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에 대한
비틀기

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by 와와우

절망이 지나간 공허 속에 새롭게

피어난 것들


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

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去 然)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에 대한 비틀기


삶의 경험은 누구나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고정관념을 만든다. 하나의 사회가 존속하기 위한 사회규범 역시 이러한 고정관념을 만드는 중요한 이유가 되어왔다. 모든 사회는 시대와 나라를 막론하고 진보와 보수, 개혁과 수구는 하나의 메카니즘을 이루며 점진적 발전을 추구하고 있다. 개인의 역사에 있어서도 이러한 발전적 메카니즘은 존재한다. 익숙함에 멈춰 있고자 하는 본능적인 모습과 변화하는 환경에 적극적으로 적응하려는 의욕은 그 크기만큼 개인의 성향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남녀평등이 화두가 되는 시절에 살고 있다. 이제는 획일적이고 형식적인 남녀평등의 개념을 넘어서고자 양성평등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현대사회에서 남녀가 평등해야 한다는 가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남녀의 차이를 구분하여 능력을 폄훼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존재한다. 이러한 이유는 남녀의 근본적인 생물학적 차이와 현대사회가 공존해야 하는 사회적 역할이 혼용되어 인식되고 있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는 연령이나 인종 그 밖의 물리적인 이유로 사람을 구분하여 사회적 역할에 차이를 부여하려는 의도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는 다름을 말하고 있으나 남녀의 차이를 만드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다름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해와 포용이 수단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철학적 사유의 기본이지만 다름이 차이를 만들고 특히 개인의 감정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은 경계되어야 한다. 삼강오륜에서 말하는 ‘부부유별’이란 말은 우리의 실상에서 흔히 인용되는 문구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남녀유별’로 의미가 확장되어 우리사회에 뿌리 깊은 남녀차별의식을 만들었다. ‘부부유별’은 중국 전한시대 동중서가 공맹의 교리에 입각하여 ‘삼강오상설’을 논한 데서 유래되었으며, 인간사회의 기본적인 관계를 수직적인 관계로 정한 것으로서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과거 오랫동안 사회의 기본적 윤리로 존중되어 온 윤리 도덕이다.


기원전 공맹시대의 유교사상이 남녀의 사회적 차이와 역할을 구분하려 한 사실은 없다. ‘부부유별’은 개인적인 성적 기본 도덕윤리를 말하는 것이었고 모계성이 강했던 당시의 사회 환경을 고려하면 남녀의 사회적 차이를 규정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조선의 성리학이 남녀를 구별하여 차별한 것은 사회를 왜곡한 과오를 범한 것이다. 위대한 조선 성리학의 철학적 성과를 폄훼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결국 예외 없이 철학을 받아들이는 정치적 이유가 갖는 인간의 작위성이 작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격고 있는 페미니즘의 논란도 이러한 시각에서 바라봄이 옳을 것이다. 남녀의 차이를 기준으로 사회현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천부인권을 가진 동일한 인간으로서 ‘기회의 평등’에 기여해야 한다. ‘기회의 평등’ 역시 한번쯤은 비틀어 생각해볼 여지는 있는 것이지만 인간 모두가 평등한 조건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개인의 삶에 포기될 수 없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


인류는 발전하여 왔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수천 년 전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우리보다 못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인류의 역사는 수백만 년을 이어져 오고 있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채 몇 천 년도 되지 않는다. 인류의 물질문명은 분명하게 발전된 것이었지만 보편적 인간의 삶의 조건이 나아졌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철학자들 중에는 원초의 인류에 대한 이상적인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있다. 초기인류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에서 서로를 배려하며 살았다는 가설이다. 그러한 생각은 옳은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이 집단화한 것은 인류의 시작부터이고 농경문화나 목축을 집단화한 것 역시 구석기시대까지 올라간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반구대 암각화에서 배를 타고 집단으로 고래를 사냥하는 모습이 있다. 신석기 시대의 암각화로 추정되지만 그들의 사회는 생각보다 훨씬 발달된 사회·경제 체제를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의 풍족한 자연환경과 인구는 서로 싸울 이유가 없었을 것이고 외부환경으로부터의 공동의 대처는 배려의 정신을 낳았을 여지가 충분하다. 제주도 해녀문화의 공동체 의식 속에는 공동채집과 분배, 늙은 해녀에 대한 배려가 아직도 존재하고 있음은 이를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인간의 일탈은 그러한 사회에도 존재했을 것이다. 인간의 일탈이 세력화하고 역사시대를 만들고 현대에 이르게 되었다면 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에서 ‘랍스터’하면 고급 요리의 대명사로 불린다. 그러나 한때 미국에서는 빈민가의 어린아이, 하인, 죄수들이나 먹는 흔한 싸구려로 취급받는 음식이었다. 랍스터 등의 갑각류는 바다의 곤충이라고 불릴 정도로 벌레를 닮았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랍스터 주 산지로 알려진 매사추세츠 주에서는 1700년대에 특별한 법이 있었는데 바로 감옥에 갇힌 죄수들에게 랍스터 제공 횟수를 제한하는 법이었다. 징그럽게 생긴 랍스터를 제공하는 당시의 음식이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렇듯 인간의 가치에 대한 인식은 극히 단순한 것일 수도 있고 유동적인 것이다.


