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모와 소외의 공통점
소모와 소외는 꽤나 닮았다. 우선 글자의 모양이 그렇고, 추상적인 느낌 또한 그렇다. 외롭다.
4월에는 두 단어를 합친 것만큼이나 외로운 존재들을 만났다.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을 이끄는 세일즈맨 ‘윌리’와 뮤지컬 <라이카>의 주인공인 강아지 ‘라이카’이다.
(※스포일러 있음)
/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용인 포은아트홀, 연출 김재엽
<세일즈맨의 죽음>은 은퇴를 앞둔 세일즈맨 '윌리 로먼'의 이야기다. 배경은 1949년 미국. 천박하다고까지 부연되는 미국의 자본주의와 저세상 마초이즘 속에서 치매를 앓고 있는 노인 윌리는 쓸모없는 인간이다.
극중에서 윌리는 손자뻘인 젊은 사장에게, 아들들에게, 마음처럼 기능하지 못하는 자신의 신체에게 끊임없이 내쳐지기만 한다. 그러나 윌리가 가진 병환은 다르다. 자꾸만 그를 과거의 영광으로 이끈다. 극은 현실과 과거를 명확한 경계 없이 마구 넘나들며, 세일즈맨으로 소모되다 이제는 변두리로 소외되어 가부장제의 손아귀에 옥죄이는 윌리를 비춘다.
윌리의 모든 상상 속에는 그의 형 ‘벤’이 등장한다. 성공한 사업가로 자본주의와 마초이즘을 모두 충족하는, 미국의 번지르르한 환상을 인격화한 듯한 남자. 벤은 생활비를 벌지 못해 절망하는 윌리 앞에 나타나 이제는 결정할 시간임을 일러준다. 윌리에게 뭔가를 결정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았을까? 관객들의 의문을 해소하듯 그는 차에 시동을 건다. 강렬한 라이트가 비추고, 굉음이 들려온다. 윌리는 자살한다. 사망 보험금이야말로 그가 자신의 가치를 자본으로 환산할 수 있는 최적의, 그리고 최후의 기회인 것이다.
무대는 그들의 절망을 적나라하게 담아낸다. 미국식 가정집이 그대로 구현된 것부터 그렇다. 눈앞에서 실제로 문을 열고, 닫는 배우들을 보며 관객은 실제적인 가족의 모습을 향유하게 된다. 빈도가 잦은 음악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장면마다 감정을 조각하며 관객을 반듯한 길로 안내한다. 하지만 의도를 따라가기 용이하다는 말은 강요로 치환될 수도 있다. 윌리에게 가중되는 부담감은 비단 1950년대 미국의 것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겉치레이기 때문에 <세일즈맨의 죽음>이 고전으로써 강력한 힘을 지니는 것이다. 직관적인 연출이 관객을 그 당시의 미국에 데려다 놓는다면, 텍스트가 가진 눈부신 동시대성은 그만큼 반감되는 셈이다. 다만 주인공 윌리를 맡은 박근형 배우의 호연은 단번에 인물을 소생시키며 그 모든 장벽을 뛰어넘게 했다. 어떤 매체보다도 퍼포머의 역량이 중요하다는 건 공연만이 가질 수 있는 거대한 매력이다.
/ 뮤지컬 <라이카>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작 한정석, 작곡 이선영, 연출 박소영
윌리가 사망하고 8년이 흐른 1957년, 소련에서는 떠돌이 개 ‘라이카’가 인류의 미래로 분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진다. 세계 최초로 우주선에 탑승하는 우주견이 되는 것이다.
‘라이카’라는 이름은 미국을 이겨먹으려는 소련의 일념 하에 탄생했다. 그러나 거창한 탄생 비화에 비해 볼품없는, 그저 말티즈나 도베르만처럼 종의 명칭에서 따 온 단어일 뿐이다. 떠돌이 개 라이카는 특정한 목적 아래 잠시나마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 우주선에 실려 쏘아 올려지며 세계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전까지 말이다.
