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미학

생각을 위해 잠시 멈추어 서다

by 와와우

절망이 지나간 공허 속에 새롭게

피어난 것들


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

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去 然)


기다림의 미학



https://www.youtube.com/watch?v=Dy8zzPB3W9A


기다림은 사람들에게 잠시 멈춰있기를 요구한다. 정지 상태의 긴장감은 마치 꿈 속 이야기처럼 찰나의 순간을 경험하는 영감의 세계에 뛰어드는 순간이다. 자각의 순간이 될 수도 있고 지성이나 사고의 능력을 이르는 오성을 자극하는 순간이 될 수 있다. 또한 기다림의 정지 상태는 인간에게 그리움으로 인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인간이 생각을 멈추는 순간 마음이 비워짐을 느끼고 그 속을 채우는 자각을 향한 의식의 흐름을 깨닫게 한다.


인간의 활동 중에 정지된 순간이 잠을 자는 순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의도된 의식이 잠시 휴식을 갖는 동안 인간의 육체는 생각보다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다. 잠을 자는 동안 1kg 가까이 체중이 빠진다는 사실은 이를 증명한다. 인간이 육체적으로 활동하는 것에 비교하여도 인간이 잠을 자며 소모되는 칼로리가 상당하다는 사실은 우리가 평소 생각지 못한 의외성이다. 숨을 쉬고 운동을 하며 소모하는 칼로리가 그 만큼의 식욕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우리가 먹는 양과 상관관계를 갖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의 수면은 인간의 모든 신체대사를 활발히 하며 마치 모든 시스템을 자동으로 리셋하는 모양새를 갖고 있다. 인간이 수면 중에 활동을 멈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중동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렇듯 인간의 모든 멈춤에는 여전히 움직임을 위한 에너지를 축적하며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기다림은 인간의 의지가 요구되는 것이지만 인간의 멈춤 상태는 자연의 질서를 따른다. 우리가 불멍을 때리는 상황에서나 경이로운 자연의 풍광을 바라보는 순간에 무의식적인 멈춤의 상태를 경험하는 것과 같다. 그 순간 인간은 자연에 하나됨을 느끼며 자연에 순응하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인간에게 있어 이러한 멈춤의 상태를 경험하는 것은 삶의 의미를 깨닫는 중요한 순간들이다. 이러한 경험이 반복되면 인간은 보다 인간다운 모습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삶에 있어 기다림이 중요한 이유 역시 그러한 멈춤의 순간을 반복하기 위해 인간의 의지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시간은 상대적이다. 순간의 시간이 기다림으로 멈추지 못하면 조급함이 생긴다. 인간의 조급함은 기다림을 무너뜨린다. 조급함은 순간의 시간을 길게 만드는 마법을 부리기도 한다. 신호등을 기다리는 사람은 2분 남짓한 시간이 길게 느껴지게 마련이고 늘어선 줄을 따라 기다려야 하는 순간은 애써 앞사람을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그 시간의 길이는 한없이 길어진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조급함의 수준을 넘어 탐욕에 이르는 수단이 되기도 하는데 순서를 뛰어넘는 특권을 누리려는 욕심으로 꿈틀거리기도 한다. 다른 사람에게 뒤쳐질 수 있다는 수동적 이유만을 염려해서도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기회만 주어지면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과시하고 싶은 욕망이 항상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욕심들이 부딪히면 혼란을 야기 시킨다. 양보와 배려가 인간의 도덕적 신념과 실천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인간이 이익을 탐하는 모습도 기다림이 필요하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문제에 공격적으로 집착하는 모습을 흔히 보게 된다. 아주 작은 이익에도 앞뒤 가리지 않는 일반적인 아줌마들의 공격적인 모습에 쓴 웃음을 보이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녀들의 즉흥적인 감정은 자신의 가정을 지키고자하는 본능적인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된다면 그나마 이해는 가능할 수도 있다. 이것은 여성의 특성일 수도 있고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인 모습일 수도 있다. 여성이 자신의 가정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사실은 인류가 태고적부터 이어져오는 생존의 몸부림이었다. 그럼에도 탐욕에 젖은 인간의 문제는 돈의 문제만이 아니라 자신의 명예와 권력을 향한 욕망과 자기변명의 결과이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욕망을 에너지로 하는 것처럼 이 사회의 존속은 이러한 역설을 통해 실현되고 있다. 멈추어 선다는 것. 이 사회가 모두 함께해야 한다는 절대 명령을 향한 인간의 숙명임을 알아야 한다.


기다림을 통해 멈추어 선다는 사실은 마음을 비우는 것과 같다. 기다림은 미래에 대한 믿음과 함께하는 것이고 그리운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전제로 하고 있다. 지나간 시절과 지나간 사람을 그리워하는 인간의 감정과는 다르다. 인간이 누구를 기다리는 마음은 고고한 인간의 의지와 확고한 믿음이 바탕이 된다. 기다림은 희망을 꿈꾸는 것이다. 잠시 멈춘다는 것이 비워진 마음에 믿음과 희망을 만드는 작업이 된다. 그런 이유로 우리의 옛 설화에서 그리움이 돌덩이로 변하는 이야기는 모두를 안타까움으로 공감하게 하였던 경우가 되었다.


