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서점 MD의 읽고 파는 이야기
사실 오프라인 강연 행사는 내게 기대감만큼이나 큰 부담감을 느끼게 한다. 원래 걱정을 많이 하는 성격이다. 그리고 대면 행사는 기획, 출판사 협의, 이벤트 오픈, 당첨자 추첨과 안내, 강연 자료 점검부터 진행, 질의응답까지 챙겨야 할 일이 많다. 행사장에 온 사람 누구도 불편함과 불쾌함과 분노를 느끼지 않게 하려면 빼곡한 체크리스트 중 하나라도 빠뜨리면 안 된다.
물샐틈없이 준비했음에도, 혹여나 현장에서 통제 불가한 돌발 상황이 생길까 싶어서도 겁난다. 사전에 예고한 내용과 달리 저자가 강연을 진행하지 않고 일찍 중단한 행사가 있었다. 참석자들은 당혹감을 안고 발길을 돌렸다. ‘충격’이었다. 외국 사건이지만 소설가 살만 루슈디는 강연장에서 습격을 당하기도 했다. ‘공포’였다. 둘 다 너무 극단적인 예시이지만, 행사 기획자는 예상은커녕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순발력 있게 대응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손이 많이 가고 부담되고 가끔은 공포감까지 안기는 ‘오프라인’ 행사를 ‘온라인’ MD는 굳이 왜 기획하는 걸까? MD 개인으로서의 이유. 내용, 분위기, 질의응답 모두 훈훈했던 한 강연에서 나는 500명이 넘는 독자의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주로 PC 앞에 앉아서 일하고 숫자와 데이터로만 고객을 인식하는 온라인서점 MD에게 ‘실재하는 내 고객을 직접 만난다는 일’의 의미는 크다.
회사 차원의 이유. 지금 서점은 다양한 지식·강연·문화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있다. ‘시간’과 ‘관심’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두고 콘텐츠 업계 내에서 벌어지는 경쟁이 갈수록 격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퇴근 후 늦은 밤에 직장인은 ‘넷플릭스’ 뭐 볼지 고민하거나 넷플릭스 보다가 잠든다. 한국인이 가장 오래 사용하는 앱은 ‘유튜브’다. 본래 전자 상거래와 포털 서비스로 시작된 쿠팡과 네이버는 ‘쿠팡플레이’와 ‘네이버 웹툰·웹소설’이라는 콘텐츠 사업을 통해 고객을 끌어들이고 붙잡고 있다.
이런 서비스들이 대중의 24시간을 다 사용해버리면 대체 책은 누가 언제 읽나. 한탄만 하기에는 출판계가 지닌 고객을 유인하는 잠재력이 너무 크다. ‘저자와 독자를 연결하기’는 서점과 출판사가 가장 잘하는 일이다! 문화 예술을 좋아하고 지적 성장 욕구를 지닌 대중이 주목할 만한 콘텐츠 행사를 제공하는 일은 ‘독서율 최저 시대’의 해결책이 될지 모른다.
다양한 저자 만남 행사를 통해 독자는 책을 보다 넓고 깊게 이해한다. 북토크가 주는 재미는 OTT, 동영상 서비스의 엔터테인먼트적 재미와는 방향이 다소 다르다. 북토크 참여는 또 다른 방식의 독서이다. 독자와 책 사이의 거리를 좁혀준다.
서점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책을 다른 곳이 아닌 서점에서 사야 할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 서점에서 주최하는 강연·문화 행사는 강력한 이유 중 하나이다. 그래서 파주 사무실에서 일하던 시기에도 2200번 버스를 타고 자유로를 달려 한 시간 반을 이동해 ‘지식과 강연 문화의 성지’ 광화문 교보빌딩 23층을 찾아 고객을 만났던 것 같다.
이러한 나의 ‘파주-서울’ 여행은 2020년 1월을 끝으로 잠시 중단되었다. 팬데믹 시대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랜선 팬사인회 등 온라인 이벤트가 아닌 대면 행사는 1년 반 넘게 진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모두가 숨죽이던 시절에도 독자와 뜻깊은 만남을 촘촘하게 이어간 작가가 있다.
김연수는 2021년 10월 제주도 대정읍의 작은 서점에서 낭독회를 연다. 낮에 일하고 밤에 모인 독서 모임 회원들을 보며 그는 글쓰기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을 맞는다. 좋은 이야기로 독자의 허기를 채워주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허기를 채워준다는 말은 도와준다, 위로한다, 격려한다, 응원한다 등 ‘다정하기만 하다면’ 어떤 다른 단어로 바꿔 읽어도 괜찮다.
