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본질에 대한 담론
우리사회만큼 교육이란 것에 진심인 곳도 드물다. 생각해보니 나 역시 가정교사를 두어 어린 시절에 일종의 선행학습을 경험하여서였는지 요즘 세태가 남다르지 않다. 당시의 특별할 수 있었던 수혜도 이제는 많이 보편화 되어 있는 셈이다. 가정교사의 도움을 받은 것은 중학교 2학년까지였다. 사실 그 당시에는 가정교사가 학교성적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독립적인 성향이 강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스스로 습득하는 학습적 성과를 선생님에 의해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일찍 알게 된 이유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받아쓰기나 구구단을 외우지 못해 낙제를 하고 학습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그건 끔찍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가정교사에 의한 선행학습이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린 나이에 스스로의 하루 스케줄을 관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지금도 한결같다. 세상 모든 것에 호기심이 많은 나이에 학습에 대한 집중력을 갖고 규칙적인 학습 환경을 스스로 만든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아버지의 경제사정이 나의 고집스런 자기 학습에 대한 자기결정을 지지한 것이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까지의 학습은 학교가 요구하는 학습의 범위를 어렵지 않게 뛰어넘었고 스스로도 훨씬 광범위한 깊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학입시가 학교 교육의 전부이다. 그리고 사실상 외형상으로도 배우는 이에게 방대한 범위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세상에 주어지는 방대한 지식과 이에 대한 인식의 범위들은 형식에 불과한 절차였다. 학습이란 삶 속에 필요에 의해 스스로 익히게 되는 것이고 학교 교육은 이를 지지하는 역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배움은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실용적인 기술교육이나 전문성의 기본을 갖기에도 적합하지 않다. 고등학교시절의 대학입시가 대학을 결정하고 직업을 결정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었고 또한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그 시절 짧은 기간의 학업의 범위란 것이 지금으로선 참 작은 것들이었고 집중하면 불과 1년 정도면 필요한 성적을 내기에 충분한 것들이다. 지식을 습득하였다기보다 필요한 문제에 익숙해지면 되는 일들이었던 것이다. 배움이란 본질에 앞서 당시의 학교교육은 남들에 앞선 정보와 필요한 선택의 문제였다. 그것은 지금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교육의 형식성은 세계적으로도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성공적인 결과를 낳았다. 거의 모든 국민이 교육의 혜택을 받았고 우수한 국가인재를 양성한다는 것에도 성공했다. 그러한 이유로 보수적인 교육정책이 공공연한 명분과 이유가 되는 것이고 이러한 교육적 환경만이 기술적으로 고도화하였다. 소수에 의해 이끌리는 현대의 사회적 구조는 많은 수의 기득권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필요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한 이유로 교육의 본질에 앞서 소수를 변별하는 방식은 아직도 현대사회에 유효한 수단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는 다양한 대중적 딜레마를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교육의 질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질적 개선은 보편적 교육 가치를 분명히 하고 그 목표를 제시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한 목표가 분명하지 못하면 이는 뜬구름 잡는 기회의 공정성만을 주장하게 되고 현재의 서열화 된 경쟁적 환경을 옹호하는 범위를 넘어서지 못한다. 앞서 설명하였듯 경쟁적 교육구조가 마냥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구조의 획일적인 무한경쟁에 내몰리는 교육현장이 문제가 되는 것이기에 이는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는 경쟁적 구조의 형성을 통해 극복되어야 한다. 다양한 경쟁적 구조의 형성은 다양한 교과과정을 통한 등수로 대변되는 상대적 변별을 지양하는데서 시작된다.
10%의 원칙이 있다. 하나의 집단에서 10%의 소수가 나머지 90%를 좌우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선의의 경우이든 부정적인 경우이든 인류 역사에 작용한 하나의 방식이었다. 민주주의 원칙이 다수의 의견을 기반으로 형성된다고 하지만 실재의 모습은 반드시 그러한 것만도 아니다. 결국 소수의 의도가 다수를 설득하거나 선동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소수의 집단은 그 사회의 기득권을 누리게 되고 다시 그 중에서도 다시 10%의 권력을 차지하는 것이 현실의 모습이다. 또한 거기에는 경제적 독점도 따라가게 되어 있다. 상위 1%의 경제력이 하위 50%를 압도하는 사회현상은 오랜 인류 역사부터 오늘까지 변하지 않는 사회구조의 실체이다. 그것을 계급이나 신분으로 말하든 계층구조라는 현대식 용어를 사용하든 본질적인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10%의 기득권은 누구에게나 직관에 의해 인식된다. 또한 이러한 현실은 결코 변할 수 없는 현실이란 묵인되어진 고정관념을 만들었다. 자유와 평등을 주장한 근대의 시민혁명이 소상공인에서 성장한 소수의 시민계급에 의해 성공하였지만 기존의 귀족세력과 타협하여 현대 유럽을 형성하고 있다. 미국의 발달된 자본주의 역시 독점자본에 기반을 둔 권력층을 새롭게 하며 민주주의 정치기반에 숨겨진 또 하나의 그림자가 되었다. 또한 평등사회를 주장한 사회주의 혁명 역시 프로레타리아 독재를 만들며 소수의 기득권을 강화하였다. 그러한 사회구조의 핵심 메카니즘으로 교육은 이용되어 왔던 것이다. 사실상 경제력이든 권력이든 절대기득권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상위 10%에 도전해야 한다면 현실은 확률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교육에 대한 인식이 경쟁을 통한 성취가 아닌 교육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인식의 전환이다.
