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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조 Apr 25. 2023

진보와 디자인

한국의 가전제품과 복고열풍

한국의 가전제품 디자인은 이전보다 더욱 간결하고 심플한 디자인을 지향하고 소비자에게 전달해 왔다. 때문에 일명 ‘백색가전’(가정집에서 사용되는 화이트 컬러의 가전제품들을 일컫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엔 이 백색가전이라는 말도 옛말이 되어가고 있는 추세다. 과거 모던하고 깔끔한 디자인을 중시하던 소비자들이 이젠 형형색색의 가전제품을 원하고 있다. 특허청에 따르면 제품의 표면처리 기초재 부품으로 사용되는 장식 필름, 금속 및 유리 패널 등의 디자인등록출원이 약 52%로 대폭 증가했다. 이는 같은 기간 전체 디자인등록출원의 평균 증가율 9.4%와 대비하면 괄목할 만한 성장으로 평가되고 있다. 당연히 흰색 이어야 한다는 그동안의 상식이 소비자의 요구와 필요에 의해 깨지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컬러의 가전제품들이 나오면서 동시에 원색을 바탕으로 한 복고풍의 가전제품 또한 유행을 하고 있다. 복고를 뜻하는 레트로 트렌드를 넘어 ‘뉴트로(new-tro)’ 트렌드가 가전 업계에 확산되고 있다. 복고(retro)를 새롭게(new) 즐긴다는 뜻의 뉴트로는 중장년 층에게는 추억을 떠올리며 향수를 일으키고, 젊은 층에게는 신선한 매력으로 다가가고 있다.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을 실감하게 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18세기 산업혁명 당시 영국의 모습

사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과거에도 있었다.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인류 역사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주었지만 이에 대한 반응은 상반되었다. 진보에 대한 반응은 이중적이었다. 진보란 좋은 것이기도 하고, 나쁜 것이기도 하다. 산업혁명과 진보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는 이 무렵 발명된 증기기관을 예로 들어보자. 증기기관은 제조산업의 효율성과 교통수단의 발달을 가져왔다. 반면에 이로 인해 숙련된 장인들은 그저 월급쟁이 노동자로 전락했고, 도시는 시커먼 매연 속에서 건강에 해로운 해괴한 장소로 변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진보’라는 이름 아래 수용되었다.

산업혁명 당시 발명된 증기기관

사람들은 진보를 맞이함과 동시에 ‘고전’에 빠져들었다. 산업단지가 가져온 오염과 매연 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이탈리아의 로마 같은 고대 유적지나 유물을 찾아 떠났다. 그들은 여행을 하면서 “이곳이 철도로 덮이기 전에 그리고 사유화되기 전에 이 여행길을 떠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하고 상념에 잠겼다. 고전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동시대인들의 취향으로 발전했고, 이런 취향이 투영된 신고전주의 예술품들도 대거 창작되었다. 디자인 분야에서 신고전주의 운동은 18세기 전반기 유행했던 로코코 스타일에서 보기 어려운 형태와 표현의 순수성 즉 그리스 로마 시대의 유물들이 나타내는 것들을 다시금 되찾기 위해 이어졌다. 이는 과거의 이미지와 형태에 당대 사람들의 감성을 함께 아우르는 것이었다.

세인트 팬크러스 역 (좌), 수정궁의 조각상 (우)

영국의 세인트 팬크러스 역의 기관고는 기관고의 지붕 형태를 고딕 양식을 떠올리게 하는 구조로 디자인했고, 산업시대를 상징하는 철과 유리로만 지어진 크리스탈 팰리스에도 1750년대 존 치어의 조각공원을 연상케 하는 고대의 조각상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기술의 진보가 정점에 달했던 1850년에도 고대를 향한 미적 취향은 지속되고 있던 것이다.


과거를 담은 신고전주의 양식은 당시의 도자기에서도 볼 수 있었다. 웨지우드 자기는 도자기 디자인에 신고전주의 양식을 도입해 이익을 추구한 대표적인 예이다. 조자이어 웨지우드는 대량생산 방식, 카탈로그를 통한 뛰어난 마케팅, 도자기의 외관 디자인에 초점을 두었다. 웨지우드는 자신의 기술적 승리였던 ‘검정 재스퍼’를 로마시대 ‘카메오 꽃병’을 그대로 재현하는데 적용함으로써 기술적 진보를 홍보했다.

카메오 꽃병을 재현한 웨지우드의 포틀랜드 꽃병

그러나 그는 사업 초기에 자신의 기술적 성과를 알리지 않고 초기 제작된 카탈로그에 새로운 생산 시스템 개발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새로운 상품이 나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언급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웨지우드는 당시 사람들이 반감을 가지고 주저하던 진보적 측면을 감추기 위해 새로운 기술에 대해 선전하지 않았고, 대신 고전적인 양식을 디자인에 도입하여 과거에 대한 향수를 일으켰다. 새로움이 아닌 고대성이 소비를 자극하는 가장 효율적인 가치라고 생각한 것이다. 2023년 현재, 한국의 가전제품 기술력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일명 ‘스마트 가전’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스마트 기술을 가전에 융합시킨 제품들이 출시되고 있다. 예를 들어 loT 기술 (사물인터넷)을 활용하여 사용자들이 스마트폰 등을 통해 쉽게 제어하고, 더욱 편리하고 효율적인 사용이 가능한 가전제품 또한 개발되어 판매되고 있다. 이렇게 기술적으로는 굉장히 진보했지만 소비자들은 과거의 디자인을 원한다. 때문에 최근 한국의 가전제품은 과거의 디자인과 현대의 기술을 재해석하여 제작되며, 소비자들에게 노스텔지아(nostalgia)한 느낌을 제공한다. 웨지우드의 도자기처럼 말이다.


이젠 가전제품도 하나의 인테리어다. 사람들은 웨지우드의 도자기처럼 가전제품을 하나의 오브제로써 집에 두고 싶어 한다. 그로 인해 더욱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가치를 집 안에 둘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요즘에는 소비자들이 감성적인 가치와 혁신적인 기술적 요소를 모두 고려하여 제품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에, 레트로한 가전제품도 이러한 요구에 부합하는 제품으로써 인기를 끌고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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