요령이 인생의 가치를 바로 알게 하는 전부로 받아들인다면 나는 한낱 말초적인 감각적 본능에 순응하고 따라가는 것이 될 것이다.


나는 4·50대를 중년이란 표현 대신 충년(充年)이라 명명했다. 청년의 이름을 청년에게 돌려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우리 세대(4·50대)가 갖는 사회적 책임과 사명감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요즘 사람들은 60대를 청년이라 부르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의 위험성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노인이 되기를 거부한다고 청년의 이름을 함부로 빌려오게 된다면 이는 청년에게 청년의 위치를 빼앗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자생마을의 청년회가 50대 후반까지 회원으로 구성되고 종친회의 청년회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사회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청년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확대하기 위한 국제 조직에 국제청년회의소(JC)가 있다. 10여 년 전 한·중·일 등의 동양권을 중심으로 정회원 연령을 40세에서 43세로 상향하여 의결한 일이 있다. 최근에는 이들이 또다시 45세로 연장하려고 움직였지만 국제사회에서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는 만 45세의 나이가 어떻게 시니어가 아닌 주니어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한·중·일 내에서의 세대적 갈등과 고령화에 따른 청년의 사회적 위치변화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분명히 60대는 노인이 아니다. 그렇다고 청년의 이름을 사용한다면 사회적으로 중심에 서 있는 4·50대 역시 위치가 흔들리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청년세대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사회는 4·50대가 중심이 되어 실질적으로 움직인다. 이 세대가 중심으로 확실히 설 수 있어야 국가의 미래가 보장될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중년이란 표현이 갖는 애매모호함을 탈피하기 위하여 충년(充年)이라 이르고 이를 뒤에서 지원할 수 있는 자문적 역할의 선배세대를 장년이란 표현으로 사용되면 좋을 듯하다.


세대의 조화는 사회 발전의 기본이 된다. 하나의 세대가 지나치게 기득권을 독점한다는 것은 독점적 사회 불균형을 가속화시킨다. 결국 그 사회가 쇠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세대 간 균형과 소통은 사회가 존재해야 하는 올바른 방향을 제시한다. 할머니에서 손자에 이르는 가족의 연대는 사회로 확장되어야 하고 다시 가족의 관계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현대사는 격변의 시대였다. 최근까지 우리사회의 기득권을 이루었던 세대를 조국 근대화의 역군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파월장병, 파독광부와 간호사 등으로 대변되는 근대화 세대 역시 1960년대에 이루어진 사실인 것을 감안하면 45년 해방이후 50년대에 태어난 세대는 선배세대의 노력에 편승한 사실상 주변인이었다. 이후 민주화의 중심세대가 60년대 생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선·후배 세대에게 빚을 지고 있다. 한반도의 역사에서 가장 헐벗고 굶주렸던 시대에 성장기를 거친 세대이고 그런 이유로 흙수저의 신화가 만들어진 배경이 되었다. 한국의 고속성장 속에 노력의 대가와 혜택을 충분히 받을 수 있었던 행운의 세대였음도 인정해야 한다.


그 세대의 선배들을 비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세대에 대한 가장 큰 과오를 지적하기 위함이다. 지금의 일본처럼 후배의 자리를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근대화과정을 배경으로 흙수저의 성공신화까지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1960년대 세대 역시 후배의 자리를 만들어주지 못한다. 결국 선배세대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60년대 민주화 세대는 친박 세대에 이은 패거리 정치의 주역으로 등장하며 이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역시 생존과 번식의 본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세대를 잇는다는 것은 또 다른 나의 이어짐을 의미하는 것이고 세대적 균형을 맞춘다는 것은 모든 세대가 노력해야 하는 문제이다. 곧 삶에 대한 자각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사회복지제도의 방향이 결정되어야 한다.


세대의 구분은 현실적으로 20년을 기준으로 한다. 이는 복지제도의 실질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을 제시하는 기본이 된다. 아동·청소년, 청년, 충년, 장년, 노년 등으로 구분될 수 있다. 자본주의의 발달은 인간에게 자유경쟁을 통한 경제발전을 유도하고 있다. 자본과 인적 네트워크가 경쟁의 힘이 되는 자본주의 경제체계에서 결코 세대별 또는 개인별 공정경쟁은 이루어질 수가 없다. 국가의 사회복지 정책은 경쟁력이 없는 부분에 대한 지원을 통해 최소한의 삶이 보장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하고 경쟁력이 없는 청년세대에 적극적인 지원을 통해 확대재생산 구조가 실현될 수 있도록 선순환 개념의 복지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4·50대의 재도전이 가능하도록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경제활동인구의 실효적인 지원을 통해 지속적인 경제의 선순환 구조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는 노인세대의 빈곤화 증가, 치매노인의 증가,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 등 사회 최약체계층의 안정된 지원을 위한 재정적 토대를 만드는 것이다. 사회안전망 구축과 적극적인 청년정책은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검정과 하양을 동시에 품을 수 있을까?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이분법적 사고이다. 세대갈등의 문제는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이념, 인종, 종교, 지역 등 모든 사회 갈등이 동일하다. 이러한 모습들은 자기중심의 사고에서 비롯되고 인간의 감정이 기본이 되는 말초적인 사고에 불과하다. 모든 색이 합해지면 검정이 되어 모든 색을 감싸 안고 있다. 또한 모든 색깔의 빛이 합해지면 하얗게 빛난다. 사실은 빛의 색깔이 사라지는 것이다. 모든 종교에서 인간의 가치는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설명한다. 인간의 몸을 만드는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우주를 닮고 있음을 보면 이 말은 옳을 것이다. 우주는 통합의 세계다. 그리고 무와 유가 공존하고 검정과 하양이 동시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것이 표현되는 세상은 다양함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다양성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은 삶의 중요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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