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빽이 있어요.

03. 내 보물 깡보

by 강날개


나는 기아타이거즈 1번 타자 김선빈이다.


"네. MVP김선빈 선수 만나보겠습니다. 오늘 활약이 정말 대단하신데요."


모나미 볼펜을 마이크 삼은 깡보가 내게 물어온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한다.


"아무래도 오늘 중요한 경기이다 보니깐.."


난 깡보 앞에만 서면 이상한 용기가 났고,

깡보는 내 앞에만 서면 극도로 용감해졌다.

함께일 때 부끄러울 게 없는 자매는 서로의 빽이었다.






19살을 앞둔 겨울, 깡보는 대학병원 정신과에 다니기 시작했다.


"엄마, 나한테 왜 그랬어요?"


그 한마디를 할 수 없었던 깡보의 대가는 가혹했다.

그녀는 숨 쉬는 것과 방문을 나오는 한걸음에도 살을 에는 듯한 고통을 지불해야 했다.


의사는 세 가지의 처방을 내렸다.


혼자 두지 마세요.

약은 피하지 말고 드세요.

엄마와 꼭 함께 치료받으세요.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긴 겨울잠을 준비하듯 그녀는 스스로 고립되길 청했고, 사람을 가라앉게 만든다는 신비한 약은 어느 날은 안정을 어느 날은 공포를 선사했다. 오로지 이 상황을 초래한 가해자만이 초연한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내 딸이 정신병자란 말이야?"

진짜 아픈 사람은 꼭 병원 밖에 있는 법이었다.


20살을 앞둔 겨울, 나는 영화과 입학을 위한 재수에 돌입했다. 낮에는 학원, 저녁에는 과제, 새벽에는 영상시청. 그렇게 평생 해야 할 짝사랑에 넋이 나가있는 어느 새벽이었다.


똑똑.


"언니 뭐 봐?"

"슬램덩크. 볼래?"

"..... 응"


나흘 만에 내 인생 애니는 깡보의 최애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똑똑.


"언니 뭐 봐?"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볼래?"

".... 응"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어느새 깡보의 "언니 뭐 봐?" 질문은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자매의 은밀한 새벽회동이 시작되었다. 나는 쥐뿔도 모르면서 학원 수업시간에 주워들은 말들을 조합해 좋은 영화의 조건과 내가 남기고 싶은 영화에 대해 밤새 이야기했다. 깡보는 그저 귀 기울여 들었다. 그렇게 1년이 갔다.

난 영화과에 입학했고, 깡보는 내게 깜짝 선언을 했다.


"언니 나 하고 싶은 일이 생겼어."

"뭔데?"

"야구 아나운서!"

"개 쩐다. 개 잘 어울려!!"


야구의 한 장면이 심금을 울렸나?

영화의 한 장면이 가슴을 관통했나?

이유가 무엇이든 긴 터널을 거친 깡보는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약과 가해자의 사과 없이도 하루를 버텨보겠다 선언했다. 원망보다는 용서. 용서가 되지 않을 땐 더 큰 사랑을 쏟을 대상 찾기! 야구가 그녀의 사랑의 표적이 된 셈이었다. 그렇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깡보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깡보의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낮에는 학원, 저녁에는 야구, 야구 시청 후에는 앞서

말한 둘만의 실전 연습쇼와, 밤에는 전 구단 야구 기록 일지를 썼다.


1년 후 그녀는 방송보도제작과에 입학했다.

기특해.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우린 전처럼 자주 볼 수 없었지만 예상치 못한 아픔에 허우적거릴 땐 꼭 서로의 옆을 지켰다.


누군가 답답한 날이면 우산 없이 빗속으로 함께 뛰어들고, 누군가 분한 날이면 농구 코트에서 함께 땀을 흘리고, 울먹이는 전화 한 통에는 바로 신발끈을 조여 맸다. 그 모든 날 우린 함께였다.


암 수술을 앞두고, 수술대에 누운 날 보며 깡보는 이리 말했다.


"이제 언니는 쌔삥이야. 쌔삥으로 태어나는 거야. 나는 쌔삥~ 모든 게 다 쌔삥~ 다녀와. 기다리고 있을게."


이 와중에도 위트를 잃지 않는 깡보 덕분에

내가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참았던 눈물을 쏟은 깡보 덕분에 난 또 살아갈 용기를 냈다.


아픈 과거는 우스운냥

사랑을 받기보다 사랑을 주는

어른이 된 그대가 난 자랑스럽다.


세상에서 가장 웃기고 가장 사랑스러운

그대가 내 자매여서, 참 다행이야



토요일 연재
이전 07화난 명랑한 그대가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