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집이 있다는 건

01. 내 할매 순옥

by 강날개


목포에 내려간 건 2년 만이었다.


자궁내막암 진단을 받고 수술과 회복을 거치고 다시 촬영장으로 돌아가 나의 마지막 독립영화를 끝내기까지 걸린 시간은 2년.


내 인생 가장 큰 모험을 마치고 나는 내 고향 목포,

할매 품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목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해 10년을 살았다. 간간히 내려가 할매 얼굴을 보고 친구들에게 얼굴도장을 찍어 왔으나, 이틀을 넘기는 법이 없었다.

떠나온 고향에는 내가 쟁취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대단한 주인공 행세를 하며 떠나놓고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됐으니 모르는 척 자리를 내어 달라고 나는 염치없이 목포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기차 창밖으로 익숙한 설렘과 함께 깊숙이 묻어둔

죄책감이 스멀스멀 함께 피어올랐다.


나 살기 바빠 모르는 척했던 숙제들 때문이겠지.


목포역에 내리자 옅은 바다내음이 코를 간지럽힌다.

생존경쟁에 날이 서 있던 몸이 나른해짐을 느낀다.


한 달.


나는 한 달간 목포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택시를 타고 10분도 되지 않아 집 앞에 도착했다.

삼학도에서 불어오는 짠내가 가득하고 밤이 되면 꺼지지 않는 유달산의 불빛이 훤히 보이는 곳.

모든 건물들이 2층을 넘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들 절반이상은 나를 알고 있는 우리 할머니의 터전이자 나를 키운 곳.


이 동네의 파랑 지붕 집 앞에 도착했다.


사실 이 집은 우리 가족에겐 아픈 손가락이다.

5년 전쯤 할머니는 대뜸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돈을 마련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집을 사겠다는 거였다.


그동안 아빠와 고모들이 보내준 작은 용돈들과

어떻게 모았는지 의문인 숨겨둔 비상금을 내놓으며

할머니는 아빠에게 남은 돈을 채우라고 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아빠에게는

집을 살만한 목돈도 없었지만 할머니의 불같은 고집을 꺾을 힘도 없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이 파랑 지붕 집은 온전히 우리의 집이 되었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다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집값이 오르기를 바라며 산 것도 아니었고, 제대로 된 효도 한다며 아빠도 큰 결심을 세운 일이었으니 서로 기쁜 일이었다. 조금 더 돈을 얹어 근처 아파트로 가지 몇십 년 된 집을 왜 사냐는 나의 잔소리를 빼면 모든 게 아름다운 마무리였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아빠와 나는 바로 이 집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밤새 울었다.


오래된 집을 사놓은 터 인지, 아니면

자기 집이 생긴 책임감 터인지 할머니는 밤낮으로 집을 고치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새 들어 사는 입장이다 보니 그냥 두었던 것이 다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작은 조명들부터 문고리, 계단의 페인트, 벽까지도

하나하나 짚고 넘어가지 않는 것이 없었다.

할머니 동네 친구들도 유난이라며 핀잔을 줄 정도였다.


그렇게 얼마 후 할머니는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의사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고, 나는 매일 중환자실을 드나들며 의식 없는 할머니를 안고 눈물로 애원했다.


“지금은 아니야. 제발... ”


신이 내게 준 가장 큰 기회였을까.

그렇게 한 달 만에 기적적으로 할머니는 눈을 떴다.


고령의 나이에 뇌출혈이 발생하고 나면 대부분 신체적장애를 겪는 경우가 많다며 의사 선생님은 우리를 미리 위로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1년 정도의 병동 생활과 재활 끝에 멀쩡히 걷고, 마비될 거라는 왼팔도 거의 정상적으로 회복했다. 물론 모든 게 그 전과 같을 순 없었다.


언어의 절반 이상을 잃어버려 대화가 힘들어졌고,

기억에 대한 감각도 많이 둔해지셨다.


이런 할머니를 위해 아빠와 두 고모는 머리를 맞댔다.

고모들이 거주하고 있는 안산에 요양병원을 알아보기도 하고, 집으로 모시겠다며 함께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너네들이랑 살기 귀찮다는 말로 모든상황을 일축했다.


집으로 보내달라는 할머니의 생 때에 가족들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고, 모두의 걱정을 뒤로한 채 할매는 기어이 애증의 파란 지붕 집으로 돌아왔다.


할머니가 쓰러지시고 나서 나는 괜히 더 마음이 급해졌다. 영화감독이 되겠다며 떠난 서울살이는 쉽지 않았고, 할머니 보내준다던 크루즈 여행은커녕 오리배도 벌벌 떨며 타야 하는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냥 직장인의 삶을 선택했다면 좀 더 떳떳했을까 하는 죄책감은 나를 짓눌렀고 그렇다고 핸들을 틀기에는 지나온 고생들이 눈에 밟혀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또다시 시간은 가고 아픔은 무뎌졌다.

처음에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언니라고 하는 할머니 목소리에 눈물이 나 금방 전화를 끊기 일쑤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언니 소리는 익숙해졌고,

밥 먹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티브이를 봤다는 엉뚱한 답변에도 그랬구나...

자연스러운 대답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나는 눈을 감았다.

늦어서 미안하다는 변명도 하지 않은 채 비겁하게

하늘의 뜻이겠거니 하는 개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던 중 나에게 암이 찾아왔다. 정기검진을 받으러 간 산부인과에서 이상소견이 발견돼 조직검사를 받게 되었고, 암을 진단받았다.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눈물과 두려움으로 똘똘 뭉친 하루하루를 보내며 수술을 마쳤고, 지금은 정기검진 때마다 벌벌 떨며 병원을 다닌다.


아파보니 나에게 가장 큰 적은 두려움이었다.


나는 매일 두려움을 집어삼키며 소중한 하루들을 태우며 속절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오기만 쌓여가던 어느 날

나는 이 놈을 한 방에 눕혀버릴 무기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왜 할머니가 우리 집을 만들고 싶어 했는지.

왜 깨어났을 때 나에게 뱉은 첫마디가 집 샀다. 였는지


할머니가 쓰러지고 나서 아빠는 괜히 집을 산 거 같다며 후회했고, 동네 할머니들도 집 고치다가 병났다며 혀를 찼다. 처음에는 나도 그랬다.


아무도 살지 않을 이 집.

할머니 떠나고 나며 아무도 오지 않은 이 집을 왜 굳이 사야 하나. 하지만 할머니는 알고 있었던 거다.


인간은 돌아올 곳이 필요하다는 걸


이른 나이에 이혼하고 전국을 돌며 몸으로 일하는 아들과 한 달도 안 되어 자기 손에 맡겨진 가여운 손녀를 위해 할머닌 기꺼이 혼자 남아 터전을 가꿨다.

애달픈 부녀에게 말하고 싶었던 거다.


“돌아올 곳이 있다. 너무 작아지지 말아라.”


그리고 그 위로가 인간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나는 30살 가장 큰 폭풍을 맡고야 깨달았다.


“할매!! 문 열어줘!!”

“누구요?”

“나야!! 문 열어줘!!”


천천히 천천히 할머니가 내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힘겨운 몸을 이끌고 짧은 계단을 지나 나를 반기는 포근한 향이 다가온다.


철컥.


“오매! 누구다냐! 언니! 오매 뭔 일이다냐!!”

“나왔어!”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사랑받고 컸던 흔적들이 가득한 곳으로 돌아왔다. 나 하나를 길러내기 위해 애쓴 사람들의 노고가 박힌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야 나는 용기가 난다.

꼭 잘 살아내야 할 것만 같다.

그리고 또 용기가 난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말할 용기가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