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구'되지 않고 '보존'되는 가치에 대하여 - 다르고 틀리다는 것
<장미의 이름>은 추구되지 않고 보존되는 가치를 신랄히 비판하는 작품이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중세 교회가 신앙이라는 명목 하에 인권을 유린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대놓고 그 구조를 꼬집는다. 종교재판이나 해학금지령 등 현대에는 없는 종교적 장치를 여러 사건에 연루시켜 나열한 뒤, 윌리엄의 이성을 빌려 양껏 비판하다가 종내는 처단해 버린다. 작품의 결말처럼 과거 극단적인 행태들은 종교의 공공연한 부패를 말미암아 종적을 감추었지만, 과연 그 맥락까지 완전히 소멸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은 끈질기게 남아 있다. 지름길에 혹하기 쉬운 인류의 본성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이분화는 매혹적이다. 하나의 기준을 세워 편을 가르기만 하면 복잡하고 다면적인 것들이 빠르게 명확해진다. "여자는 본래 사악해도 성령으로 고귀해지면 가장 거룩한 은총의 통로가 될 수 있지." "지식의 역사에서는 진보가 아니라 숭고한 지혜의 반복만이 있을 뿐이네." 작품의 종교인들이 받들어 온 숭고한 지혜 또한 명확성으로 둔갑한 이분화 천지이다. 교회 아니면 다 이교도라는 논리 아래에, 여성은 사악한 창녀 아니면 모성을 갖춘 성녀, 사랑의 감정이란 신을 향하지 않으면 모조리 죄악, 인간의 사후는 천국 아니면 지옥 등의 크고 작은 이분화가 숨어 있다. 윌리엄과 아드소를 제외한 모든 종교인들은 이 편파적인 진리만을 맹신하며 간편히 약자를 착취하다가 결국 고인 욕망 속에서 괴사한다. 정상 신앙으로 위장한 이분화를 통치의 권리인 양 착각하여 발생한 참극이다.
악귀나 마녀 같은 건 더 이상 없다.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각종 야만적인 처벌도 금지되고 있다. 다만 이제는 종교재판의 '방식'이 아닌 '본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상 범주에 속하지 않는 인간을 매도하고 엄벌하는 것. 현대 사회는 과격한 처벌을 비이성적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화에 대해서는 곧잘 침묵한다. 전통적으로 '보존'되어 온 기성 가치이기 때문이다. 화형은 사라졌으나 더욱 더 세분화된 이단 판결이 현대의 길목에서 공고히 버티고 있다. 정상 가정과 결손 가정, 학교 안 청소년과 학교 밖 청소년의 계급화, 헤테로섹슈얼과 호모섹슈얼, 비장애인과 장애인, 인종차별. 수많은 정상 기준은 보존되는 동시에 각계각층에 침투하여 사회의 다양성과 발전 가능성을 압박한다. 비정상에 속한다고 불에 타 죽지는 않지만, 존재만으로 쉬이 경계 밖으로 밀려남은 변함이 없다. 단지 개인의 속성과 정상 가치가 교집합을 이루지 못한다는 이유로 기꺼이 이교도 낙인을 찍는 것이다. 구성원들은 정상을 갈망하고 유별을 경계하며 과거를 답습한다. 제일 큰 문제는, 가치관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한 아이들이 이러한 이분법적 가치에 더 쉽게 노출되고 물든다는 점이다.
사회화가 한창인 시기 무리 안에서 정상 가치를 거부한다는 건 자칫 틀린 존재로써 기피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아이들은 어른들이 보존하고 있는 가치와 기성 교육의 틀 안에서 점차 정형화된다. 건강한 토론과 논쟁으로 추구하고 싶은 가치를 탐색하는 일이 아니라, 잘 답습된 보존 가치들을 따져 물어 정답을 찾는 일에만 매진하게 된다. 그러는 동안 자연스럽게 기존의 편견들을 체득하며 배척에 동요하기 쉬운 개체로 변모한다. 다름과 틀림을 구분할 수 없는 성인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해학을 악으로 규정하고 진보적 의식을 배척했던 중세의 이분화와 현대 사회에 만연한 각종 이분법적 편견은 방법이 조금 다를 뿐 궤를 같이한다. 종교 재판이 사라진 빈자리는 고상한 마녀 재판이 채우고 있다.
비정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유지되는 사회 질서는 고요가 아니라 태풍의 눈일 수 있다. 가치라는 주관적 실체를 교회 안에 가두고 그대로 보존하려고 했던 중세 종교 독재의 결말이 어땠는지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새로운 가치를 탐구하려다 기성 종교인들의 극단에 꺾여 나간 젊은 수도사들의 미래는 절대 경시될 수 없다. 그 자리가 다른 청년들로 대체되기 전에, 우리는 유별이 아니라 다름을 비정상으로 명명하는 보존 가치의 기만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