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위해 잠시 멈추어 서다
인터넷 댓글이 난무하는 시대다. 자신의 생각을 마음대로 표현하고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표현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표현의 자유와 기회가 제공되는 환경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인터넷 세상의 익명성은 인간의 악마적 본성만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는 대중성의 한계를 인식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창을 만들며 산다. 나 역시 그러한 창을 만들었다. 우리는 삶 속에서 남을 비판하고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려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러나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가 있다. 남을 비판하기를 좋아하고 충고를 즐기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남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모습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결국 자신이 느끼고 경험한 사실만큼 남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모든 것에 답을 가지려는 경향이 강하다.
세상일은 분명한 답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답을 가지려 애를 쓴다. 그것은 그러한 삶이 비교적 쉬운 것이기도 하거니와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기도 쉽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일수록 자신만의 경험을 강조하게 된다. 이러한 모습은 다양성의 결여를 낳고 다른 사람을 포용할 수 없게 한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취하려 한다. 이러한 편향성을 가지게 되는 것은 모든 인간의 성향이지만 이러한 자신에 대한 자각이 없음에도 남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단순한 감정적 수준에 머물러 있게 한다.
인간의 악마성은 원초적인 감정의 이기심에서 비롯된다. 인간이 이성적 동물이라고 말하지만 스스로의 감정을 넘어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감정에 대한 만족감은 인간의 목표가 되어 자신의 삶을 지배 하고 있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 이성적 인간이란 삶의 노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인간이 생각한다는 것과 감정으로 대변되는 본능적 마음이 실체는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이 둘을 분리하여 선·악의 개념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내적 갈등의 이유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본질적으로 하나다. 분노에 찬 감정은 분노를 가지고 생각을 하게 한다. 욕망으로 몸부림치는 인간은 욕망을 가지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정당화하며 밤잠을 설치게 된다. 인간의 생각이 잡념과 사유로 구분되는 이유다. 인간이 만드는 자기합리화는 언제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는 나락으로 인도하고 있다. 인간의 사유는 자신의 감정을 객관화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욕망이 없는 인간은 생존할 수 없다. 인간의 정신적인 병적 상태는 인간의 욕망을 상실해버린 순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이러한 상태는 삶의 공허나 분노의 형태로 표출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가 순간적으로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고 또는 지속적인 상태를 유지하여 인간을 피폐하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법가의 사상적 토대가 된 순자의 성악설이나 모든 인간은 사회성을 결여한 이기적이며 평등한 존재라고 전제한 홉스는 “리바이어던”으로 대변되는 국가나 절대권력을 통한 사회 계약설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일견 이러한 생각은 인간의 욕망에 대한 부정적인 일면을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생각들이다.
홉스와 달리 로크는 인간 본연의 자연 상태를 다소 평화로운 상태로 묘사한다.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이며 본능적 사회성도 지니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자연권 중에서 사적 소유권을 가장 중요시하게 되어 생명과 자유, 재산에 대한 권리를 확고히 보장받기 위하여 모든 사람들이 사회 계약에 동의하여 정치 사회를 구성하게 된다고 말한다. 또한 루소는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평등하고, 자유를 누리며, 독립적인 삶을 영위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모든 불평등과 인간 소외 현상이 발생하게 되어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사회계약론”에서 민주적 자치를 통한 입법 과정과 이의 준수를 주장하였다. 사회 구성원이 모두 동등한 존재로 참여하여 ‘공공선’과 공공 정신이 형성될 수 있고 이를 가능케 하는 정치를 고대 그리스의 직접 민주 정치를 이상적인 것으로 바라보았다.
인간의 욕망은 결국 양면성을 동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의 이성과 감정 또한 동시하고 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믿음은 인간의 노력으로 발현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선한 의지에 대한 믿음과 인간의 악함을 강압하여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은 모든 인간의 개인의 삶에도 적용되는 문제이다. 또한 이를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되기를 바란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레고리 베이트슨이 있다. 그는 인류학, 정신의학, 인공두뇌학 등에 큰 영향을 미친 《마음의 생태학》이란 책을 내놓았다. 베이트슨은 현대 문명의 위기가 육체에서 마음을, 물질에서 정신을, 자연에서 인간을 분리한 데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근대 과학의 방법론에 비판을 가했다. 그는 물질에서 마음이 배제되지 않은 마음의 원래 자리를 회복한 새로운 인식론을 마련함으로써 기술지상주의 아래 황폐해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고, 물질의 세계와 마음의 세계를 재결합하고자 했다. 이것은 물질만능주의와 산업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의 생각이 스스로 그 속에 갇혀 있음을 깨닫고 이를 객관화하는 노력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베이트슨은 현대 문명의 모든 문제는 그것이 사람이든, 자연이든, 정치적 결정이든 그것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설정, 즉 이해와 소통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따라서 모든 것은 서로 관계되어 있고 소통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해답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이트슨이 제시하는 ‘마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즉 육체나 물질과 상대되는 개념으로서의 마음보다 훨씬 광의의 개념이다. 마음은 유기체들뿐만 아니라 살아 있지 않은 요소들도 포함할 수 있으며 반드시 육체에만 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육체 밖에도 존재하며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은 마음에 의해 아주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유기체가 아닌 그 이상을 포함하는 마음이라는 정신 시스템에 대한 강조는 과학을 뛰어넘어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메타패턴’을 발견하려는 작업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많은 삶의 경험을 축적하고 있다. 노화되는 육체의 변화에 기억이 퇴색되어짐을 느끼면서도 경험에 의한 판단이 옳다고 고집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이렇듯 나이가 든다는 것은 자신만의 아집이 강해진다는 사실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그것을 아집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겸손하게 자신을 조금만 돌이켜 보면 자신의 경험이 세상의 많은 것들과 비교하여 보잘 것 없는 작은 것이었음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이 삶의 모든 것을 경험한 듯이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모습도 삶의 한 단면이 되었다. 이러한 한계에서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 또한 개개인의 ‘정도의 문제’일 뿐이다.
