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는 것은 즐거운 작업일 수 있다. 어린 시절 그림일기로 시작한 글쓰기가 학교숙제가 되어 어린 마음을 짓눌렀던 생각을 하면 격세지감이다. 돌이켜보면 나의 글쓰기는 나의 감성이 풍만하여지는 성장과정에서 강열한 표현의 욕구가 자연스레 인도한 것이었다. 그 시절에는 문학소녀의 감성과 같은 오랜 시간 이어온 문학적 토대가 자리하고 있었고 얼굴모를 이들과 손 편지를 주고받는 펜팔이란 것도 있었다. 그때는 좋아하는 친구에게 간지러운 우정의 편지를 쓰게 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가족 간의 안부도 편지로 전하곤 하였다. 지금은 인터넷과 핸드폰이 발달하며 이러한 아날로그적인 낭만들은 지나간 추억으로 묻혀버렸다.
글을 쓴다는 것이 즐거운 작업이 되는 이유가 있다. 가지런히 놓이는 삶의 모습에 담담한 미소를 머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각난 생각의 파편을 끌어 모아 펼쳐놓을 수 있음은 나에게 주어진 행운이다. 예전에는 글을 쓰는 작업이 어려움을 갖게 되는 것이 학습의 하나로 인식된 이유이기도 하였다. 물론 이 또한 시간을 통한 반복된 훈련과 습득이 필요한 작업이기는 하였지만 나는 어느 순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덩어리들을 내뱉듯이 쏟아낸 것들이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삶에 필요한 나를 객관화하는 작업에 중요한 도구가 되어준 것이다.
나는 문학을 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의미와 가치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문학이 예술적 차원으로 접근할 수 있는 이유는 객관화된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감정의 순화를 통하여 승화의 과정을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감정과 생각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과정을 경험할 수도 있었다. 소설을 통해 삶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작업이나 자신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작업도 또는 인문학적 어려운 문제를 풀어나가는 논문조차도 인간이 느끼는 원초적인 감정을 배제시킬 수는 없다. 이 모든 것이 삶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유희를 주고자 하는 산문이나 운문으로 구성되어진다. 이러한 작품 속에서 쓰인 문학 기법의 발달 과정도 함께 포함되고 있다. 모든 글들이 문학으로 여겨지는 것은 아니다. 데이터 모음 등의 몇몇 기록 내용들은 문학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이고 문학의 역사는 문화사, 예술사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사회는 문학을 상당히 중요시 했다. 고전 문학의 대표적인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딧세이 뿐만 아니라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을 글의 형태로 바꿔 표현한 플라톤의 대화편에서의 철학은 문학 영역에 발을 딛고 있다. 플라톤의 제자이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 비평의 첫 기준을 확립하였다는 <시학>을 쓰기도 하였다. 인도의 〈라마야나〉와 〈바가바드 기타〉를 포함하고 있는 〈마하바라타〉는 인도의 기원 전부터 전승되어져온 종교·문화의 철학적 토대 위에 대 서사시를 남기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젊은 시절 늦은 대학공부를 하면서 프랑스문학개론을 접했다. 어떤 종류이든 개론서를 접하는 것은 지적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에는 충분한 것이다. 그 시절에 그러한 개론서등에 낯설어하지 않았던 호기도 내게는 행운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러한 개론서를 집필하는 사람들의 수고에 경의를 표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당시 나는 로마의 변방인 갈리아 지방에서 통속 라틴어의 형태에서 바뀌어 오늘날의 프랑스어가 되고 프랑스문학은 중세 이래 유럽의 지적 생활에 있어 특별한 지위를 누렸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프랑스 문학사의 발전은 세계사에 있어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17세기의 고전주의 문학의 선구자였던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자기 자신을 그리려고 했다. 그것은 지혜를 추구하는 인간의 일기였다. 그는 거기에 허물 없는 잡담투로 아무런 계획도 없이 완전한 하나의 행복 철학을 진술해놓았다. 이성을 진리의 최고 심판자로 간주함으로써 합리주의의 기초를 세운 르네 데카르트, 인간 본질과 신앙에 관한 심오한 철학적 고찰로서 사람들의 정신에 깊은 영향을 미친 〈명상록 Pensées〉의 저자 블레즈 파스칼, 계몽시대 최초의 위대한 철학자 몽테스키외, 철학적 소설에서 사회의 불의, 형이상학적 낙관주의, 정치의 부패 등을 고발한 볼테르, 자연은 선하나 문명은 그것을 타락시켰다고 주장하며 또 〈인간 불평등기원론 Discours sur l'origine de l'inégalité〉에서 불평등의 기원인 사유재산제도에 기초를 둔 현대 사회 질서의 부정을 고발했고 〈사회계약론 Le Contrat social〉을 통해 인권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낳게 했던 장자크 루소, 개인적인 것에서 정치적·사회적·도덕적·철학적인 것으로 옮아가고 예언자적 모습을 갖는 프랑스 낭만주의의 대표적 인물 빅토르 위고, 19세기의 감수성을 가진 18세기적 합리주의자 스탕달, 〈실증철학 강의 Cours de philosophie positive〉가 낳은 실증주의가 거의 하나의 새로운 종교가 된 오귀스트 콩트, 예술에 새로운 전율을 가져다준 〈악의 꽃 Les Fleurs du mal〉을 통해 자기 생애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담은 샤를 보들레르, 시인·사상가로서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는 한편의 방대한 산문 서사시인 〈레 미제라블 Les Misérables〉의 저자 빅토르 위고, 매춘부를 등장시켜 당대의 풍속을 정확히 묘사하면서 도덕적인 주장을 내포한 〈춘희 La Dame aux camélias〉의 저자이며 사실주의 극작가 알렉산더 뒤마, 소설가와 실험 과학자의 방법이 동일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연주의 이론을 전개한 에밀 졸라, 자연주의 작가로서는 특이하게 객관적이면서도 전혀 몰개성적이 아닌 작품을 만든 알퐁스 도데 등이 프랑스 문학사를 빛내고 있다.