목적을 다한 라이카는 우주선 안에서 며칠을 앓다가 이름 모를 행성에서 눈을 뜬다. 행성의 주인인 ‘어린왕자’는 인간에게 깊은 반감을 가졌다. 사랑하는 인간 ‘생텍쥐페리’를 전쟁으로 잃은 뒤 파괴적인 인간성에 완전히 질려 버린 그는 지구를 폭파시킬 작정이다. 때마침 등장한 라이카는 어린왕자의 계획을 보조할 완벽한 존재다. 인간을 혐오할 수밖에 없는, 멋대로 쓰이고 멋대로 버려진 존재.
자신이 지구상에서 잊혀져 가는 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분노한 라이카는 잠시나마 그의 계획에 동참할 뻔하지만, 사실은 여전히 인간이 그립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리고 어린왕자에게 부탁한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줘.” 결국 라이카는 꿈꾸던 대로 어린왕자와 함께 지구로 복귀한다. 라이카가 돌아간 후에도 수많은 동물들이 우주로 보내졌지만, 모두 어린왕자의 행성에 무사히 착륙한다. 라이카처럼 소모되고 버려진 동물들은 그들만의 세상을 창조한다.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세상 말이다.
뮤지컬 <라이카>는 강아지의 시선에서 따뜻함을 자아내고자 한다. 끊임없이 동물을 궁금해하지만 타자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관객들에게는 희소식이다. 강아지 라이카는 어떤 욕망과 목적을 가지고 달려나가게 될까? 처음에 그에게 주어진 감정은 지구로 돌아가고자 하는 집념이다. 중반부에는 버림받았다는 절망이고, 마지막에는 그 모든 감정이 사랑으로 귀결된다.
라이카의 모습은 정확히 인간이 상상한 그대로다. 인간과 깊은 유대를 갖고, 인간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존재. 어려운 판단을 할 수는 없지만 모든 이들에게 이타적인, 사랑으로 가득찬 착한 강아지 말이다. 종으로 따지자면 골든리트리버 같은. 만약 라이카가 치와와였다면 어린왕자보다 먼저 지구를 폭파시켰을 것이다.
관객으로서 <라이카>에 기대했던 것은 피상적인 강아지가 아니다. 정신없지만 주도적으로 사건을 해결하고 단서를 찾아 나서려고 노력하는, 다면적이고 흥미로운 강아지다. 그러나 라이카는 우주에 불시착한 이후로 어린왕자에게, 장미에게, 로봇에게, 바오밥 나무들에게 여기저기로 이끌리며 혼란스러워하기만 한다. 라이카의 결정을 주관하는 감정은 딱 하나, 사랑뿐이다.
극의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 지구에서 라이카를 담당했던 직원 ‘캐롤라인’이 등장한다. 그녀는 슬픈 얼굴로 읊조린다. 라이카 너에게 아주 많은 친구들이 생긴 꿈을 꿨노라고. 그러니까 결국 <라이카>의 서사를 주도하는 것은 강아지 라이카가 아니라 인간 캐롤라인이었던 셈이고 이는 사전의 기대에서 한참 이탈하는 행선지다.
유려한 선율을 지녔지만 가사의 프레이징이 잘 들리지 않는 넘버, 평면적인 구성까지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았으나 화려한 창작진 목록에 과대해진 기대심 탓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게 전부일 것이다… (레드북과 여보셔 아주 잘 봤습니다...)
<세일즈맨의 죽음>과 <라이카>가 시사하는 바는 다르다. 그러나 쓰임을 다하고 밀려나는 존재를 다룬다는 점에서 동질성을 지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용도가 없으면 폐기되기 십상이다. 단지 벼랑 끝에 몰려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이들이 더 빠르게 소진되고, 먼저 배제될 뿐이다. 쓰이기 쉬울수록 우선적으로 소모되는 이곳에서, 동시에 소모되고 외면당하기도 하며 살아가는 존재로서 어떤 온도로 세상을 대면해야 할까? 무대는 관객으로 하여금 삶에서 느끼기 힘든 다양한 감정들을 길어올리게 한다. 예기치 않게 맞닥뜨린 2025년 4월의 감정은 쓸쓸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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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NUTS Editor 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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