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EPY#1] TITANE by Julia Ducournau
⚠Warning : Spoiler
우리의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연코 사랑이 될 것이다.
‘사랑’의 개념은 비단 로맨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 첫 숨을 들이쉬는 순간부터 부모의 사랑을 온몸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이를 들어감에 따라 무수히 많은 형태의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친구와의 우정을 겪을 수도 있고, 에로스적인 사랑에 눈을 뜨기도 한다. 또 누군가는 신을 사랑하는 아가페를 경험하기도 할 것이다. 브라운관에 등장하는 스타를 사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더 넓게는 길가에 핀 꽃 한 송이에도 사랑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사랑이라는 것은 무수히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데, 그중에서도 영화 <티탄>은 기이하면서도 강렬한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또 하나의 새로운 ‘사랑’의 형태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아버지와 함께 차를 타고 가는 알렉시아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운전하는 아버지를 똑바로 노려보며 자동차 소리를 흉내 내는 딸과 시종일관 인상을 찌푸린 채 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음악 소리를 키우는 아버지의 모습은 언뜻 보기에도 화목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사상적 측면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은 천륜(天倫)이라고 칭할 정도로 절대적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티탄>이 보여주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에서 부성애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부성애를 전혀 경험하지 못한 채 자란 알렉시아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을까.
아이에게 부모는 거울이자 세계 그 자체이다. 그렇기에 유아기부터 사람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모두 거세당한 채 성장한 알렉시아가 자동차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사고로 생사를 오갔던 그녀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다시 한번 태어나게 해준 것이 바로 자동차를 구성하는 ‘티타늄’ 이었으므로.
그러나 <티탄>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일반적인 범주에 속하지 않는 알렉시아가 결과적으로 그녀의 최대 결핍이었던 ‘사랑’을 채우게 된다는 점이었다. 영화 <티탄>을 장식하는 대표적인 단어는 바로 “충격”이다. 맞다. 이 영화는 충격적이다. 상식을 뛰어넘는 신체 훼손과 파괴적인 연출은 시각적으로 기괴하고, 충격적이며, 심지어는 끔찍함을 선사한다.
알렉시아이자 아드리앵인 그녀의 외형은 여성도, 남성도 아니다. 자동차와의 성관계를 통해 임신을 하고 모유 대신 새카만 오일을 흘리는 그녀는 사람도 기계도 아니다. 알렉시아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그 어떤 말로도 정의할 수 없는 어떤 ‘존재’이다. 이처럼 외모도, 신체도, 나아가 젠더 까지 전부 해체된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였다. 하물며 부모조차 그녀를 사랑하지 않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녀의 결핍은 빈센트를 만나며 비로소 채워진다.
빈센트가 등장해 온전히 그녀의 존재를 바라봐주고 받아들여 주었을 때 알렉시아는 비로소 티타늄처럼 스스로를 무장하고 있던 고철을 녹여버린다. 그렇다고 빈센트가 사랑을 주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타올라 알렉시아의 티타늄을 녹이고 사랑을 알려주었다. 빈센트에게 알렉시아의 존재는 구원이자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를 잠식했던 트라우마의 극복이다.
빈센트와 알렉시아의 사랑은 일반적이지 못한 것이지만, 그것이 비정상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어느 것에도 맞지 않는 기형적인 모양의 두 톱니바퀴는 사실 불량품이 아니라 맞는 짝을 찾지 못했던 것이니까. 그리고 쥘리아 뒤쿠르노가 선사하는 이 기이한 사랑의 형태는, 기묘하게도 위안을 준다.
사랑은 반드시 한 가지로 정의해야 하는 개념이 아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셰이프 오브 워터>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의 범위를 넓혔다면 <티탄>은 그 사랑의 방식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작품이었다. 어떤 모습이든, 어떤 형태를 하고 있든, 관계 속에서 구원받고 자신만의 티타늄을 녹여낸다면 그 역시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니까.
Rating : 3.5/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