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아는 만큼 세상이 보일까?

생각을 위해 잠시 멈추어 서다

by 와와우

절망이 지나간 공허 속에 새롭게

피어난 것들


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

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去 然)


과연 아는 만큼 세상이 보일까?


아는 만큼 세상이 보이는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스스로의 사유와 자각만큼 세상을 보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인간이 안다는 것들은 그것이 전문성을 갖는 것이 아니어도 삶의 경험을 통해 자연히 알게 되는 것이 무한할 정도다. 그러한 의미에서 각자의 지식도 어느 순간이 되면 모두가 평등해진다고 말할 수도 있다. 결국 누구에게나 알게 된 지식의 크기는 그것이 옳든 그르든 축적되어 쌓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경험하고 알고 있는 자신만의 창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하는 아집도 함께 생겨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알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인간이 많은 것들을 의도적으로 습득하여 지식을 넓힌다 하여도 세상의 지식에 비하면 참으로 작은 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러한 노력이나 의지를 게을리 하면서도 자신의 경험만으로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기도 하고 오만함을 보이는 경우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사실 많은 지식을 습득한 사람일수록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항상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1만 시간을 한 가지에 투자하면 모두가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쉽게 말한다. 하루 3시간씩 10년을 더하면 1만 시간이 된다. 분명 기능적인 부분에서는 이와 같은 말은 사실이다. TV에서 볼 수 있는 생활의 달인들은 그러한 사실들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똑같은 일을 비슷하게 했음에도 다른 이들이 그 주인공과는 다르게 현격한 기능의 차이를 보이는 이유를 달리 설명할 방법은 없다. 이는 타고난 재능의 차이이고 그에 대한 노력과 집중력이 차이를 만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특별한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게 되지만 열심히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겸손함 또한 보이게 된다. 세상의 많은 일들 중에서는 자신의 특출한 능력에 보잘 것 없는 작은 것만을 이루었다는 겸손함이 함께하고 있기도 한다.


평생을 두고 지식습득에 매진한 대학자나 철학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들의 겸손을 모욕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신의 보잘 것 없는 경험을 전문성을 갖는 전문가처럼 행세하는 경우들이다. 사회가 다양해지고 전문영역이 생겨나면서 수많은 전문가들이 활개치고 다닌다. 그러한 사람들이 전문영역을 새로 규정되어지는 경향을 보이는 모습은 거짓이다. 사람이 1만 시간을 한 가지에 종사하였다고 모두가 전문가의 이름을 가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평생을 음악에 전념하고 이를 생활하였다는 것만으로 문화예술의 전문가로 인정되지 않는다. 다른 종류의 예술적 행위에 종사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문화예술에 대한 이해는 철학적 사유가 수반되는 문제이고 그 전문성을 인정받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처럼 단순한 직업인이 전문가가 될 수는 없다. 공무원으로 평생을 종사하였다고 행정전문가로 불릴 수는 없는 것이다. 관광업에 종사하였다고 관광전문가가 될 수 없다. 노동자로 평생을 살았다고 노동전문가가 될 수 없으며 복지사로 근무한다고 복지전문가가 될 수 없다. 보험설계사로 오랫동안 종사하였다고 보험전문가나 금융 전문가가 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심지어 회계사가 경제전문가가 될 수 없는 것이고 의사가 의학전문가가 될 수 없고 법조인이 법률전문가가 될 수 없다. 요즘 우리사회에서 볼 수 있는 전문가 만능주의는 수많은 거짓 전문가를 만들어내고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주장에 대한 정당성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사람은 아는 만큼 그 지식에 갇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경험주의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자신이 경험하고 스스로 내린 결론에 갇히는 그런 경우이다. 또한 사유를 게을리 하고 결과에만 열중하여 원리접근을 소홀히 하는 경우이기도 하다. 흔히 평생을 공부한 교수가 사회 실정을 모른다고 한다. 그러나 항상 예외는 있는 것이지만 지식을 습득함에 있어 사유의 경험과 통합적 사고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말이 단순히 사회의 현실적인 측면만을 말하고 있지는 않는다. 오히려 일반대중이 편협한 시각에서 지식인을 폄훼하는 이유가 되는 경우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전문성이 지식을 많이 습득하고 그에 대한 외형적인 결과로 평가될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사실 그들만큼 한 우물을 열심히 판 이들도 드물다. 하물며 다른 분야에 적용되는 경우는 어떻겠는가? 1만 시간의 노동을 한다고 특출한 기능인이 모두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모든 것은 인간의 노력과 집중력이 수반되어야 이룰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결론에 이르면 아는 만큼 세상이 보이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지식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사람들이 지식과 지혜를 구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며 인간이 공부를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지혜를 구하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이미 사람이 아니다. 인간의 두뇌가 생존을 위해 진화한 것이라는 현대 뇌 과학자의 주장도 존재하지만 인간은 이미 모든 현실에서 생각을 강요받으며 살고 있다. 인간의 생각이란 것이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만 진화하였다는 전제는 바르다고 할 수 없다. 인간의 뇌는 기능적인 것만을 요구하여 생겨난 것은 아니라는 것에 있다. 오히려 인간은 꿈을 꾸기 위해 뇌가 물리적으로 생성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바른 말이다.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현대 물리학의 기초가 되었다. 그의 물리학과 우주론은 세계가 변화하는 물리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공간 또는 빈 공간도 실재 존재와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빈 공간은 무한한 공간인 진공이며 존재를 이루고 있는 무수한 원자들이 이 진공 속을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의 개념을 인식했다. 현대와 같이 과학이 발달하지도 않았고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실험이 가능하지도 않은 시절에 원자의 근본적인 존재원리를 규명하고 있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공간에 대한 인식이다. 무와 유가 동시하는 공간이란 개념은 현대에 와서 양자물리학의 개념적 접근을 가능하게 하였다. 데모크리토스뿐만 아니라 현대과학에서도 원자를 쪼갤 수 없는 가장 작은 단위로 규정하였지만 그 안에 또 다른 공간이 존재하고 있음을 규명하고 있다. 중성자와 양성자, 원자핵, 전자 등의 구성적 요소가 존재하며 우주의 규칙적 운동성이 이 작은 원자 안에서도 존재하고 공간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질을 이루며 모든 형상을 만드는 입자라는 개념은 놀라운 발견이다. 다양한 결합을 통해 세상의 모든 형상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구성하는 원자의 종류는 100여개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놀라운 현실이다. 물질의 고유한 성질을 갖는 최소단위가 원자의 화학적 결합에 의한 분자라고 규정하고 있으나 나노기술의 발달은 그 고유한 성질을 바꾸는 기술로 진보하기도 하였다. 분자의 특정한 성질이 분자 하나에 의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포도송이처럼 모여 만들어지는 분자의 상호작용에 의해 고유한 성질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분자의 성질이 상호작용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인문학적으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간이 상호작용에 의해 삶이 구축된다는 필연을 말하고 있다. 분자덩어리를 쪼개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물질의 성질을 발견하게 된다. 현대 과학자들이 나노기술을 이용하여 필요한 물질을 얻는 것에는 무수한 실험을 통해 얻는 우연성이 있다. 이것은 마치 로또에 당첨되는 것과 같이 무수히 반복된 실험 중에 나오는 행운과도 같다.


