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위해 잠시 멈추어 서다
‘정의’란 말은 정치구호로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단어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대중을 현혹시키는 수사적 문구에 이용되면서 우리 사회에서 정의는 존재할 수 없는 막연한 것으로 각인되어지고 있다.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에도 그들이 내세운 구호는 ‘정의사회구현’이었다. 이후 새로운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공정과 정의’는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정의론>의 저자인 존 롤스(John Rawls)는 정의로운 국가는 ‘최소 수혜자를 위한 차등이나 불평등이 공정한 절차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는 나라’를 뜻한다고 하였다. 그러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합의의 절차로서 각자가 타고난 제반 조건들에 구속되지 않아야 공정한 합의가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 ‘무지의 베일’ 개념을 도입했다. 이러한 입장에서 롤스는 ‘정의의 원칙’을 ‘평등한 자유의 원칙’과 ‘차등의 원칙’으로 나누었다. ‘차등의 원칙’은 다시 ‘공정한 기회 균등의 원칙’과 ‘최소최대 원칙’으로 구분하여 헌법상의 기본권에 해당하는 자유에 관한 법칙과 사회적 지위를 획득함에 있어 누구에게나 공정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였다. ‘최소최대 원칙’은 사회적 약자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여기서 사회적 약자는 장애인처럼 불가항력적인 조건에 놓인 약자를 의미했다.
그의 차등의 원칙은 한마디로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의론’이다. 이 원칙의 밑바탕에는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윤리가 깔려 있다. 사회의 최대 수혜층은 공동체를 위해 더 많이 봉사하고 희생해야 한다는 윤리규범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 차등의 원칙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켜 사회주의와 고전적 자유주의 양쪽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그의 자유주의는 순수하게 자유만을 주장하지도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배제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빈부 격차의 해소를 주장하지 않았다. 다만 그 격차가 작아지도록 완화하는 것이 ‘정의의 요청’이라고 보았다.
정의는 옳은 것을 향한 포기될 수 없는 인간의 노력이다. 롤스의 주장이 정의로운 국가의 조건을 설명하고 있지만 결국 그 국가의 구성원 하나하나의 정의로운 삶의 자세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제되고 있다. 이렇듯 사회적 규범은 개인의 도덕성을 요구하고 있어 사회적 정의의 개념은 개인의 삶의 방향을 동시에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공동체주의를 주장한다. 공정한 세상을 위해 공동선을 추구하고 이견을 상호 존중해주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불평등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없다. 불평등의 기준이 무엇이냐는 문제도 항상 같이하고 있는 것이지만 불평등 해소를 위한 인간이 노력이 정의가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원초적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 역시 존재할 수는 없다. 인간이 사회를 구성한다는 것은 개인의 자유가 일정부분 제한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정의는 인간의 배려가 수동적으로 강요된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행하여지는 의지에서 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제레미 벤담이 주장한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은 지금도 우리의 의식 속에 사회가 존속하기 위한 기준이 되고 있다.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 소수는 희생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다수가 이익이 되더라도 소수가 희생되는 것이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변화하였다. 그것은 계약사회와 시장경제를 기본 철학으로 정립된 자유지상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자유의사에 따른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는 자유지상주의는 개인의 자유가 어디까지 인정될 수 있느냐의 해답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의 목적에 부합한 것이 정의이고 칸트와 롤스는 개인의 선택권이 보장되는 것이 정의라고 했다. 그러나 인간이 산다는 것은 하나의 조직과 사회에 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 사회에 대한 의무감과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자기결정권 사이의 딜레마가 생기게 된다. 정의는 사회제도와 조직의 존재목적, 분배의 대상, 어느 정도가 미덕인가에 대한 논쟁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다수의 이익이란 것의 의미와 그것을 규정한다는 것 또한 포함되고 있는 것이다.
