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친구 아버님의 부음을 들었다. 오래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 분이시다. 요즘 아버지 세대의 분들이 돌아가시는 소식을 자주 듣게 되지만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지만 가까운 이들의 사라짐이 나의 마음을 여전히 흔들고 있다는 사실은 애써 담담함만을 키우고 있다. 그리고 죽음이 항상 내 곁에 가까이 있음도 느낀다.
인생에서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들은 많다. 그러나 이를 깊게 생각한다는 것은 자살을 결심하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 만큼 삶에 대하여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말하는 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죽음의 이야기들을 흘려보낼 수 있어야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아픔의 순간을 부여잡고 있으면 병이 되는 것과 같다. 때로는 지독한 이기적인 삶이 그러한 함정에 빠지지 않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그러한 이유로 이기적인 자신의 모습을 변명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인간에게 있어 예정된 죽음에 대한 인식은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 젊음의 대한 열정도 죽음이 아득하게 느껴지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죽음을 초월한 열정적인 삶이 가능하다면 이 또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한 열정은 삶의 과정에 대한 충실함이 되어야 한다. 부딪치고 깨어지며 삶의 갈등을 만드는 자기 합리화가 아니라면 충분히 그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정된 삶을 산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은 이러한 열정에 앞서 인간에게 겸손함과 관용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사랑의 방식에 대한 얘기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사랑으로 비약되었다고 뜬금없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찬찬히 생각해보면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사라지고 난 다음 세상의 모습이 소멸하더라도 자신과는 상관없다 말하는 이들이 있다.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보는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한순간일 뿐 모든 사람은 자신을 있게 한 선대를 그리워하고 후대를 염려하는 것이 본성이다. 후대가 나를 이어간다는 소망이 존재하고 있다. 인간의 삶에 대한 사랑은 거기에서 시작된다. 예정된 나의 사라짐이 삶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내가 죽음이 익숙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30세를 전후한 젊은 시절에 겪게 된 아버지와 아내의 죽음에서 기인된 것이었다. 그 순간의 감정이 참으로 오랫동안 각인된 이유이다. 그것은 나도 어쩔 수가 없는 것이 되었다. 그것도 인간의 한계라 생각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면 지나가는 주마등과 같은 것이다. 그래도 주변에서 들려오는 사라짐의 소식은 솟구치는 감정이 오버랩 되며 순간의 나를 감싸지만 스쳐 지나는 물길을 열어놓듯 흘려 보내버리면 그만이다. 그럼에도 지금 이순간도 죽음에 익숙해질 수는 없다.
“진실한 나의 노력을 다하더라도 삶에 당위성을 주지 않는다.” 젊은 날, 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자살을 결심한 순간이 있었다. ‘간절한 소망은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 ‘사람은 정직해야 하고 진실에 눈을 감으면 안 된다.’ ‘다른 사람을 위한 자기희생은 그 보답을 반드시 받는다.’ 등과 같은 것들에 대한 믿음의 상실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의 죽음에 대한 결심 외에 나의 인생에서 ‘죽고 싶다!’는 감정에 나를 방치하며 그 함정에 휩싸인 적은 없었다. 나의 의지로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닌 것처럼 사라짐 역시 이미 예정된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삶을 마감한다는 것과 삶의 수명이 조금 연장된다는 차이가 큰 것이 아니란 자각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생각하기에 따른 ‘조금’이라는 시간의 차이에 대한 인식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 더 분명해진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죽음을 전제하여 행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인간의 삶의 방식 그 자체이다. 나에게 죽음이 닥쳐온다는 것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삶에 충실하다는 것은 생존의 문제를 뛰어넘는다. 죽음의 본질을 이해하면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강조한 사람이 있다. 예일대의 철학 교수이자 철학자인 셀리 케이건이다. 그의 저서 ‘죽음은 무엇인가’에서 죽음 또는 죽음이라고 하는 현상에 관한 심리학적·사회학적 질문들에 대해 말한다. 가령 죽음에 관한 책들 대부분은 ‘죽음에 도달하는’ 과정이나 ‘인간은 모두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이야기를 다루지는 않는다.
