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살만큼 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생각을 위해 잠시 멈추어 서다

by 와와우

절망이 지나간 공허 속에 새롭게

피어난 것들


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

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去 然)


이제 살만큼 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올해로 나는 56세가 되었다. 아득한 시간은 물 흐르듯 주마등처럼 스치며 지나간다는 말이 어느덧 나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시간들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지나온 날들을 다시 돌이키려는 순간마다 집어삼킬 듯 덤벼드는 과거의 허상들을 나는 애써 외면하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시간은 무심히 지나갔다. 정말이지 그것은 무서울 만큼의 무심한 시간들이었다. 그 동안 치열했던 수많았던 나의 감정들은 현실 속에서 무심함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에 ‘그럴 수도 있다’는 신과의 타협을 강요받았다.


분명한 사실이 있다. 인간은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이러한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지만 살아있는 육체는 생존의 본능으로 자신의 형상이 이끄는 감각과 감정 속에 스스로의 운명을 맡긴다. 나는 27살의 젊은 어느 날, 나의 삶을 마치고자 결심했고 알 수 없는 이유로 다시 살아야만 했던 그 순간부터 나는 덤으로 인생을 산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리고 나의 아내를 만나 새로운 삶에 대한 꿈을 꾸는 한 때도 있었지만 아내가 사라지고 아내의 또 다른 의미였던 어린 간난아이를 품에 안고 커가는 순간들을 바라보며 25년이란 시간동안 속죄의 마음으로 살게 되는 운명을 감내해야 했다.


죽음의 대한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겸손의 필요성을 알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먼저 이해하고 주어진 삶 속에 삶의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의 모습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알 길은 없다. 보이지 않는 영혼으로 세상을 떠돌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는 극히 인간적 차원의 인식을 말하기도 하지만 죽음은 단지 사라짐의 미학일 뿐이다. 사라짐은 새로운 시작을 만드는 원천이 되고 순환의 질서를 만드는 우주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죽음이 존재하는 방식이 어떠하든 이는 형이상학적 힘이 작용하여 순환하고 하나의 에너지와 같이 우리의 삶과 연결되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개별성 보다는 통합성을 지향하는 우주적 세계로 융합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인도의 사상적 토대인 ‘범아일체’는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거울이 된다. 그리고 이는 인간의 종교적 인식을 새롭게 하는 이유도 될 수 있다. 삶의 본질과 형상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이다. 우주가 존재하는 방식이 물질의 최소단위인 원자와 분자로 물리적 존재방식을 그대로 복제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 철학자인 데모크리토스가 철학적 사유를 통해 원자의 존재를 일찍이 규명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는 빈 공간은 무한한 공간인 진공이고 존재를 이루고 있는 무수한 원자들이 이 진공 속을 일정한 힘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현대 물리학은 다시 원자 안에 존재하는 전자의 움직임을 우주적 질서를 통해 그 존재방식을 투영하고 있다. 인간의 우주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상호작용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이러한 상호연관성은 서로를 연결하는 인과관계의 알 수 없는 힘의 존재를 말하고 있다. 이제는 이러한 힘의 원리가 양자역학으로까지 인간의 인식이 발전하고 있다. 모든 물질적인 존재뿐만 아니라 비물질적 존재와도 작용하는 확장성을 과학적으로 규명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상호연관성은 도덕적 당위성을 부여하고 있다. 배려와 관용은 인간의 삶에 있어 의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삶의 본질과 형상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종교가 말하는 신의 모습은 다름으로 존재할 수는 있으나 우주적 관점에서는 하나를 향하고 있다. 다름은 단지 인간이 처하게 되는 형상의 다양성일 따름이다. 그리고 종교의 다름은 궁극적인 목적에 앞서 인간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이용되어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양자역학의 발전은 20세기 초반 양자역학의 도입으로 원자·핵·분자 물리와 화학의 진보에 크게 기여해왔다. 물리학자들은 원자수준에서 일어나는 운동도 뉴턴의 고전역학으로써 서술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고전역학은 원자보다 훨씬 큰 태양계의 행성과 달, 지구 주위에서 움직이는 운동의 연구를 통해 발전하였다. 그러나 고전역학은 원자에서 일어나는 직관에 반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었고 이런 이유로 양자역학시대가 열렸다. 빛의 간섭과 회절현상이 발견된 후 전자파로 인식된 빛을 정확히 기술하기 위해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다.


