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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와우 Aug 25. 2022

젊은 시절에 보내는 그리운 편지

젊은 시절에 보내는 그리운 편지


 모든 사람은 지나온 자신의 젊은 시절을 그리워한다. 생각해 보면 20대에는 10대를 그리워했고 30대가 되어서는 20대를 그리워했다. 지금 이 순간 더 많은 시간을 흘려보내고 이후의 모든 시간들도 젊었던 모든 순간들과 함께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그리움이 후회로 가득 차 있었다면 이는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했던 후회도 지금의 인생에 소중한 거름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추억이 되어 아련함이 된다. 누구나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하는 그리움을 습관처럼 갖게 되는 것도 인생이다. 그러한 생각들이 반드시 후회하고 있는 것만이 아닌 것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본능적인 그리움으로 저 만큼 멀리 던져놓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에 외모가 어떤지를 먼지 살피게 마련이다. 보다 잘 보이고 싶어 했던 마음도 나이와 함께 주름져버린 자신의 얼굴에 아쉬움을 남긴다. 그러던 일상에서 문뜩 성형에 대한 욕심도 생긴다. 찬찬히 뜯어볼수록 그러한 욕망이 커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내 현실과 타협하고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본다. 그 순간 젊은 날 자신의 모습이 겹쳐지면 과거로의 여행도 다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거울 속 자신을 응시하며 사색에 빠지는 것도 하나의 습관이다. 또한 자신을 객관화하려는 노력이 될 수도 있다. 수많은 화가들은 자화상을 남겼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서 그들의 고뇌를 이해하려는 것도 그 하나이다. 거장이 남긴 자화상은 자신을 객관화하려는 그들의 삶의 의지를 담고자 하였다. 거울의 비친 모습 속에 자신의 삶의 의지가 무엇이고 자신이 보이려는 모습을 분명히 하는 것도 하나의 일상이 된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진지하기만 한 재미없는 경직될 수 있는 일상일 수도 있다. 그러한 이유로 유연함을 잊지 않으려 애를 쓰는 것도 삶의 노력이 되고 있다. 또한 인생의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 이러한 노력들을 정도의 문제로 받아들이려 하는 것도 의지이다. 또한 정도의 문제로 받아들이려 하는 의지는 자신의 객관화뿐만 아니라 남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방법이 되어주고 있다. 옳고 그름과 같은 이분법적 사고가 나를 변명하는 수단이 되지 않도록 경계하는 일이다.


 중용의 덕은 삶의 실천이 될 수 있다. 20대의 어느 날 이러한 개념이 막연하게나마 선의지의 하나가 되었고 오늘까지 나를 지탱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중용은 대학·논어·맹자와 더불어 유교의 중요한 경전이다. 유교에서 사서(四書)라 일컬은 것은 중국의 송나라 때 주희가 예기 49편 가운데 대학·중용을 떼어내어 논어·맹자와 함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중(中)이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지지 않으며, 지나침도 미치지 못함도 없는 것을 일컫는 것이고, 용(庸)이란 ‘떳떳함’을 뜻하는 것이라고 주희는 설명하였다. 혹자는 기울어지지 않는 것 ‘불편(不偏)’을 중이라 하고 바꾸어지지 않는 것 ‘불역(不易)’을 용이라 하였다. 사실 중화사상은 중용을 철학적으로 달리 말한 것이다. 이때의 중은 희로애락의 감정이 발로되기 이전의 순수한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마음이 발해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일컫는다. 이러한 중화를 이루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에 있게 되고 만물이 자라게 된다는 것이고 또한 우주 만물이 제 모습대로 운행되어 가는 것을 뜻한다. 중국이란 오래된 권위주의 정치세력이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국수주의로 오역하여 활용하여 왔고 오늘날의 현실을 바라보면 인간의 어리석은 역설적 상황은 여기서도 존재하고 있다.


 중용은 인식의 기준이 되고 실천의 방향이 된다. 사실 어떠한 면에서는 복잡한 철학적 사유만을 요구하는 개념은 아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달 탐사선인 ‘다누리’를 발사했다. 다누리 달 탐사선은 2022년 7월 5일 발사되어 지구·태양·달 등의 중력 특성을 이용하는 탄도형 전이방식(Ballistic Lunar Transfer)으로 궤도를 따라 달로 향한다. 탐사선의 비행시간이 4개월 이상이 걸리지만 연료 소모량이 25% 적게 든다는 장점 때문에 이러한 방식을 택했다. BLT괘도는 지구와 태양 사이에 형성된 두 천체의 중력이 균형을 이루는 지점인 라그랑주 포인트에 도달하고 지구로부터 약 156만 km를 돌아 지구와 달의 중력에 의해 끌려와서 달에 도착하게 된다. 중력의 평행상태인 라그랑주 포인트는 물리적 직관으로 알게 되는 중용에 대한 인식방법이 될 수도 있다.


 “과함도 덜함도 없다.” 인간의 삶 속에 요구하는 이러한 덕목은 실현이 가능한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어떠한 성직자나 위인도 이를 이루었다고 자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 속에 이러한 평형상태는 실재하는 것이고 인간의 삶 속에 주어진 영원한 도전인 것 또한 실재한다. 이렇듯 보이지도 않고 인식되기도 힘든 중용의 상태는 삶 속에서 다양성마저 보인다. 그러므로 그러한 고뇌는 당연한 것이고 아픔으로 상실된 자아를 위로할 수만 있어도 삶을 사랑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자아를 위로할 수 있는 삶은 중용의 덕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삶의 방식에 분명한 답은 없다. ‘정반합’을 기반으로 하는 변증법적 논리도 중용의 다양성을 말하고 있다는 시각은 그 예가 된다. 니체의 '초인'이나 '힘에의 의지', 칸트의 '정언명령' 역시 마찬가지다. 물리적 세계로 바라보면 우주는 수많은 다양성을 가진다. 그러나 우주의 복잡할 수 있는 현상이 단순할 수 있는 것도 복잡한 철학적 인식이 ‘하나’라는 통합적 사고를 향하여 나아간다는 사실도 그러한 평형상태를 향하고 있다. 다양성과 단순함이 동시하는 것. 이것이 세상의 질서이다.