그는 죽음의 본질에 대해 생각할 때 떠오르는 철학적인 질문들을 다룬다. 가령 “죽고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와 같은 질문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끌어내기 위해 먼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져볼 것이다.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인간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영혼이란 게 정말로 존재하는가?” 여기서 말하는 영혼이란 정신적 존재, 즉 육체와는 완전히 다른 별개의 존재를 의미한다. 이런 영혼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비물질적인 영혼 즉 육체적 죽음 이후에도 살아남을 그런 존재를 갖고 있는가? 만약 영혼이 없다면 이는 죽음의 본질과 관련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하는 것들에 대한 철학적 사고이다. 많은 철학자들의 이러한 사유의 결과는 항상 가치 있는 삶에 대한 주장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한다. 사회가 고도화되면 될수록 자살의 비중은 연령에 상관없이 높아지고 있다. 많은 이유로 자살을 선택하는 사회적 현상 속에 이를 지나치게 병적 현상으로 단순화하여 판단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인간의 모든 죽음은 존중되어야 하고 그에 대한 판단을 함부로 하는 것도 죽음에 대한 예의는 아닐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자살론’을 통해 ‘자살은 주체적인 인간의 선택’이라 역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것은 인간의 자살을 미화하고자 함이 아니라 죽음조차도 신의 선택이 아닌 인간의 주체적인 선택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역점을 두었다.
자살의 이유가 삶이 고난하고 힘들기 때문만은 아니다. 죽음을 안타까움으로 바라보는 것이 나와 다른 선택을 위해 떠난 것에 대해 아쉬움을 남기는 것이지만 그것이 폄훼될 이유는 없다. 그리고 그러한 안타까운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인간다움이다. 고도화 된 사회의 각박한 환경에서 병적인 상태에 빠지게 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 또한 삶의 의무가 되어야 한다.
죽음의 역설은 삶이다. 삶에 충실해야 하는 이유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해 의연할 수 있다는 말은 결국 삶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삶의 대한 사랑은 곧 죽음에 대한 사랑이 된다. 이는 곧 삶이 고귀한 죽음의 여정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이다. ‘고귀한 죽음을 향한 삶의 여정!’ 이것이 근거 없는 관념적 사고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고귀한 죽음’이라는 개념이 삶의 소망이 되는 것은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의연하게 변화시키는 이유가 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죽음을 유예하며 살고 있는 셈이다.
영혼의 존재 여부는 직관의 세계다.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양자역학의 세계와 그 맥을 같이 한다. 아직도 양자역학의 이론적 실체가 존재하느냐 아니냐의 싸움은 계속되는 것이지만 이미 인간은 이러한 현상을 실용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양자역학의 핵심은 인간이 규명할 수 있는 물리적 현상이 전혀 다를 수 있는 역설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생각해 보면 누구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원자의 구조도 결국은 직관으로 규명된 것이고 보면 미시의 세계란 것도 우주만큼이나 규명되기 어려운 무한한 그 무엇을 동시에 갖고 있는 셈이다. 광활한 우주의 신비를 연구하는 인간에게 지구에 있는 땅 속이나 바다 속이 여전히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다는 사실과 다르지 않다.
영혼을 믿는 것은 인간의 존재에 대한 확장성에 있다. 죽음이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관념이다. 누구도 이를 함부로 규명할 수는 없다. 영혼의 존재를 믿는 것이 현상적인 지금의 삶의 방식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단순히 다시 태어나 다른 삶을 산다는 환생의 방식만을 말하고 있지 않는다는 말이다. 빛의 속도를 넘어서면 시간을 거슬러 새로운 세계가 존재한다는 이론이나 지금의 세상을 복제한 또 다른 세계가 동시한다는 생각 등, 이러한 직관적 세계의 물리학적 이론 역시 물리적 세계의 직관적 동시성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보면 단순히 인간이 꿈을 꾼다는 것이 물리적 뇌의 활동으로만 규명될 수도 없는 일이다.
영혼의 존재 여부에 대한 확신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삶과 죽음의 의미를 규명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영혼이나 우리가 모르는 세상의 모습이 삶에 투영되어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우리가 신비주의에 삶을 맡길 이유는 없다. 내가 살아간다는 사실과 분명한 연결고리를 갖고 있는 것일지라도 삶에 충실해야 한다는 사실에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삶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 남을 의식하거나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잘 산다’는 일반적인 시각만을 말하는 것만도 아니다. ‘삶을 산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삶의 의미는 충분한 것이다.
우리가 삶을 대하는 충실함은 죽음에 대한 의연함에서 나온다. 인간의 예정된 죽음을 생각한다면 삶이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욕망으로 삶을 채우려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결국 죽음에 대한 의연함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사랑’이라는 인간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 것이고 인간의 현실적인 고뇌는 이러한 ‘사랑의 확장’이 되어야 한다. ‘사람이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인식도 단순한 인간의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삶은 나와 접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려 하고 이해의 마음으로 먼저 다가가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