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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처럼 Mar 13. 2022

아직도 연필 중

연필이 좋은데...

샤프로 바꿔 주세요. 고1 아이가 중3 때, 수학 선생님의 말이다. 수학시험을 봤는데 시간 안에 다 못 풀었다. 왜 못 풀었는지를 수학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여러 이유들 중 하나가 연필이었다. 아이가 수학 문제를 푸는데 연필로 꾹꾹 눌러쓰다 보니 부드럽게 써지는 샤프보다 시간이 더 걸린단다. 아이 문제집을 빨간색으로 채점을 할 때, 연필로 정갈하게 풀어놓은 문제들을 보면서 뿌듯한 마음이 들었는데, 그것이 시험에 방해가 될 줄은 몰랐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수업 시간에 연필이 필요했는데, 필통에 연필이 있는 학생은 단 한 명, 샤프 안 쓰는 우리 집 아이였다. 대여섯 자루를 가지고 있던 터라 잘 썼단다. 그래도 샤프 안 쓰고 연필을 꾸준히 쓰는 아이가 고마웠는데, 그게 발목을 잡을 줄 몰랐다.


처음 아이를 위해 연필을 사면서 연필깎이는 사지 않았다. 칼로 깎아주는 연필을 쓰게 하고 싶어서였다. 다행히 아이들 아빠도 연필을 깎을 줄 알았다. 심이 뭉뚱 해진 연필을 죄다 모아 주면 틈틈이 깎아서 기분 좋게 내놓았다.


3년 터울이 지는 둘째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는 연필깎이를 보고 신기해했다. 한동안 필통을 못 만지게 했다. 엄마는 네 연필 깎는 재미로 산다고 말하면, 저는요 연필깎이가 좋아요 한다. 내 눈에는 칼로 깎여 6 각형, 둥근 형태가 그대로 드러나는 연필이 더 날씬하고 개성이 드러나 보이는데, 아이는 그렇지 않단다. 심의 길이가 똑같은, 연필깎이로 깎은 연필이 더 쓰기 편하단다.


몽당연필과 관련된 책을 북 큐레이션 할 때는 집에 있는 몽당연필을 모았다. 손에 간신히 잡히는 열두어 자루를, 아이가 도예수업 시간에 빗살무늬토기로 빚어온 작은 그릇에 꽂아두었다. 펼쳐진 책 앞에 전시된 연필들을 보면서 그렇게 마음이 좋을 수가 없었다.


샤프로 바꾸자는 수학선생님의 말씀이 있고도, 아이는 바꾸지 않았다. 샤프는 아이 책상 서랍 맨 밑 칸 필통에 한 10자루는 들어 있을 거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때부터 샤프 선물을 받아 모아놓은 거다. 샤프 선물을 받고 좋아하는 아이에게 샤프는 중학교 가서 쓰자고 필통에 넣어 책상 서랍 맨 밑 칸으로 보냈다. 이제 꺼내야 하는데, 아이는 샤프로 갈아타지 않고 엄마와 선생님 속이 타는 걸 모르는지 연필을 고집한다.


샤프로 수학 문제를 풀라고 아이에게 잔소리를 하는 내 목소리를 들은 남편이 샤프 두 개를 사 왔다. 아이가 두 명이니, 하나씩 쓰라고.


작은 아이는 언니 덕에 샤프 해제령이 내리자, 친구들과 우정 샤프를 사 왔다. 보라 빛깔이 들어간 샤프를 꺼내 보이며 자랑을 하더니, 며칠 전 아빠가 사준 거는 엄마 쓰라고 내놓는다. 손에 가볍고 부드럽게 잡힌다. 힘을 들이지 않고도 술술 잘 써진다. 가볍게 톡톡 두 번만 치면, 쓰기 좋게 심이 나온다.


눈에 보이는 연필을 죄다 모았다. 오랜만에 연필을 깎는다. 연필은 짧아지고 아이들은 성장하고. 뭐든 연필로 써야 제맛인데, 수학은 예외구나.


수학 문제집 펼치고 앉은 아이, 몽당연필을 손에 쥐고 있다. 샤프를 가져다주니, 내 것 아니라고, 필통을 보여준다.  


아이야, 이제 연필은 그만 서랍 속에 잘 넣어두자. 연필보다 빠른 샤프랑 친해지자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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