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순 Dec 16. 2023

Re: view 02. 무드 인디고

미셸 공드리의 쪽빛 동화

*쪽빛: 짙은 푸른빛, 'indigo'

<무드 인디고> (2014)


   콜랭은 어른아이다.


   365일 화사한 집에서 연보랏빛 물에 잠겨 목욕을 하고, 건반을 누르면 칵테일이 흘러나오는 칵테일 피아노를 즐거이 연주하며 한가한 오후를 보내는 콜랭은, 평생을 동화 속에서 살아 온 ‘어른의 탈을 쓴 아이’다.


   콜랭의 세상에선 모든 것이 과장되었다. 펠트 재질의 뱀장어가 두더지처럼 수도관을 오가고, 말랑말랑한 재즈에 맞추어 춤추는 무도회장 사람들의 다리는 고무처럼 늘어져 있다. 비현실이 곧 현실인 세계이다. 그 반대편에서는 자리마다 꾹꾹 눌러앉은 노동자들이 경쾌하게 주어진 노동을 해내고 있는 또 다른 비현실을 목도할 수 있다. 공장식 업무와 대조되는 들썩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치 팝 아티스트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있는 것만 같은 아이러니에 겸연쩍어진다.

   미셸 공드리는 동화를 이루는 모든 요소에 리듬을 부여한다. 무엇도 쉬지 않고, 늘어지지 않는다. 어둠이 조금이라도 침범하면 부서져 버릴 것처럼 슬픔과 우울이 뿌리 끝까지 제거되어 있는 생경한 세상이다. 어른아이 콜랭의 동화는 완전한 만큼 어리둥절하고 당혹스럽지만, 쾌감이 모든 감정을 부차적인 것으로 압도하는 지점이 있다. 미셸 공드리는 행복이 당연한 수순으로 여겨지는 동화의 빤한 초입을 오히려 극단적으로 동화답게 연출하면서 기어코 현실을 부정해 낸다.



   클로에는 아이다.


   어른아이 콜랭에게서 아이같이 해맑은 면을 끌어내는 세계관의 조력자 클로에는, 콜랭에게 로맨스를 부여하는 사랑의 존재인 동시에 불행의 시작이다.


   비극이 불현듯 닥쳐오지는 않는다. 주인공들이 결혼이라는 행복의 정점을 맞은 와중에, 난데없이 콜랭에게만 장대비가 내리거나 그의 신발에 맞은 숙소 창문이 깨지는 등의 사소한 징후들이 발생하며 서서히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그날 밤, 깨진 창문 틈새로 수련이 흘러들어와 곤히 잠든 클로에의 폐에 내려앉으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연인에게 병증의 그늘이 닥친다는 진행은 클리셰적이지만, 동화처럼 연출되어서인지 이상하리만큼 불쾌하게 느껴진다. 파스텔 빛 로맨스의 제목이 ‘mood indigo: 검푸른 빛의 분위기’ 라는 모순을 이해하게 되면 착각 속에서 해맑은 콜랭과 클로에가 더없이 안타까워진다.


   클로에의 병이 심화되면서 365일 화사하던 콜랭의 집에는 군데군데 균열이 가고, 창살엔 햇빛을 좀먹는 거미줄이 자라난다. 클로에를 죽음에서 건져내기 위해 노동에 뛰어든 콜랭은 한 번도 일해 본 적 없는 비현실적 인물이라는 이유로 매번 비웃음을 사며 쫓겨나기 바쁘다. 한때 콜랭을 수호했던 비현실성은, 어두컴컴한 현실의 소굴로 굴러 떨어진 그에게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이중적 존재일 뿐이다. 휘황찬란하던 배경 또한 콜랭의 추락과 함께 점차 어둡게 변모해 간다. 그렇게 밀려나는 콜랭을 따라 헤매다 보면 콜랭만을 위한 책 <무드 인디고>를 집필하는 공장식 업무지에 다시 한 번 이르게 된다. 콜랭이 작업복 차림으로 노동자들 사이에 끼어 있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쫓기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답답해진다. 클로에가 마법같이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동화 같은 비현실을 염원하게 된다. 그러나 배경의 색은 계속해서 짙어져만 간다.


   콜랭은 쾌차한 클로에와 행복해질 거라는 상상 속에서 멋대로 책의 내용을 바꾸려다 이 일자리마저 잃게 된다. 당연한 행복이 당연하지 못한 게 되었을 때, 클로에는 오롯해진 흑백 세상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파스텔 빛 동화를 지켜내지 못한 어른아이 콜랭에게서 아이의 자아는 영영 빛을 잃는다.


    콜랭은 어른이 된다.



   색채가 한낱 신기루처럼 사라진 세상에서도 노동자들은 한결같이 책을 집필한다. <무드 인디고>의 마지막 장은 행복해 보이는 콜랭과 클로에의 캐리커처로 마감되지만, 얄궂게도 여전히 흑백이다. 그러니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퇴색된 마음의 마지막 조각이자 한순간 현실로 내던져진 어른들의 미련일 것이다.


   미셸 공드리는 적나라한 날것의 감정들을 동화답게 우회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동화를 적나라한 현실로 추락시킨다. 공드리가 빚어낸 쪽빛 동화 <무드 인디고>는 ‘퇴색이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는 서글픈 메시지를 남기면서 닫힌 결말로 끝이 난다.


   글의 구색을 맞추기 위해 두 번쯤 돌려보았을 때, 아이의 허물을 벗은 콜랭을 거울처럼 마주하고 있는 자신이 보이며 조금은 착잡해졌다. 빛과 순수를 잃으면 어른이 되는 걸까? 그렇다면 성장이란 퇴색이고, 퇴색이란 희망의 끝인가? 새삼스러운 고민 끝에 정답이길 바라는 문장을 찾아냈다.


   성장하는 인생이란 퇴색에 멈추지 않고 또 다른 빛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수많은 콜랭들이 닫힌 결말을 열어내고 모험을 떠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이 땅의 모든 파스텔 빛 비현실이 깜깜한 현실과 도치되기를 바라면서.

작가의 이전글 Re: view 01. 겨울왕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