삶의 가치를 생각하면 다수의 이익이란 단순한 개념은 사실상 허상이 된다. 다수의 이익이 행복이 될 수도 있고 자유와 평등의 모호한 개념이 될 수도 있다. 결국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의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정의를 논함에 있어 분배의 문제나 자유의 문제에 지나치게 치우치는 것은 특정한 취향이나 경향의 문제로 흐르게 된다. 정의는 그 사회에 속한 합의성과 그 과정에 있다. 즉 인간의 삶의 목적을 위한 부단한 노력이 ‘정의’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자유만큼 남의 자유도 존중되어야 한다. 이는 환경적인 요인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고 경제적인 요인도 적용된다. 자유방임주의는 치열한 경쟁을 유도하였으며 이로 인한 많은 실패를 만들었고 개인의 경제적 실패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이유가 되었다. 다른 사람의 자유가 존중되는 것이 평등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면 분배의 문제는 사회적 합의의 최우선 순위에 있어야 한다. 이렇듯 공정한 분배의 문제는 정의에 대한 중요한 지표가 된 것이다. 경제는 가치의 생산과 순환을 의미한다. 그리고 인간의 욕망을 동력으로 돌아가는 수레바퀴와 같다. 원시공동체사회가 부족한 것을 나누었다면 현대사회는 풍족한 것을 더 가지려 하였고 여기서 소외된 이는 더 가난하여졌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심리적인 박탈감도 포함된다.
20세기에 들어서며 비판철학이 발달하였다. 이는 이마누엘 칸트의 영향이 컸다. 칸트 이전의 철학은 신의 존재라든가 영혼의 문제 등을 다루는 관념적 성향이 강하였고 오히려 영국의 철학자 흄과 같은 사람은 자연과학적인 진리마저 의심했다. 칸트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자연과학의 진리를 만들어낸 인간의 이론적인 능력인 이론적 이성을 비판했다. 그리고 인간의 능력인 실천적 원리성을 비판하며 올바른 도덕의 존재양식이나 새로운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비판철학의 이유로 제시하려고 했다. 올바른 지식이 성립하려면 우리에게 경험을 성립시키는 형식인 신적인 형식이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도덕은 신적인 형식이 인간의 의지를 향해 이 형식에 따르도록 명령하고 있다는 것이다. 칸트가 말한 비판철학이 갖는 선험철학은 직관적 경험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비판철학은 논리성의 함정에 빠져든다. 인문학에 있어 과학적 사고는 다양한 논리적 형식을 만들어 왔으며 이러한 형식은 비판철학의 무기가 되었다. 마이클 샌델 역시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와 존 롤스를 포함한 자유주의자들의 이론을 비판하였지만 자신이 주장하는 공동체주의의 필요성을 설명하는데 그 의도가 퇴색되기도 한다. 국내의 한 석학은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고 반박한 책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미국 현지에서는 10만 부도 팔리지 않았던 책이었음에도 우리나라에서 열광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마이클 샌델이 주장한 공동체주의에 대한 우리의 정서와 암묵적 동의가 작용하였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논리성은 비판의 수단이 되고 스스로 견고한 창을 만드는 이유가 된다. ‘비판을 위한 비판’이란 말이 존재한다. 이러한 말의 존재는 인간의 허영과 극도의 오만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논리적 비판은 스스로 만족하는 함정을 만들기에 충분하다. 분석적 사고의 한계는 통합적 사고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로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무를 보면 숲을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나무를 보면 숲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고로 발전할 수 있어야 한다. 개인의 문제에 있어서도 인간의 비판의식은 말하고 있는 사람의 의도와 생각이 선의를 가지고 있는지에 집중되어야 한다. 표현은 다양할 수 있으며 오류를 가질 수도 있다. 그 표현과 오류에 집중하여 접근한다면 상대의 본질에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학문적 접근이나 철학적 접근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다.
모든 철학의 고민으로부터 의식의 흐름을 타고 함께하면 그가 원하는 본질을 알 수 있다. 한 사람이 위대한 철학자로 역사에 기술되는 이유는 그들이 표현하는 논리적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수천 년을 이어오는 수많은 철학의 흔적들은 100년도 안 되는 인생의 고민들이 실을 꿰듯 인간의 의식이 흘러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벤담의 말한 공리주의적 접근은 바람직한 것이다. 그리고 롤스 등이 말한 소수의 자유가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옳은 것이다. 사실상 인간의 삶의 실체는 이와 같은 것이 상존하여 존재한다. 상반될 수 있는 이러한 생각들이 융합될 수 있는 우리의 노력이 포기되지 않는 것이 ‘정의’이다. 곧 ‘정의’는 바람직한 것을 향한 ‘보다 바름’이 포기되지 않는 인간이 추구하는 노력의 과정에 숨을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