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위해 잠시 멈추어 서다
Amor Pati, 운명에 대한 사랑을 뜻한다. 라틴어로 ‘사랑’을 뜻하는 아모르(Amor)와 ‘운명’을 뜻하는 파티(Fati)의 합성어다.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그의 저서 《즐거운 지식》 등에서 언급한 개념으로 ‘운명애’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니체에 따르면 운명은 필연적인 것이고 필연적인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할 때 인간이 위대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위대함은 본래의 창조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는 고통과 상실을 포함해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를 통해 인간 본연의 창조성이 발현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동시에 운명에 체념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고통까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인간의 의지를 말하고 있다.
운명은 무엇일까?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일체를 지배한다고 생각되는 초인간적인 힘이라고 한다. 또는 앞으로의 존망이나 생사에 관한 처지를 말한다. 인간의 죽음을 운명을 다하였다고도 한다. 운명은 숙명이라고도 하는데 모든 사물을 지배하는 불가피한 필연의 힘이며 누구라도 따를 수밖에 없고 예측하기 어려운 절대적인 힘이다. 그 자체가 비합리적이고 초논리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는 설명이 불필요한 개념이다. 모든 사물을 지배하는 불가피한 필연의 힘이며, 누구라도 따를 수밖에 없고 예측하기 어려운 절대적인 힘이다. 또한 운명은 명확한 목적의지를 갖는 합리적인 힘으로서가 아니다.
인간의 운명적 사고는 신을 만들고 신앙을 갖는 근본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앙적 사고를 벗어나 플라톤 이전에 운명을 고찰한 철학자로서는 헤라클레이토스가 있다. 그는 우주의 생성과 발전은 일정한 로고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 필연적 운명을 깨닫고 그것에 따르는 것이 이성적이며 최선이고 행복이라고 했다. 그리고 스토아파는 헤라클레이토스와 마찬가지로 우주는 로고스에 의해 지배한다고 생각했다. 이 로고스는 운명인 동시에 모든 것을 합목적적으로 형성하는 이성적인 섭리이기도 하였다. 또한 초기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교의를 계승하고 아담의 죄를 공유하는 인간의 원죄로 인해 영원성의 소멸로 인간의 운명이 규정지어졌다고 보았다. 그리고 구세주 예수만이 이 상태를 최종적으로 구제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운명에 대한 숙명론 또는 결정론 역시 불교의 인과응보나 이슬람교를 포함하여 일반적인 인간의 자유의지로 인해 생기는 죄악을 포함한 비결정론적 요소를 거부할 수 없었다. 이것은 스피노자의 합리적 결정론, 라이프니치의 예정조화설, 칸트 및 신칸트파의 목적론적 결정론, 또 과학적 결정론 등 근세의 관념논리학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복잡한 이유 때문이었을까?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운명이란 것이 삶이 예정된 길이라고 생각하는 결정론적 범위를 넘어서지 못하는 이유가 된 것 같다.
그러나 운명이란 개념이 떠오르는 순간, 인간의 모든 설명은 사라지는 것이다. 운명은 그냥 운명일 따름이다. 우주적 세계관이 초목적성을 통해 영원한 순환의 질서를 반복하는 유기적 흐름 자체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이 운명을 마주하는 것은 스스로 큰 고통을 느끼는 순간이다. 그리고 운명을 극복해야 할 그 무엇으로 형상화하고 불가항력적인 의미로 인식하고자 한다.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나약한 인간의 포기나 낙담을 정당화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인간의 모든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의식의 흐름이 운명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방법이 되는 것이다.
나는 예술은 삶의 감정이 승화되는 과정이라 생각하였다. 감정의 승화를 통한 모든 삶의 모습이 곧 예술인 것이다. 인간이 마주하는 모든 감정의 고통과 이를 통한 승화의 과정을 경험한다는 것이 유희의 본질이다. 결국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예술을 경험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즐거움의 본질’을 터득하는 것이 삶인 것이다.