양자역학은 분자와 원자핵의 성질에 대해서도 성공적으로 예언했다. 양자역학을 이용하면 결정 구조를 결정하는 힘, 금속과 반도체의 결정 내에서 장거리를 움직일 수 있는 상태에 있는 전자의 운동, 자기적인 성질을 결정하는 물리적 요소 등을 알 수 있다. 양자 전기역학의 실용적인 결과로써 가장 중요한 것은 레이저의 발전인데 레이저를 이용하면 간섭성이 있는 강렬한 빔을 생성하여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양자역학의 출현은 직관적인 철학적 사고가 물리학에 적용되는 대표적인 예이다. 하나의 입자가 하나의 구멍을 지난다는 것은 우리에게 친숙한 세계다. 미시세계는 양자역학이 지배하는 세계다. 입자가 파동의 성질을 가지며 하나의 전자가 동시에 두 개, 아니 수십 개의 구멍을 동시에 지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여러 가능성을 동시에 갖는 상태를 중첩상태라 부르는데 관측을 하면 미시세계의 중첩상태는 깨어지고 거시세계의 한 상태로 귀결된다. 이것이 양자역학의 핵심이다. 이는 물질의 존재방식과 상호연관성을 과학으로 설명하고 있다. 죽음의 존재를 규명하는 것은 직관에서 양자역학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무와 유는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자살은 살아있는 인간의 의지이고 선택이라 말한다. 그를 흔히 '염세주의 철학자'라 부르지만 헤겔의 관념론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의지의 형이상학을 주창한 인물이다. 그의 글은 나중에 실존철학과 프로이트 심리학에 영향을 끼쳤다. 사랑을 부정하였고 지독한 염세주의자라고 평을 받지만 철학의 이면은 반드시 역설이 존재한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 사랑에 대한 믿음과 삶에 대한 지독한 사랑이 존재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살아 있는 육체에 죽음이 요구하는 것은 단순하다. 인간은 분명히 죽을 것이고 그 사라짐이 새로운 시작이 된다는 사실이다. 10년이든 30년이든 100년이든 모든 죽음의 차이는 없다. 하늘에 벌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 모든 죽음은 나와 무관하지 않다. 아무리 천인공노할 죄인의 죽음일지라도 우리는 죽음과 함께 그를 용서하고 애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죽음에 대한 인간의 겸손이다.


인간의 생존본능은 죽음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을 갖게 한다. 역으로 삶의 생존본능이 감소하게 된다면 죽음도 가까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나에게 있어 이러한 감정의 경험은 사실상 계속하여 반복되어 왔다. 그러나 그런 순간에도 나는 살아있는 날까지 주어진 삶에 충실해야겠다고 다짐하곤 하였다. 지금 이 순간 죽음을 택하거나 그렇지 못하여 앞으로 수십 년의 생명을 계속하여 유지한다하여도 특별히 달라지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삶의 가치는 무엇일까? 나는 살아있음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고자 한다. 세상의 모든 것과 알 수 없는 힘으로 연결되어 상호작용을 하고 거대한 우주를 내 안에 담아 세상만물과 소통하며 우주의 질서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믿음이다. 나는 내가 죽은 후에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할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단지 내가 인지할 수 있는 이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원할 뿐이다.


인간의 욕망조차도 인간의 생존본능을 일깨우는 힘이 된다. 그리고 현대사회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많은 부분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돈이 필요하기도 하다. 또한 다른 사람을 쉽게 부릴 수 있는 권력을 탐하기도 한다. 무수히 많은 육체의 작은 탐닉을 만족시키기 위해 남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욕망들이 사람들이 서로 충돌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상대적인 박탈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욕망에 대한 박탈감이 생존본능을 감소시키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치열하게 욕망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그럴 수도 있다고 먼저 이해하려 하는 것도 나의 삶이었다. 결국은 정도의 문제인 것이다.


이제 살만큼 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많았던 아픔의 세월을 거치며 그러한 외부의 자극에 무뎌질 만큼 감정의 크기도 사라져 갔다. 지금 죽어도 더 이상의 여한은 없다. 그러나 나는 이 살아있는 육체를 가지고 마음껏 다시 사랑하고 싶다. 살아있어 세상과 교감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삶의 의무를 다하고 싶다. 나의 모든 육체의 감각으로 느껴지는 살아있다는 환희를 온몸으로 느끼며 감사함으로 살고 싶다.


나는 할머니의 사랑을 생각한다. 인간은 사랑마저 자신의 욕망의 그림자가 되고 말았던 젊은 시절이 지나고 나면 자식을 통해 얻은 새로운 탄생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랑의 본질을 본능으로 깨닫고 그대로를 실천하는 것이 할머니 또는 할아버지의 사랑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의 감정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사랑했다는 결과이고 사랑하고자 하는 인간의 최선의 노력이다. 사랑은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힘의 원천이고 인간의 죽음과 상관없이 세상만물의 하나로서 존재하는 의미를 만드는 기운의 흐름이다. 인간의 삶은 이를 깨닫든 그렇지 못하든 존재 자체로 그 가치를 갖는 것이고 의미 있는 어떠한 절대가치의 발현인 것이다. 단지 나는 주어진 삶의 여정을 뚜벅거리며 걸어갈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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