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내 할매 순옥
우리 할매의 또 다른 이름은 날개할매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부를 때도 날개 아빠라 하고 우리 집을 통칭할 때도 날개네라고 한다.
내가 할매 손에 맡겨진 그 순간부터 할매는 순옥이라는 이름 대신 날개할매라는 이름을 달기 시작했다.
“날개 할매”
이른 아침 할머니를 돌봐주시는
복지사 이모가 집에 오셨다.
“네가 날개구나.”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모에게 내가 사 준 침대를 자랑하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할머니를 모시고 동네 병원을 다녀왔다.
들어가니 간호사 언니가 인사를 건넨다.
“네가 날개구나.”
멋쩍게 인사를 나누고는 할머니 순번을 기다린다.
장을 보러 할머니와 시장에 갔다.
어릴 때 놀이터처럼 드나들던 곳이었는데
오랜만에 가보니 시장 입구의 반찬가게
하나만이 남았다.
“안녕하세요!”
밝게 인사를 건넸다.
“오메, 날개냐. 결혼했냐?”
“우리 애기.”
할매가 내 팔을 만지며 대신 대답한다.
김치를 한가득 담아주시며 사장님이 묻는다.
“날개네 집으로 배달해주까?”
내가 없는 곳에서도 할매는 나를 안고 살았구나.
집으로 돌아왔다.
괜히 먼지 쌓인 책상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주고받았던 편지, 구겨놓은 시험지, 쓰단 만 일기장, 오래된 앨범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매만지다 보니 공책 한 권이 눈에 들어온다.
초등학교 저학년이 쓰는 10칸짜리 깍두기공책.
표지 밑 삐뚤 삐뚤한 글씨로 써져 있는 이름
1-1반 김순옥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할머니도 노인학교에 입학했다. 평생 한글을 모르고 살아온 할매는 큰 용기를 냈다. 뒤늦게라도 간판을 읽어보고 싶다는 소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음만큼 진도를 빼는 건 쉽지 않았다.
할매에게 어제 배운 글자는 오늘도 새로운 글자였고
받아쓰기 50점을 넘기는 건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래도 할매는 자신의 방식으로 나아갔다. 나와 걸을 때는 간판들을 유심히 보는 공부도 게을리 지 하지 않았다.
'대..중... 목.. 욕..탕'
'고..용.. 미..용.....실..'
'웨...디..ㅇ...문'
하지만 누구보다 성실히 쌓은 그녀의 공부를
난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문화원 문! 화! 원!"
천천히 짚어주는 게
다시 읽어주는 게
걷다 멈추는 게
뭐 얼마나 대단한 일이라고
못된 년
그렇게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동안 할머니는 겨우 2학년이 되셨고 내가 서울로 상경할 쯤에는 영화 타이타닉 자막을 제법 읽을 수 있게 되셨다.
하지만 10년도 채우지 못한 채 할매가 공들인 글자들은 뇌출혈이라는 결말과 함께 모조리 쓸려가 버렸다.
억울해
천천히 공책을 열었다.
김순옥
김순옥
김순옥
김순옥
김순옥
김순옥
김순옥
김순옥
김순옥
김순옥
모양은 형편없지만 얼마나 애를 썼는지 보이는 할매
이름이 보인다.
아리다.
그 아린 석자 옆에 할매의 또 다른 이름이 보인다.
코가 시큰하다.
얼른 소매로 눈물을 훔쳐본다.
김순옥 강날개
김순옥 강날개
김순옥 강날개
김순옥 강날개
김순옥 강날개
김순옥 강날개
김순옥 강날개
김순옥 강날개
김순옥 강날개
김순옥 강날개
잊지 말자.
할매 삶의 흔적이 나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