어느 순간 자신의 인생이 무르익는다는 사실을 누구나 스스로 느낀다. 나에게 이러한 생각을 불현 듯 느끼게 한 것은 40대 중반쯤이었다. 지나온 세월에 후회도 하게 되지만 젊은 시절 몸부림쳤던 욕심들에 대한 회한도 함께하였다. 남들보다 공부를 잘하려했던 마음도 한낱 작은 지식에 불과했고 좋은 대학을 나온다는 사실이 지적 수준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란 생각도 알게 하였다.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음이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주변에 나를 드러내고 싶어 했던 자격지심이나 허영심도 덧없는 것이었음을 알게 한다. 어느덧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한 나름의 판단 기준이 분명하여지고 안개에 쌓인 듯 했던 세상도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세월은 살같이 지나갔다.
내가 지나간 젊은 날을 그리워하는 것은 후회 때문이 아니다. 지나간 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의 인생의 후회의 순간이 없지는 않았다. 그 순간에 주어진 다른 대처가 또 다른 결과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결과가 현실적으로 나를 보다 풍요롭게 할 수는 있었겠지만 나는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만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남을 배려하며 감정을 절제할 줄 알고 세상을 여유롭게 관조하며 존재의 가치를 깨닫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주어진 삶에 감사함을 알게 하였다. 내가 젊은 날을 그리워하는 이유는 의식이 자유로운 시절에 대한 의식의 흐름 같은 것이다.
사고의 자유는 육체가 자유로울 수 있는 환경과 연관되어진다. 그런 이유로 자유란 문제는 인간에게 중요한 문제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평등의 문제는 다른 사람이 자유를 함께할 수 있는 조건과 연결되어 있다. 인간이 스스로 창을 만들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필연이지만 그 창이 확장될 수 있는 개념은 자유로운 사유와 경험론적 의식의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바름을 위한 인간의 노력의 차원에서 접근하여야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자유주의의 발전은 인류문명의 산물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인간의 존재를 재인식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인간 상호 간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한 평등의 개념도 함께 발전하였다. 그것은 배려와 포용의 정신이었다. 곧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은 배려와 포용을 통해 다른 사람의 자유의 본질이 보장되는 환경을 말하는 것이다. 정치는 현실이다. 그러나 이상이 포기되어질 수는 없다. 순자의 성악설에 반하여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의 노력을 말하는 것이고 토마스 홉스의 인간의 악한 본성을 기반으로 한 사회계약론은 루소와 로크에 의해 인간의 본성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사회계약을 주장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의 발전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인류문명에서 가장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오랜 시간 인류의 대부분은 권력에 종속된 존재였다. 인간 사회가 존재하는 방식 안에 갇혀 있었으며 소수의 권력투쟁에 의해 인류는 존재하여 왔다.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나라와 나라 사이의 생존투쟁은 소수의 엘리트주의를 만들었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같이 대중을 다스리는 존재로 인식하게 한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든 사회주의든 대중의 합의가 긍정적인 인간의 본성에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역사적 소수 엘리트주의가 일반화하며 내재되어 확장되었다. 이러한 소수 엘리트주의 역시 평등해진 것이다. 자신의 창으로 세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마음에는 이러한 특권의식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다수의 이러한 특권의식은 대중민주주의의 폐단을 낳을 개연성을 충분히 갖게 된다. 그러므로 베이트슨이 말한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메타패턴’을 발견하려는 마음속에 자신의 창을 객관화해야 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수많은 철학자들의 말들에 답은 없다. 그들에게서 답을 얻기 보다는 그들의 사고의 과정을 배우는 것이고 그들의 삶의 치열한 노력을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 모든 것은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사유를 통해 스스로 존재의 가치를 찾으려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이 시대는 플라톤이 말한 철인정치의 시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미 현대 사회는 대중의 뜻이 보다 바른 방향을 향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변화하였다. 대중민주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고 이를 경계하기 위해서는 인간 스스로가 홀로 설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서로 자유의 본질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은 세상을 보다 따뜻하게 바라보고 서로가 공감할 수 있는 방향을 만들어가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자신이 고집하는 세상의 틀을 버릴 수 있어야 하고 보다 유연한 생각을 가지려는 개개인의 노력을 이 시대는 필요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