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위해 잠시 멈추어 서다
도덕심에 대한 자각은 생각보다 어려운 것 같다. 가장 큰 이유는 자기변명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는 부모의 표정을 살피며 상호작용으로 거짓말을 배우게 되지만 스스로 잘못된 일이라 생각하면 불안함을 감추지 못한다. 아이들도 변명을 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럴듯한 항변을 만들고 자기를 돌보는 이와 상호교류의 방식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람은 누구나 그러했던 자신의 기억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고는 잊고 산다. 인간이 그러한 기억을 잊고 산다는 것은 그러한 순간순간이 축적되어온 오늘의 나를 만들고 이를 반복하고 있을 가능성이 함께 망각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가 평범한 인간이 도덕심을 철학적 영역으로 던져버리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도덕군자’라는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윤리학은 도덕의 원리, 기원, 발달, 본질과 같은 인간의 올바른 행동과 선한 삶을 사회 전반에 걸쳐 근원적이고 총괄적으로 규명하는 철학의 주요 분야이다. 도덕철학은 그리스어와 라틴어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는데 윤리(ethics)는 우리가 말하는 품성과 연관이 있고, 도덕(morality)는 습관이나 관습과 관련이 있다. 특히 윤리학에서 주로 다루는 것은 '선한 삶'으로 일반적으로 가치 있게 사는 삶이거나 단순히 만족하는 삶이 아니다. 많은 철학자들은 일상적인 도덕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을 지향하는 삶을 생각했다. 다른 관점에서 도덕 자체는 학문이 아니지만 그것을 방법론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윤리학이다. 그 연구 영역은 도덕 현상과 도덕 본질로 크게 나뉜다. 물론 이 두 가지는 서로 뒤섞이며 철학이론과 결부되어진다.
어쩌면 인문학의 시작은 도덕규범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식자의 관심을 우주로 대변되는 자연 세계에서 인간에게 돌리도록 하였던 최초의 그리스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이런 입장에서는 인간이 특정한 지식을 지닐 때 인간의 삶은 가장 높은 차원에 있게 된다. 그 지식 외에 나머지 모든 다른 지식들은 이차원적인 것이 된다. 그 지식은 바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으로 자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자의식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본질적인 ‘선’인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만약에 사람이 자신에 관한 지식을 알고 싶어 한다면 사람이 자신의 존재와 관련된 모든 사실과 그 사실의 맥락을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만약에 사람들이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정확히 안다면 자연스럽게 좋은 일을 할 것이라고 가정하였다. 악이나 나쁜 행동은 무지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소크라테스의 말에 반하여 스스로 알고도 이를 감추려 애쓰고 변명으로 자신을 포장하는데 능한 존재이다.
서양의 도덕철학은 중세시대 후반기에 각 대학에서 활발하게 교육되었다. 특히 그 당시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었는데 고대 이교도의 신앙에 주석을 다는 것이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도덕적 행동의 습관화를 통해 도덕적 성품을 고양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 좋은 삶을 삶의 목표로 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정치학에 직결되고 일체화되어 있다. 인간의 행위는 모두 그 어떤 선을 희구하는데 최고선은 국가(폴리스)가 추구하기 때문이다. 개인에 있어서의 선의 실현보다도 국가적 선의 실현이 궁극적이라고 말한다. 그는 중용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중용은 두 개의 악인 초과와 부족의 중간을 일컫는다. 덕을 비교의 상태로 본다면 중간이지만 '최고선'에서 본다면 정점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덕은 인격의 상태이며 그 본질은 중용에 있는 것이다. 사려는 지성적 덕이지만 이성이나 지혜와도 다르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의 온갖 선과 악에 관하여 이치를 수반한 진실 행위가 이루어지는 상태이다. 이론적인 학문이나 제작 기술과도 달라서 행위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개별적으로 관계되는 사려야말로 가장 중요한 덕이다. 말이 지니는 본질적 의미의 사려도 정치적 사려이다. 우애도 행복인 덕을 보충하는 중요한 것이다. 우애는 서로를 알게 되어 마음에 지니는 호의이다. 완전한 우애는 덕이란 점에서 동료 사이에 성립되지만 드물다. 자기의 이성을 사랑하는 자애를 중심으로 이기와 이타가 결정되는 것이다.