요즘 ‘지속가능한 목표’라는 표현을 유행처럼 쓰고 있다. 지속가능 발전 목표-SDGs(Sustainable Development Goals)는 2016년부터 2030년 까지 새로 시행되는 유엔과 국제사회의 최대 공동목표다. 인류의 보편적 문제(빈곤, 질병, 교육, 성평등, 난민, 분쟁 등)와 지구 환경문제(기후변화, 에너지, 환경오염, 물, 생물다양성 등), 경제 사회문제(기술, 주거, 노사, 고용, 생산 소비, 사회구조, 법, 대내외 경제)를 2030년까지 17가지 주 목표와 169개 세부목표로 해결하고자 이행하는 국제사회의 공동목표다. 그러나 나는 ‘지속가능한 목표’를 ‘목표로서의 지속가능성’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그것은 인간이 완성할 수는 없지만 포기될 수 없는 목표를 말하고 있다.


사람은 많이 경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부정할 수 없지만 인간의 경험은 인간의 인식의 범위를 경험의 틀 안에 스스로 갇히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착한 사람은 반드시 복을 받는다고 말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사람이 조금은 악할 필요가 있다고 스스로를 변명한다.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절대적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도 부모와 가족의 복수가 이해된다는 듯이 이를 미화하는 영화나 드라마가 난무하는 사회를 살고 있지만 복수의 감정으로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삶보다 용서를 택하라고 경고하기도 한다. 인간이 완성할 수는 없지만 포기될 수 없는 목표를 만드는 것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한 비틀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회교국가 등에서 일부다처제는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남녀가 평생 한 사람만을 선택하여 결혼하고 중요한 법률적 행위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일부 사회에서는 일처다부제가 존재하기도 한다. 티베트에서는 형제일처혼이 있다. 형제 여러 명이 한 사람을 아내로 맞는 경우이다. 과거부터 장남이 결혼하면 그 집 형제 모두가 동시에 결혼하는 것인데 형제 이외의 다른 남자가 함께하는 경우는 남자 사이에는 의형제의 관계가 성립된다. 인도의 남부 고지대의 원주민인 토다족의 경우도 일처다부제이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는 지참금과 같은 부담뿐만 아니라 가족을 부양하는 경제활동의 효율적인 측면이 근본적인 이유가 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성생활과 자녀에 대한 권리가 방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이 상호간에 이해되고 시기심에 대한 감정의 절제가 통제되는 문화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말레이시아 출신의 응유쾅 중국 푸단대학 경제학교수는 중국의 심각한 성비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일처다부제를 법적으로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녀의 성비가 117 대 100으로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어 2020년에는 35세에서 59세 사이 약 1,500만 명의 중국 남성들이 결혼상대를 찾지 못할 것이고 2050년까지 그 수가 거의 3천만 명이 될 것으로 추산했다.


옳다거나 그 크기가 크다고 생각되는 인생의 모든 가치는 한번쯤 비틀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비판의식은 개인에게 있어서도 창조적인 상태를 유지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함정에 빠지는 오류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 자신을 들어내기 위해 상대를 부정하는 것도 바른 것은 아니고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는 편협한 수단으로 논리를 만드는 작업도 바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답을 구하고자 한다. 자연의 섭리, 정의, 진리, 신의명령, 우주적 질서 등 관념적 세계의 절대성은 존재하는 것이지만 인간은 결코 다가갈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인간은 결국 존재의 현재성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생존의 가치 그 자체를 인정하는 모든 의지와 실천이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결국 당연함이란 인간의 지속적인 노력의 결과를 전제하고 있다. 인간이 그 답을 확정지을 수 없는 것처럼 당연함이란 삶의 답이 될 수 없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더라도 인간이 원하는 어떠한 것도 마땅히 주어져야 하는 당위성은 없다. 절대성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현실에 주어진 상황에서 ‘보다 바름’에 대한 인식이고 삶의 노력을 통해 밝음과 맑음을 향해가는 과정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인생은 허무한 것이 될까? 자신의 가슴에 욕심을 가득 채우고 자신의 쾌락과 만족만을 추구하는 인간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사실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으로 만족하려 노력한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끝을 보고 싶다는 것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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