우리사회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교육의 본질은 보편교육을 지향하고 있다. 보다 많은 사람이 교육의 혜택을 받고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필요한 정보와 방법을 제공받고 있다. 지나간 인류역사를 생각하면 최소한 명분이나 형식은 이를 발전시켜왔고 그 성과도 분명하다. 그러나 교육이 서열화하고 개개인의 우수성을 분별해야 한다는 방식이 사회에 필요한 인재를 육성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인식은 제도의 함정이다. 한정된 지식을 정량화하고 이를 통해 점수를 매겨 아이들에게 보다 우수하거나 그렇지 못하다는 우열의식을 심어주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보편교육의 실현은 다양성의 실현에 있다. 그리고 이는 실용주의적 교육을 실현하는 것이다. 배우는 이에게 선택의 범위를 주어 스스로 좋아하고 배움의 즐거움이 가능한 교육과정이 실현되어야 한다. 어려운 수학이나 과학을 모두에게 강요하여 이를 변별력의 수단으로 사용할 필요는 없다. 세상에 필요한 지식과 기능은 광범위한 것이고 이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학교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최소한의 소양교육이 이루어지고 다양한 교과과정이 도입과 방대해진 사교육 기관과의 연대적 구조도 만들어져야 한다. 최소한의 소양교육이란 지식습득의 필요와 특화되고 다양한 교육과정에 접근이 가능한 범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의 교육환경에서 학부모의 현명한 선택은 쉽지 않다. 하나의 사회에서 자신만의 특별한 선택이 불이익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심리적 현상이 이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신의 자녀가 다수인 90%에 속해 있다는 사실에 있으며 이러한 소모적 교육환경 속에 내몰려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자녀가 경쟁에서 뒤쳐지면 낙오된다는 심리적 불안감이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심리적 불안감은 부모의 욕심을 만들고 있다.
부모나 학생 스스로 경쟁적 구조로부터 탈피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교육정책에 의해 정부가 혁신적인 구조적 변화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지만 개인에게 있어 그러한 탈출구가 전혀 없지는 않다. 현재의 교육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한다면 현명한 교육적 선택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재능과 좋아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할 수 있는 부모의 배려가 교육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현대 사회는 다양한 분야의 발전을 요구하고 있고 그 선택의 폭은 충분히 넓혀지고 있다. 정형화된 교육의 결과만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현재와 미래사회가 전 세대의 고정된 의식 수준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을 부모세대는 인지하여야 한다. 이에 필요한 인력에 그 다양성이 요구되어 학교교육의 중심이 되는 것은 우리사회의 미래 모습임은 분명하다.
우리의 정치권력이 사회 변화에 뒤쳐져 있듯 교육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상 현재의 교육적 구조가 다수의 요구에 의한 것이기에 정부가 이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다수의 국민의 교육환경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요구의 변화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요구가 사회적 요구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근본적인 인식 전환이 있어야 한다. 또한 적극적인 변화를 필요로 한다. 사실 현재의 사교육 시장은 광범위하여 학교의 성적에 맞추지 않는다면 오히려 학부모와 학생의 선택의 폭은 넓다. 유명 상위 대학을 대상으로 한 입시교육을 포기한다면 보다 쉬운 선택이 될 수 있다. 사실상 유명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수는 한정된 것이고 지금의 교육제도 아래서 경쟁할 만큼의 능력이 되는 학생도 이미 정해진 셈이다. 또한 상위 10%의 유명대학을 제외하면 단순히 대학에 진학한다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학령인구 대비 120%가 대학에 다닌다는 국가통계 수치만으로도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근거 없는 부모들의 욕심과 사회기득권에서 비롯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