동양에서도 중용은 중요한 도덕적 가치로 자리하고 있다. 대학·논어·맹자와 더불어 사서라 일컫는다. 유교에서 사서라는 일컬어진 것은 중국의 송나라 때이다. 중용을 흔히 유교의 철학 개론서라 하는데 그것은 유교의 철학적 배경을 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머리에서 하늘이 명(命)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이 대목은 유교 철학의 출발점과 그 지향점을 제시하고 있다. 중(中)이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지지 않으며 지나침도 미치지 못함도 없는 것을 일컫는 것이고, 용(庸)이란 떳떳함을 뜻하는 것이라고 성리학의 거두인 주희는 설명하고 있다.
중화사상은 중용을 철학적 표현으로 달리 하는 말이다. 이 때의 ‘중’은 희로애락의 감정이 발로되기 이전의 순수한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마음이 발해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일컫는다고 하였다. ‘화’는 이미 촉발된 정(情)이 중에 의해 조절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중화를 이루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에 있게 되고 만물이 자라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우주 만물이 제 모습대로 운행되어 가는 것을 뜻한다. 이후 중용의 개념을 명백히 인간의 윤리와 결합한 사상으로 전개하였다. 송나라 시대에 이르러 성리학이 성립하면서 특히 〈중용〉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결국 윤리와 도덕의 규명보다 이를 인지하고 이해하는 것보다 실천하려는 마음이 도덕심이다.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말들이 후세 중세유럽의 종교적 도덕규범으로 발전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최고의 선’을 신으로 치환하면 모든 것이 논리적으로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국가 또는 폴리스가 최고의 선을 추구한다고 말한 것은 그들이 생각하는 폴리스는 공동체를 말하고 있다. 중세의 종교철학자들은 이를 신으로 대신하였고 오늘날 우리사회에 이르러서는 민주공동체 사회로 이해하고 있다.
개인에게 있어 중용의 상태가 도덕성과 일치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두 개의 악인 초과와 부족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욕망에 대한 중립적 개념을 말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대한 실천방식으로 사려인 배려를 말하고 있으며 동양고전인 중용에서의 화(和)는 통합을 말하고 있다. 이는 공동체 사회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도덕적 기준이 마련되고 있음을 말한다.
도덕심은 실천이다. 도덕의 문제는 실행하려는 마음에 있는 것이고 개인의 노력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사실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더라도 모든 것은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인간이 존엄한 존재로서 가치를 가지는 것은 이에 대한 책임을 부여하고 있다. 인간의 도덕성은 본성인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아니다!’이다. 사실상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혼재되어 있는 것이 인간이며 인간 개인 스스로도 이를 분명히 규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개인 이기주의가 타인에게 해가 된다면 이는 죄이다. 어린 시절부터 반복되어져온 자기변명에 스스로를 합리화 기키고 이에 능숙해진 인간의 본성은 스스로의 허물을 감추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그럴 수 있다고 포장하기도 한다. 남에 대한 배려가 없음도 죄가 되고 서로가 공감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음도 죄가 된다. 그러므로 인간 윤리에 있어 분명한 사실이 있다. 인간 스스로의 책임인 도덕심을 향한 노력이다. 이는 복잡한 철학적 사고나 종교적 가르침에 의한 대단한 무엇을 요구하고 있지 않는다. 단지 ‘나는 바른 사람인가?’ ‘보다 바르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하는 반복되는 자문을 던지면 될 것이다. 우주를 닮은 인간의 본성이 모든 이에게 응답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