신라시대 박제상의 아내가 치술령에서 죽어 망부석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눌지왕 때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간 왕의 동생을 구해온 박제상은 집에도 들르지 않고 바로 일본에 건너가 또 다른 왕제를 구해 보낸 뒤 일본에서 신라의 신하임을 고집하다 죽는다. 그의 아내는 일본에 간 남편을 기다리다 죽어서 망부석이 되고 그 곳 주민은 부인을 칭송하였다. 박제상의 부인은 죽어서 ‘치’라는 새가 되고 같이 기다리다 죽은 세 딸은 ‘술’이라는 새가 되었다. 이들 모녀가 치술령 신모가 되었고 이에 주민들이 사당을 지어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 사람이 돌로 변한다는 화석 모티브는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것이지만 ‘돌’에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기념비가 되어 대중으로부터 칭송을 받는 의지가 되었다. 부인이 죽어 새가 되었다는 새의 의미는 훨훨 날아 바다를 건너가고 싶다는 의미로 살아서의 공간을 극복하려는 의지이다. ‘이 몸이 새가 된다면’하는 소원이 죽어서 실현이 되었다는 것은 죽음을 초월한 부부의 사랑을 뜻한다. 경상북도 월성군 외동면의 치술령 아래에 이들 새가 살았다는 은을암과 위패를 모신 당이 있다. 망부석으로 죽어서라도 만나겠다는 의지는 사람들에게 심어준 부인에 대한 존경심과 함께 신앙심이 되어 다시 산신이 되었다.


그리움이 돌로 변한 설화에서 굳건한 인간의 의지가 돌로 형상화되었다. 멀리 떠난 남편을 그리워 돌이 된 신화부터 남녀의 신의를 표현한 설화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변에 이어져 온 수많은 이야기들은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이 사회가 꿈꾸는 사회정서를 반영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욕심 많던 한국여성이 중심에 있다는 사실도 아이러니다. 이러한 믿음의 이야기가 기다림으로 표현되어 이 사회가 존재하는 공동체의 뿌리를 만들고 있다. 그리고 이는 그리움과 믿음의 이야기인 것이다.


인간의 죽음조차도 정지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다면 죽음이 더 이상 사라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죽음은 기다림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정지된 상태는 세상의 모든 에너지가 숨죽여 응축된 상태를 말하고 있으며 새로운 그 무엇을 위해 나아가는 통로를 만들고 있다. 살아 있는 육체가 멈추는 순간에 빈자리를 채우는 의식의 흐름처럼 삶의 멈춤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시작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이를 천국이라고도 말하고 환생의 억겁을 반복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인간이 표현하는 모습이 어떠한 것이든 죽음은 삶의 또 다른 순환의 역사를 만들고 있다. 인간의 죽음이 사라짐이라고 하더라도 그냥 사라지는 것은 아니란 확신을 갖게 한다. 기다림의 미학은 이를 보여주는 또 다른 표상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살아가며 기다림을 안다는 것은 삶의 노력이 되어야 한다. 양보와 배려를 실천하는 길이기도 하고 잠자고 있는 자신의 의식을 깨우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스스로 확인한 역사는 오래지 않았다. 절대 권력이 국가의 중심이 되던 시대에는 사회구성원 전체가 사회의 존속을 위한 목적에 종속된 존재로 삶을 영위하였다. 한정된 권력집단조차 왕권을 위해 존재하였으며 절대 권력자마저 정치적 상관관계에 종속되어 있었다. 상업의 발달과 산업혁명 시대를 거치며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을 내세운 시민혁명이 최초 부르쥬아로부터 시작되었고 종교혁명에 의해 대중적 호응을 이끌었다. 그리고 이는 더디기는 하였지만 노예가 해방되고 인권이 보편화되며 자유민주주의의 새로운 발전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이다. 그 옛날 상상하지도 못했던 인류의 모습이 실현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인간의 기다림은 인류의 역사에도 적용되고 있다. 세대를 거치며 인류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것이고 그것을 하나씩 실천해 나가고 있다. 그러한 기다림은 믿음의 역사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제국이 지금보다 더한 세계보편주의를 실현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고 원시사회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 구현된 사회였다 말하는 이도 있지만 그럼에도 인류는 인간 개개인을 둘러싼 많은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 시대의 환경 속에서도 인간의 자유를 말하고 평등을 말하는 이는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미래의 확신을 갖지 못했던 이유는 환경에 구속된 인간의 한계에 그들도 어쩔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제 기다림은 새로운 인류 역사를 향하고 있다. 우리의 공동체가 갖는 기다림의 정서는 인류보편주의를 선도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로 나아가는 한류 속에 기다림의 정서가 있다. 우리의 삶 속에 멈춤의 순간을 실천하며 산다는 사실은 우리의 보편주의 문화를 만들고 있고 이를 통해 풍성한 한류의 내적 정서를 단단히 하고 있는 셈이다. 공동체 속에 기다림의 문화를 성숙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 인류에 대한 사랑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될 수 있으며 스스로의 삶을 보다 풍성하게 만들어가는 방법이 될 수 있다. 기다리는 것은 잠시 멈추어 설 수 있는 것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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