프랑스 문학은 장 폴 사르트르의 유물론적 실존주의 철학이 1·2차에 걸친 세계대전 전후 세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보리스 비앙의 〈세월의 거품 L'Ecume des jours〉은 환멸을 느낀 그들의 모습과 사르트르 숭배를 그려내고 있다. 사르트르의 소설 세계는 무기력과 메스꺼움, 구토의 세계이다〈구토 La Nausée〉. 알베르 카뮈의 작품 〈이방인 L'Étranger〉은 초기 사르트르의 세계인 부조리를 나타내고 있다. 19세기말의 과학 만능주의는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철학에서도 후퇴했다. 이후 비평 정신은 20세기 고유의 특징이 되었다.
나는 앞에서 한 나라의 문학사를 장황하게 기술한 이유가 있다. 현대 프랑스는 ‘똘레랑스’로 대변되는 관용의 정신과 다원주의를 정치사회이념으로 하고 있다. 나는 프랑스사회를 동경할 만큼 성숙한 사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프랑스가 격고 있는 이민자 문제와 사회갈등이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과 이로 인해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고 인종갈등이 심화되고 있음은 필연적인 역사의 도전이다. 악랄했던 제국주의의 파편을 맞고 있는 것이며 귀족주의의 형식적 허물을 벗고 있는 과정일 따름이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하는 이념이 ‘보다 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말하고 싶다. 그러한 방향성이 갖는 그들의 예술 지향적 삶의 모습에 인류 보편성의 실현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이 글을 쓰는 자세가 나아가야할 방향성 역시 제시되고 있다. 거기에는 ‘노블리스 오블리쥬’의 허상도 함께하고 있다. 이는 형식이 아닌 실천의 문제로 귀결될 수 있다.
프랑스 문학의 위대함은 예술에 의한 통합성에 있다. 사회의 모든 현상을 예술을 통해 인식하고 인간의 감정을 펼쳐놓았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들은 객관화되어 예술로 승화되었다.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들이 문학예술 속에서 함축되어 통합되고 이를 감정의 순화를 통해 인식되는 과정은 나 자신에게 있어서도 예술을 접하는 방식에 의미를 부여하는 계기가 된다. 감정의 표현만으로 예술이 되지는 않는다. 예술은 감정의 승화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고 이러한 감정의 승화는 개인의 의지에 달려 있다.
예술이 특별히 고급스러운 형식으로 만들어질 필요도 없다. 어린 손자의 모습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작은 사랑이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통해 미소를 지을 수 있다면 이것도 예술이다. 예술은 표현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접하는 개인의 의지에 예술성이 존재한다. 유희의 본질은 ‘즐거움’에 있는 것이고 본질적 즐거움은 ‘존재의 기쁨’을 스스로 터득하는 과정을 만든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발현되는 격렬한 표현행위가 예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보편적 정서로 승화되어 공감하는 과정들이 예술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주관적이 아닌 객관성을 가지고 있다.그리고 이를 받아들이는 개별성도 포함되는 것이다. 감정의 승화는 불합리, 분노, 비애, 좌절, 공허함 등과 같은 인간이 살아가며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모든 처절한 감정들조차 필요함을 알게 한다.
책을 읽고 있으면 나의 생각들도 글로 옮기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사유의 끝을 잡고 그러한 흐름 속에 글을 쓰고 있으면 문장은 어느덧 장문이 되어 있다. 장황한 자신의 말에 빠져 두서없이 이야기를 이어가는 자신을 누구나 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장황해진 나의 글은 의식의 흐름을 타고 정처 없이 산으로 가기도 하였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졌다고 한다. 글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 나는 내가 써내려가는 글들이 어느 누구에게는 예술로 받아들여지기를 소망한다.
나는 나의 글쓰기의 과정이 누구에 의해 평가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이 많은 지구상의 사람들 중에서 나의 고뇌의 흔적에 그래도 한사람은 공감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을 객관화하려는 노력의 결과들이고 뒤엉키는 ‘삶의 자욱’을 곧게 펼쳐보려는 삶의 의지이다. 그리고 나의 삶에 대한 생각과 감정들이 보편성에 이르기 위해 나름 애를 쓰는 과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