낭독회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제주도 행사를 시작으로 2023년 6월의 마지막 행사에 이르기까지 김연수는 스물한 차례나 지역 서점과 도서관에서 독자를 만났다. 각 행사에서 작가가 낭독한 소설은 기존에 발표한 작품이 아니었다. 낭독회를 위해 새로 쓴 소설을 처음 만난 독자에게 읽어 주었다. 아마도 소설사에서 유례없는 방식으로 탄생한 작품을 묶어 『너무나 많은 여름이』(레제)가 출간되었다.
책에서 마음에 가장 깊게 들어온 ‘소설’은 「첫여름」이다. 진주의 한 여관에 배우가 혼자 투숙한다. 주인은 그날 밤 손님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걱정한다. 불상사를 막기 위해 술상을 차려 조카를 손님 방에 들여보낸다. 한 시간 뒤, 정작 술에 취하고 통곡까지 한 건 배우가 아닌 소녀였다.
다음 날 아침 해장을 위해 간 국밥집에서 배우는 “앞으로는 미래가 지금의 나를 만들 수 있도록 오로지 미래만을 생각하자”라고 말한다. 이 문장만 떼어놓고 보면 특별한 점이 없는 충고다. 그런데 소설의 흐름 속에서 접하니 절실하게 다가왔다. 일상도 세계도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기세에 눌려 있던 시기였다. 작가의 음성을 타고 전해진 이 메이지에 낭독회장의 사람들은 힘을 얻지 않았을까?
배우와 소녀는 아침을 먹고 나와 촉석루를 향해 언덕을 오른다. 그 순간 맞았던 ‘바람’을 떠올릴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고 지금 서점 주인이 된 소녀는 회고한다. 여름, 아침, 바람……. 그가 느낀 이유 모를 설렘이 내게도 옮겨왔다.
책에서 마음에 가장 깊게 들어온 ‘글’은 ‘작가의 말’이다. 어쩌면 수록 작품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이다. 실은 한 편의 소설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스무 편의 단편을 먼저 읽고, 작가의 말을 읽은 뒤, 첫 장으로 돌아가 스무 편을 다시 읽으면 처음 읽을 때와 느낌이 크게 달라진다.
작가의 말에서 밝히길, 낭독이 끝나면 김연수는 각자 살고 있는 삶에 대해 독자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때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 바로 그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라고 덧붙인다. ‘소설, 작가의 말, 책이 나오게 된 배경’이 모두 이토록 아름다우면서 깊은 감동을 준 책은 처음이다. 그리고 유일하다. 시간을 돌려 이미 끝난 낭독회 중 하나라도 참여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결국 팬데믹은 끝났다. 사람들은 마치 실내에 갇혀 지내던 날들에 대한 반작용처럼 전시회, 콘서트, 팝업 스토어, 페스티벌에 몰려다니며 문화생활을 즐겼다. 팬데믹 이전과는 다른 이유에서 북토크 행사의 쓸모에 눈길이 갔다. 공간에 직접 들르는 경험을 선호하는 분위기를 활용해 책 읽는 문화를 활성화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려면 어떻게 북토크를 기획해야 할지 고민했다.
‘파격’이라는 한 단어의 결론이 나왔다. 과거처럼 저자를 모시고 강연을 듣고 질의응답하고 종료하는 익숙한 방식으로는 차별성을 만들기 어렵다. “이 작가를 직접 만난다니” 놀라움을 주는 ‘섭외의 파격’. 마음을 깊게 파고드는 말이 하나 이상 있는 ‘내용의 파격’. 예상을 뛰어넘는 구성이어서 신선한 충격을 받는 ‘형식의 파격’. 이중 적어도 한 가지는 있어야 멀리 발걸음해준 독자에게 보답하는 행사라 할 만하다.
세 가지 파격을 모두 갖췄던 완벽한 행사를 두 개 알고 있다. 하나는 쿠이 료코 내한 사인회다. 다른 하나는 『너무나 많은 여름이』가 세상에 나오게 한 김연수의 낭독회다. 소설가가 오늘의 자리를 위해 작품을 써 와서 읽어주고 두세 시간 대화를 나누는 행사라니. 이토록 혁신적인 연속 ‘신작 시사회 겸 낭독회 겸 북토크 겸 독서 모임’은 본 적이 없다.
누구보다 문화가 있는 삶을 사랑하지만 콘서트 예매 싸움에 지치고 전시회 오픈런이 버겁다면 저자 만남 행사에 눈을 돌려보는 걸 추천한다. 바쁜 일상을 잠시 멈추고 느긋함 속에 지식을 채우며 감성 온도를 높일 수 있다. 교보문고에서 많이 한다. 책 읽기는 싫은데 책 행사만 가도 될까? 아무 문제 없다. 참여가 곧 독서다. 어쩌면 작가가 새로 쓴 소설을 가져와 읽어줄지도 모른다.
글쓴이: 구환회
교보문고 소설 MD. 십수 년간 성공과 실패 사이를 오가며 쌓은 MD로서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오늘도 판매 실적을 향해 정진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