 다원주의가 현대 민주사회의 가치로 자리 잡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원주의의 실현은 단순히 다른 문화의 이해와 수용에만 그치지 않는다.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그러한 가치가 적용된다. 배려와 관용은 중용의 덕을 실천하는 중요한 도덕적 가치이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고 겸양의 미덕이 그 바탕이 된다. 자신의 의지나 주장에 대한 겸양의 자세는 자신의 아집을 돌아보는 기본이 되어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는 자세를 갖게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를 객관화하는 작업이 될 수도 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 많은 삶의 선택지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 자신이 주장도 자신의 취향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겸양의 자세 중 하나이다. 중용, 정직, 자유, 인권, 평등, 공정 등과 같이 사실상 사회 정의를 분명하게 규정할 수 있는 개념이 많은 것도 아니지만 이러한 생각조차 현실적 접근에서의 자의적 판단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또 다른 혼란을 만든다.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다원주의의 가치는 적용되는 것이고 이에 대한 실천은 삶의 노력으로 귀결된다.


 그리운 날들 속에 젊은 날의 사랑은 항상 가장 먼저 다가오는 법이다. 나만의 경우만은 아닌 것 같다. 대부분 이러한 나의 마음에 공감하는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사랑의 추억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당연한 사실에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도 나의 삶이 되고 있다. 지나간 사랑의 추억을 돌아보는 것은 진실한 삶의 고백을 돌아보고 있는 것과 같다. 아니 그렇게 하려는 것이 옳은 것이다. 남녀의 사랑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치열한 투쟁과 같은 것이고 그러한 감성의 투쟁적 모습은 자기를 들어내는 거울과도 같은 것이었다.


 사랑의 추억은 극단적인 감정의 자기합리화를 알게 한 셈이다. 이러한 젊은 날의  모습이 사랑의 열정에만 한정된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나 구체적인 생활에 적용하면 끝임 없이 반복되어진 자기합리화를 통해 만들어진 자신을 발견한다. 이렇게 형성된 인간의 정체성이 자신을 지탱하는 힘의 원천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정신과학적인 측면에서 정신착란의 상태를 방어하는 중요한 생존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이지만 수단이 가치가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랑의 추억이 배려와 관용을 갖게 되고 자신을 객관화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면 자신의 치열했던 욕망과 그로 인한 상처들마저도 인간의 마음속에 따듯함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인생을 살며 자격지심을 느낀 적이 없었다고 생각하였다. 문뜩 ‘과연 그럴까?’하는 의구심이 들어 곰곰이 생각하여 본다. 나의 인생이 남들보다 우월하였다거나 남부러운 모습으로 살아온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간혹 느끼는 일이었지만 냉소적인 시각과 무시를 받는다는 느낌이 적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열등감이란 것도 나의 삶 속에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나의 삶 속에 중요했다고 생각하는 것과 스스로 자긍심을 갖고 있는 것은 그러한 열등감이 행동으로 나타나거나 나의 사고를 지배할 수 없음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자격지심을 느끼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나의 인생에서 나를 아프게 한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그래도 나는 화를 내지 않으려 애를 썼던 인생이다. 욕심을 가질수록 나를 상심케 하는 일이 그 크기만큼 다가오는 것이기에 불쑥 솟구치는 모든 종류의 욕망을 진정시키는 것도 일상이 되었다. 또한 무엇을 기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작은 것에 감사한다는 것도 반복되는 습관의 결과이고 인내의 결과이다. 나를 아프게 하는 다른 이에 대한 용서와 사과에 대한 고찰도 마찬가지다. 


 젊은 시절의 조급함은 누구에게나 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참 덧없었음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도 횡단보도에 서면 빨간불에 항상 조급함을 느낀다.  일상에서 불과 일이분의 시간도 기다림을 갖지 못하는 것들 중에 하나가 된다. 그래서일까? 멀리 않은 거리에서 파란불의 깜박거림을 무심히 바라보려 하는 것도 하나의 일상이 되고 있다. 나름 여유로운 인생이었음에도 보다 나아지고자 하는 나의 조급함이 결국 아무런 결과를 만들지 못한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현실에 치였던 인생도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게으름 때문이다. 남들과 치열한 경쟁을 하는 것도 싫었고 무엇을 얻기 위해 그에 따라 예상될 수 있는 작위적인 수고도 싫었다. 이제 그러한 게으름을 내려놓으려 하니 이미 게으름은 나 자신이 되어 있었다. 게으름도 삶의 여유를 가져야만 가질 수 있는 것이고 보면 이러한 게으름을 버린다는 것도 아쉬움을 남긴다. 


 나의 젊은 날을 생각하며 못 다한 것들을 차분히 채워보려 한다. 게으른 하루를 접는 것도 아쉬움을 남기는 일이지만 얼마 남지 않은 끝이 보이는 것 같은 주어진 인생을 바라보고 있다. 이제는 오히려 새롭게 하나하나를 채워나가는 것들이 마냥 즐거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한다!’ 이렇듯 거창할 수 있는 꿈이 일상에서 소박하게 피어날 수 있다는 사실도 의미 있는 일상이 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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