세상에는 인간의 운명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의 운명을 묻는 사람도 흔한 것이 세상이다. 그런데 특정한 운명을 말하는 사람도 그것을 묻는 사람에게서도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성공적인 삶’에 대한 관심이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 대하여 자신에게 유익한 사람인가 하는 문제에 국한되어 있다. 또한 인간의 성공의 기준이 부와 권력이 기준이 되고 인간의 말초적인 안락함에 한정되어 있다. 이것이 예정되어진 것이 사람의 운명이라 말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삶 속에 불가사이한 미증유의 세계가 공존한다. 미증유란 불교에서 유래되었고 일찍이 있지 않아 처음 벌어져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사건이나 일을 말한다. 삶 속에 실제 벌어질 수 있는 불가사이하고 신비한 경험들이 실제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을 미혹시키는 이유가 된다. 세상에는 많은 영적 종교지도자와 도인, 각종 토속신앙에 기반을 둔 무당에 이르기까지 사이비 종교와 더불어 혼재되어 있다. 삶 속에서 인간이 지각할 수 없는 불확실한 세계가 공존한다는 사실이 갖는 의미는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나는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 그러나 내 자신이 분명히 자각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직접 경험하지는 못한 것 같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했고 부모님의 종교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영혼의 존재는 내게 각인된 것이었고 교회에서 듣게 되는 영적 체험은 종교적 분위기 속에 압도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나의 부모님들은 기독교의 순기능과 도덕적 가치에 충실한 분들이셨다. 작은 것에 감사하고 어려운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을 애써 실천하려 노력하며 살아오셨다. 종교의 사회적 실천이란 차원에서는 최선을 다한 삶이었다.
종교는 영적 집단이고 그러한 경험을 공유하며 교류한다. 그러나 내가 성장하며 바라본 교회는 고도로 발달된 정치적인 현실조직이었다. 종교혁명과 시민혁명을 기반으로 하는 기독교 조직은 기능별 수평조직과 직계조직의 조화, 사회단체의 이사회를 연상케 하는 당회, 그리고 교인총회를 최고의결기관으로 하고 있다. 사실상 자유민주국가의 모든 조직 체계는 기독교의 조직체계로부터 탄생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러한 교회조직 내에서도 그 시스템이 무너지는 경우가 있다. 영적지도자인 담임목사나 당회 구성원인 장로들 간에 탐욕으로 인한 갈등이 생기는 경우이다.
종교란 지도자의 영적 능력이 종교 구성원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게 되는 것이고 간혹 그러한 영적 능력에 지도자 스스로가 미혹되는 경우도 흔히 일어난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평범한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기적을 만드는 종교 지도자는 생각보다 흔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과 상관없이 신내림을 통해 이적을 보여주거나 개인의 운명을 예견하는 영적 행위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며 따르게 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일상의 인간의 삶으로 돌아오면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육체를 입어 형상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0세기 신흥종교이며 세계적인 신지학회의 교주였던 크리슈나무르티는 스스로 자신의 영적 굴레를 벗어 던졌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믿지 말라고 선언한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Jiddu Krishnamurti, 1895~1986)는 철학과 영적인 주제를 다룬 인도의 작가이자 연설가이다. 그는 브라만 출신으로 8살에 힌두교최고의 신 크리슈나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사람은 종교 전통이라는 테두리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 내적인 탐구만으로 진리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고 주장하며 수많은 지지자들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체의 권위와 영광도 거부한 일생일대에 대표적인 사건이 신지학회의 해산 선언이었다. 크리슈나무르티가 말하는 자유론의 특징은 간결하고도 명료한 표현에 있다. 그의 자유론의 핵심적인 표현은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리고, 자유는 자기만족의 기회가 아니며 타인 배려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자유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며, 사상과 이념 속에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떤 생각이나 느낌이 일어나면, 그것은 단순한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그러한 반응을 그는 심리적 사고라고 불렀고, 심리적 사고는 기억이 두뇌 속에서 조건반사적으로 일어나는 행동으로서 그러한 반응에는 자유가 없다고 말한다.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자아를 찾아가는 삶의 여정이 되어야 한다.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어진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이고 인생의 모든 고통의 과정을 통해 감정의 승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려는 노력에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성자와 선각자들은 이를 몸소 실천하고 보여준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결국 그러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삶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