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 대신 서사를 파내다
파묘의 마케팅 포인트는 세 가지이다.
MZ 무당, K 무속 오컬트, 화려한 캐스팅.
삼박자가 완벽하게 녹아든 예고편을 보고 ‘예술계 머피의 법칙 제1번: 기대하지 않기’를 까맣게 잊은 건 사실이다. 기존의 무속 클리셰를 비튼 주인공들의 애티튜드, 그것을 담아낼 연기파 배우들의 공력, 한국형 오컬트 붐을 일으킨 장재현 감독까지. 무언가 파격적인 것을 기대하는 마음이 스물스물 올라왔다. 친구에게 한껏 호들갑을 떤 후 영화가 시작됐고, 기대와 달리 한동안 애매한 기분을 숨길 수 없었다. 말 그대로 구성이 애매했기 때문이다.
(*장재현 감독님을 존경하고 <검은 사제들>로 오컬트물에 입문하게 되었으며 아래의 항목은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임을 밝힙니다)
1. 화림 실종 사건: 누가 주연인가
영화는 ‘화림’의 비행기 씬으로 시작된다. 일본어로 말을 거는 승무원에게 “저는 한국 사람이에요.” 대답하자마자 한국 대신 야자수 가득한 LA 도로가 등장한다. 첫 번째 장 -음양오행-이 시작되면, 화림이 자신의 업인 무당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무려 1분여 가량 되는 나레이션은 “나는 무당 이화림이다.”라는 비장한 대사로 끝을 맺는다. 화림의 톤에 비해 내용이 심심해서(무당 기초 지식에 기반함) 나레이션의 존재 이유가 의문스러웠고, 장면 호흡 또한 러프해 영화보단 넷플릭스 시리즈 1화에 가깝게 느껴졌지만, 마지막 대사가 굉장히 포부 넘쳤기에 주인공 화림을 띄워주려는 감독님의 작전으로 여기고 머리를 비울 수 있었다. 그렇게 2장의 돼지 굿판까지는 얇은 긴장감에 몸을 맡긴 채 잘 흘러갔다. 주인공이라고 믿고 있는 화림이 씩씩하게 전진해 준 덕분일 것이다. 그런데 4장 -동티- 부근에서부터 물음표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화림이… 어디 갔지…?
영화는 일본 요괴 오니가 범의 나라 한국을 어떻게 침체시켜 왔는지 보여 준다. 최민식 ‘상덕’의 손을 빌려서 말이다. 나는 한국 사람이고 한국 무당이라고 비장하게 밝혔던 화림은 상덕이 똑바로 선 관의 존재를 알아차릴 때 봉길이랑 헬스장 가서 스피닝 하고 있다.
주인공의 첫 번째 과업은 중요한 변곡점인 꼭지들을 파헤치고 해결하는 것이다. 파묘에서는 커다란 퀘스트 네 개가 강건히 버티고 있다. 첫 번째, 꼿꼿한 관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 / 두 번째, 보국사에 가서 요괴의 정체를 파헤치는 것 / 세 번째, 바로 그 오니와 맞서 싸우기로 결심하는 것 / 네 번째, 이순신 단검 액션. 화림이 오프닝을 이끈 것이 전생 같을 만큼 대다수의 주어는 ‘상덕’이다.
물론 화림에게도 기회는 주어진다. 나무 신을 빌어 오니와 마주하기. 위치도 완벽하다. 오니를 처단하는 마무리 절정 직전. 정말이지 주인공스러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앞서 상덕에게 “요괴를 없앨 순 없지만 시간 정도는 끌어 줄 수 있다”고 시니컬하게 이야기하는 걸 보고 주인공이 저렇게 포기가 빨라도 되나 싶었지만, 실제로 그 순간이 오면 당연히 멋진 일격을 날려 줄 거라고 생각했다. 주인공이니까. 나무 신 액팅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러나 시종일관 뛰어난 무당임을 어필했던 화림은 정작 자신에게 가장 큰 고난을 선사한, 심지어 봉길을 거진 죽일 뻔한 빌런과 맞부딪히는 결정적 구간에서 도망쳐 버린다. 그래서 여기가 최종 갈등이 아닌 줄 알았다. 최종_최최종_최종의최종으로 큰 꼭지가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화림이가 행동하길 기다렸다. 하지만 가랏 할머니를 시전하며 할머니신을 포켓몬처럼 던지고 도망치는 것이 화림의 마지막 액션이었다. 그러면 화림은 영화 내내 무얼 했나?