우주를 닮은 세계가 작은 물질의 입자 속에 펼쳐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물질의 상호작용은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오랫동안 빛의 입자설과 파동설이 대립하였다. 톰슨의 실험 등에 의해 빛은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모두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같은 성질을 빛의 이중성이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작은 입자 속에는 무궁무진한 우주적 질서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이 작용하는 방식을 인간은 분명하게 규명하기는 힘들다. 양자 물리학의 출현은 이러한 철학적 사고의 시작이 되었다. 인간의 뇌의 구조 역시 이러한 물리적 형상을 기초로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보고 인식하는 세계는 물리적 세계다. 이러한 물리적 형상의 세계가 철학적 인식의 정신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도 규명된 사실이다. 그것을 ‘전자의 이동’이라고도 할 수 있고 ‘파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혹자는 이를 ‘기’라고도 표현하며 ‘에너지’라고도 표현한다. 뇌를 통해 인간이 사유를 한다는 것은 이러한 모든 것을 움직이는 동력이 된다. 이것은 물질과 정신이 분리되어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수면에 파동을 일으키면 단지 수면에 물결을 일으키는 물리적 현상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소리와 파장을 만들고 주변의 다른 물질과 교감하는 에너지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에너지는 다시 움직이는 모든 생명과 움직임이 없는 물질에까지 작용하고 있다.


인간이 지혜를 구하는 행위는 이러한 우주의 질서에 동화되기 위함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식도 탐하면 욕망이 된다. 그리고 이것이 스스로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기 쉬워지기에 경계해야 한다. 인간은 지식을 구하기보다 지혜를 구하는 것이 옳다. 인간의 지혜는 사유를 통해 얻는 것이며 그러한 사유는 자신과 접하는 모든 것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인간이 품게 되는 마음이란 감정이 이성이라 말하는 뇌의 활동가 다르지 않음을 인식해야 한다. 따듯한 마음이 인간의 바른 정신세계를 만드는 것이고 이는 곧 하나로 존재하고 있다. 차가운 이성은 없다. 그리고 인간이 냉철해야할 이유도 없다. 인간이 갖는 지식을 향한 갈구는 지혜를 구하는 것이고 이러한 지혜는 우주에 동화될 수 있는 따뜻한 심성을 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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