두려워했다.
물론 빌런이 강한 건 영화의 장점이다. 특히나 파묘의 빌런은 일본 요괴이기에, 부가 서사 없이도 관객을 주인공에게 흡수시킬 수 있는 훌륭한 영화적 장치가 된다. 그러나 이는 행동하는 주인공에 한한 장점이다.
주인공의 두 번째 과업은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것이다. 강한 적과 맞서 싸우고, 털리고, 자아를 상실할 뻔한 엄청난 시련을 겪고 무너져도, 그래도 다시 일어나 맞서 싸우는 것이 주인공의 미덕이다. 결국 그것을 해내고 성장하는 인물만이 주인공 소리를 듣는 것이다. <파묘>에선 주인공의 과업을 해내는 인물이 상덕밖에 없다. 그래서 파묘는 다중주연물일 수 없다. 전생에 이순신이었던 상덕의 명량 오컬트 속편일 뿐이다. 이럴 거면 왜 화림이 영화의 문을 열었는가….
2. 영근 사망 사건: 상덕을 위해 희생하다
화림이 그렇다면 봉길과 영근은 어떨까. 실종을 넘어 사망 수준이다. 중반부까지 둘의 비중은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가뭄이다. 이도현 배우는 연기파 선배들과 함께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재능 기부 출연을 한 건가 놀라워할 무렵 봉길이 입원하는 바람에 의문 하나가 줄었지만, 영근은 후반부에서마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지분을 맡고 있었다. 해외신앙을 믿는 국내 장의사. 분명 재미있는 설정이지만, 미약한 감초로 소모되다 마는 역할에 유해진이라는 엄청난 배우가 캐스팅된 것이 아깝다. 화림과 봉길과 영근은 소모되었다. 상덕을 살리기 위해서.
3. 퉁치기
캐릭터 비중 조절 실패만큼이나 아쉬운 점은 관객으로서 궁금한 것들을 자꾸 퉁치고 넘어간다는 것이다. 관객은 특이하게 생긴 젊은 무당 듀오와 풍수지리사, 장의사라는 기막힌 조합이 어쩌다 성사되었는지 알 수 없다. 누구 하나 무난한 성정이 없는데 협업하며 부딪히지는 않았을까? 화림이 망설임 없이 일거리를 제안한 것으로 보아 전에도 알고 지냈던 사이 같은데, 그렇다고 아주 친해서 반갑게 맞이하는 모양새도 아니고, 이들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의 정체는 무엇일까? 궁금한 게 천지에 널렸는데 풀어 주지 않는다. 그냥 화림이 연락해서 일하게 됐고 그걸로 끝이다.
추가 서사가 필요한 게 아니다. 상반되는 인물들을 모아 놓았을 때 생기는 긴장감, 상충하는 욕망끼리 대치하며 발생하는 극도의 텐션을 겹겹이 쌓아서 절정까지 끌고 갈 대사 몇 줄, 지문 몇 개가 필요했을 뿐이다. 화림과 봉길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케미는 개봉 전 특히 관심을 많이 받았던 요소인데, 막상 본편을 까 보면 봉길은 키링마냥 화림을 따라다니기만 할 뿐이다. 봉길이 목숨 걸고 화림을 구하기 전까지 비즈니스 파트너를 넘어서는 연출이 전무해서, 화림이 입원한 봉길에 대해 ‘야구하다가 때려치고 나 때문에 무당 됐다’고 덧붙이는 것이 다소 설명적이고 이질적이다. 대사 한 줄로 퉁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중요한 설정 아닌가. 앞서 두 사람의 끈끈한 유대감을 드러내는 제스처가 쌓여 왔다면, 화림이 말 한마디 없이 병실 앞에 앉아서 한숨만 쉬어도 관객들은 가슴이 미어진다.
“나는 붕괴됐어요.” <헤어질 결심>의 하고 많은 부분 중에 이 대사가 명대사로 꼽히는 이유는, 그 말이 ‘당신을 사랑해서 아프다’는 말 한마디보다 더 날카롭게 사랑을 관통하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말의 힘을 만드는 건 직접적인 설명이 아니라 비언어적 지문과 촘촘한 서사이다. 파묘는 사람들을 홀리고도 남을 신선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이들이 한 군데에 모였다면 다음은 충돌할 차례다. 서로 다른 인물이 부딪히면서 생기는 촘촘한 갈등, 그것을 똑똑하게 풀어나가는 방식, 종국에는 화합해서 공동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성장하는 모습이 관객으로서 파묘에게 바랐던 다중주연물의 모습이다. 이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도 퉁치면 안 된다.
4. 퉁치기 2: 비대한 메시지
최종적으로 영화에서 한 발짝 물러서게 된 장면은 상덕이 우리의 후손을 생각해서라도 아직 끝나지 않은 이 싸움에 참전해야 한다며 팀원들을 설득할 때다. 초중반부에 서사가 충분히 쌓이지 않은 상태라, 왜 다른 인물들이 발을 빼고 있는 문제에 상덕 혼자 저렇게까지 노력하고 매달리는지 타당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마치 실수로 중요한 부분을 스킵한 느낌이었다. ‘쇠말뚝’이라는 메시지가 장르를 넘어 몸집을 불리는 것이 보이자 남아 있던 애정마저 급격히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결국 화림, 영근 다 제치고 상덕의 손으로 왜놈 오니를 처단하는 것까지 완벽한 이순신 환생 서사였다.
상덕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이 한 게 없다고 느껴지니, 독립운동가 시그니처 ‘사진 남기기’에서도 감동은 반감되고 오히려 의문만 커져 갔다. 분명 오컬트 영화를 보러 온 건데 오컬트는 어디 가고 항일만 남았지?
예고편이 준 기대와 매력을 뚝 잘라먹은 채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5. 최종 감상
윤봉길 의사에서 따 온 윤서방 봉길이 몸빵캐인 것도 재미있고, 한일전을 오컬트로 말아 주는 것도 신선한데, 그만큼 인물과 소재의 비중이 골고루 분배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다. 파묘의 진짜 재미는 분석 글을 봤을 때 찾아온다는 말도 들었지만, 그게 진짜 영화가 준 재미인지는 의문이다. 영화는 극장 안에서 승부 보는 매체다. 영화에서 주지 않은 정보는 없는 거나 매한가지다. 이미 완성된 영화에 사소한 디테일을 더하기 위해 찾아보는 것과, 얼기설기 얽혀 있는 퍼즐을 맞추기 위해 반드시 찾아 봐야만 되는 영화는 분명 다르다.
장재현 감독은 상업 장르 영화의 지평을 연 인물이다. 오컬트가 뭔지도 모르던 한국 관객들에게 <검은 사제들>을 기깔나게 말아줘 놓고 갑자기 김치탕후루찜을 줘버리다니… 김치토마토찜 정도였으면 맛있게 먹었을 텐데… 기대한 만큼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나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애초에 망한 영화라면 아쉽지도 않다. 감정을 침범하지 않고 장르 안에서 적절히 쓰인 스코어, 너무 많이 본 ‘항일영화’라는 소재를 감독의 장기인 오컬트와 믹스한 것, 독립운동가 이름을 따 온 캐릭터 설정 등 기대할 수밖에 없는 아이디어들이 넘치는 영화이기 때문에 더 아쉽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에필로그: 화림 실종 사건의 전말
도무지 의문이 풀리지 않아 영화 전공자에게 화림 실종 사건에 대해 물었다.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고 끝간데없는 추측이 난무했다. 그 중 가장 그럴싸했던 추측은 '제작사/투자사의 난입'이다. 원래 주인공은 상덕이었으나, 돈 주무르는 쪽에서 개노답 삼형제 '요새 이런 거 안 먹혀', '젊은 애들이 좋아하는 거 해야 돼', '화림이 얘가 엠지애들이 좋아하게 생겼네'를 내미는 바람에 뜬금없이 화림이 영화의 포문을 열게 되었다는 썰이다.
그냥 추측일 뿐이니 불편한 분들은 자세를 고쳐앉아 주십시오. 뻔뻔하게 요구 드립니다.